196화
목이 잘렸다고 해서 가스팔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아르파드는 잘린 목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검을 다시 휘둘렀다.
스컥!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몸체까지 반으로 갈라졌다. 누가 보아도 살아 있을 수 없는 상태.
아르파드는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번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가스팔의 갈라진 몸체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가 아르파드에게 날아들었다.
머리를 향해 직진하는 물체를 아르파드가 팔을 내밀어 방어했다.
푹―!
정체불명의 그것은 아르파드의 팔뚝을 찔러 들어갔다.
“큭!”
아르파드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르파드?”
이상했다. 조금 다쳤다 해서 공격을 그만두는 건 아르파드답지 않은 일이다.
지금은 무엇보다 가스팔을 완전히 끝장내는 게 최우선이니까.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선 이유가 가벼울 리 없었다.
팔 상태를 확인하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건……!”
그의 팔뚝에 기묘한 게 박혀 있었다.
거대한 거머리처럼 생긴 거무튀튀한 물체는 순식간에 아르파드의 살을 파고들어 피부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벌레가 파고든 지점부터 검은색의 기묘한 마법진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난 이게 뭔지 알았다.
‘스펠 웜!’
전생에 실험체로 지낼 때 본 적 있었다.
가스팔이 어렵게 만들어 낸 특수한 마법 생명체 중 하나.
“귀엽지? 이 아이들의 기능은 더 귀여워. 사람 몸속을 파고들어 뇌와 신경계 속에서 내 명령을 듣고 조종하는 거지.”
“놀랍지 않아? 이 작은 게 드래곤의 용언을 응용해 만들어 낸 물건이라는 게 말이야. 물론 드래곤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지만 말이야.”
그리고 나는 그 성능을 몸으로 직접 경험해 본 적까지 있었다.
벌레가 파고드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또 자의와 상관없이 조종당하는 감각이 얼마나 끔찍한지도.
‘저것까지 벌써 완성되어 있었던 거야?’
수조 속 실험체처럼 저 벌레 역시 내 기억보다 발전 속도가 빠르다.
원래대로라면 3년 후 시점이 되어야 저 형태와 크기의 스펠 웜을 키워 낼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내가 한 행동들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영향을 미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일 터다.
깊은 자책감이 들었다.
‘내가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는데…….’
그랬다면 아르파드가 이렇게 궁지에 몰릴 일도 없었을 텐데.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덜 아플 것 같았다.
가스팔이 아르파드에게 이 벌레를 쏘아 보낸 이유가 너무나도 명백했다.
약해진 아르파드를 지배해서 조종하려는 게 분명했다.
몸이 세 조각 난 와중에도 아르파드의 신체에 대한 집착은 그대로라니.
징그러울 지경이었다.
고통스러울 게 분명한데도, 아르파드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귀찮은 놈이군.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내가 잘 알아. 그리고 당신도 진짜 아무렇지 않은 거 아니잖아? 평소에는 내 관심이 좋다고 즐겼으면서.”
“…….”
그나마 다행인 건 과거의 나와 달리 아르파드는 확실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점이다.
팔뚝에 파고든 스펠 웜은 더 깊이 침범하진 못했다.
검은 마법진의 확장이 멈췄다. 붉은색의 마력이 마법진의 가장자리에서 파직거리며 일렁이는 게 보였다.
스펠 웜과 아르파드의 마력이 서로 길항하고 있는 거다.
아르파드는 벌레를 쫓아내거나 태워 버리기 위해.
벌레는 더 깊이 침범해 그를 지배하기 위해.
다행히 스펠 웜은 멈춰 있었지만, 아르파드가 자력으로 체내에서 쫓아내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
이 벌레가 악질적인 건 단순한 물리력은 아예 통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칼로 째고 끄집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신성력을 쓸 수 있다면 간단할 텐데…….’
마력과 반발하는 신성력이라면 스펠 웜을 단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도 신성력은 전혀 끌어낼 수 없었다.
체내에서 완전히 고갈된 상태라, 시도하는 것마저도 무리였다.
‘신성력이 안 된다면, 강력한 마력으로 짓누르는 수밖에 없어.’
약해진 상태의 아르파드는 자력으로 그걸 해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수단밖에 없다.
결국 나는 가스팔의 등에 박혀 있는 단검을 회수할 수밖에 없었다.
가스팔의 재생을 방해하고 있던 단검이 스르륵 녹아 흩어졌다.
붉은빛이 다시 한번 내 손에 모여 단검의 형태를 이룬다.
조심해서 아르파드의 팔뚝에 파고들어 꿈틀거리는 스펠 웜을 찔렀다.
쿡!
실수로라도 아르파드를 찌르지 않도록 아주 신중했다.
‘아르타누스의 용언은 내가 아르파드의 심장을 찌른다는 거니까, 실수로 팔을 찔러도 큰일은 없을 것 같긴 한데…….’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끔찍하고 짜증 나는 단검이지만 지금은 쓸모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단검 끝으로 콕 찌른 것뿐인데도, 기괴한 벌레는 수포가 울룩불룩 일어나더니 그대로 터져서 죽어 버렸다.
아르파드의 피부에 나타났던 검은 마법진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고마워.”
아르파드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무력화된 벌레를 잡아 뽑아서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잔해를 지르밟으며 가스팔을 노려보았다.
“제 주인처럼 지긋지긋한 놈이군.”
그사이에 가스팔은 세 조각 나 있던 머리와 몸을 서로 이어 붙이고 있었다.
저쯤 되면 인간인지, 아메바인지 헷갈리는 수준이다.
진저리를 치는 우리의 반응에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마치 피부 위를 기는 벌레처럼 느껴졌다.
나는 혐오감을 참지 않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중얼거렸다.
“징그러워.”
그러자 가스팔은 재수 없게 웃었다.
“최고의 칭찬이군. 고마워.”
아까 아르파드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치는 걸 보면, 우리가 비꼬거나 욕한 걸 신경 안 쓰진 않는 모양이다.
“아까워라. 아까 그 아이는 어렵게 만든 첫 완성작이었는데 말이야.”
기괴하게 몸을 틀어 나와 아르파드를 바라보며 가스팔은 히죽 웃었다.
“…짜증 나는군.”
“진짜 짜증 나는 건 우리야. 먼저 우리를 건드린 건 너라고.”
내 비난에 가스팔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그와 함께 가스팔의 뒤편 벽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끄아아악!!!”
검은 뱀의 목소리였다.
우리가 가스팔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검은 뱀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들이 검은 액체 형태로 녹아내려 기괴한 촉수의 형태를 이뤘다.
그리고 몇 줄기의 촉수가 검은 뱀의 사지를 찌르기 시작했다.
“자비로 살려 둔 도구가 주인을 물면, 분노하지는 않아. 단지 짜증이 날 뿐이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검은 뱀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자비는 개뿔! 애초에 내 마력과 신체를 재료로 쓰려고 잡아 놨으면서 개소리는… 크흑!”
검은 뱀의 말 대로였다. 실험체는 촉수를 찔러 넣어 그로부터 마력을 쪽쪽 빨아내고 있었다.
세 조각났던 가스팔의 신체는 얼기설기 붙은 상태지만, 표피 아래의 붉은 조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치 흉측한 화상 자국이 남은 듯했다. 한눈에도 타격이 커 보였다.
‘아르타누스의 단검과 아르파드의 공격이 효과가 있었던 거야.’
이를 회복하기 위해 가스팔은 검은 뱀의 마력과 생명력을 빨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크헉! 으아아악!!!”
처참한 비명이 지하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 * *
가스팔의 행동은 명백히 과시적이고 가학적이었다.
그는 마치 사로잡은 곤충의 다리를 하나하나 떼며 즐거워하는 사악한 어린애처럼 굴었다.
그러면서도 가스팔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내 반응을 기대하고 관찰하는 거다.
“차가운 여자로군.”
“…뭐가?”
“너를 구하려 한 남자가 고통받고 있는데, 남편의 등 뒤에 숨어서 지켜만 보고 있지 않나.”
“…웃기지 마. 납치한 것도, 고문하고 있는 것도 너면서 왜 나를 비난해?”
가스팔의 입꼬리가 쭉 끌려 올라갔다.
“아니, 비난하는 게 아니야. 감탄하고 있는 거지. 영리하고 당연한 행동이니까.”
조금 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릴 때보다 더 기분이 나빴다.
나는 최대한 냉소적으로, 가스팔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칭찬 고마워. 넌… 똑똑하겠지만, 멍청해.”
“뭐, 악담이나 저주를 해 대는 거야 익숙하지만, 생각보다 약하게 하는군?”
“별로 그런 건 아니야.”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고 네가 지금 괴롭히고 있는 그자에게 별 관심이 없긴 하지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방해하고 싶어졌거든.”
가스팔은 어쩐지 조금 흥미가 가라앉은 듯한 눈으로 나를 관찰했다.
“결국 마음 약한 평범한 여자에 불과한 모양이군.”
“…마음대로 생각해.”
아르파드가 도착한 직후부터 내 목표는 가스팔이 아니었다.
검은 뱀도 아니었고.
가스팔의 등 뒤.
여기서 가장 강력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저 거대한 유리 수조.
저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실험체였다.
저건 가스팔의 연구와 마법을 집대성한, 그야말로 정수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계획을 박살 내고, 가스팔의 영혼을 파괴하려면…….
저자에게 나와 아르파드의 복수를 제대로 하려면…….
‘저걸 부숴야 하니까!’
중간에 몇 번 위기 상황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겨우 준비가 끝났다.
긴 기다림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나는 한껏 웃으며 가스팔을 향해 선언했다.
“난 네가 이루려는 모든 걸 박살 내 줄 거야. 왜냐고? 네가 나에게 한 짓들이 너무 끔찍했거든.”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가스팔은 나를 불가해한 존재를 보듯 했다.
그 순간.
파창-!
수조를 감싸고 있던 결계의 위쪽이 부서졌고.
쩍―!
연이어 거대한 수조에 금이 갔다.
혈색이라는 게 거의 없던 가스팔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