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회귀 전의 기억을 되찾은 아르파드는 드래곤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일부라도 흉내 내는 데 성공한다면 가스팔이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아르파드는 살짝 고개를 모로 꼬더니 물었다.
“네 마력 전체를 걸고 맹세할 수 있나?”
평소의 아르파드라면 절대 귀 기울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그는 최악으로 몸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용할 방법이 없을지 확인할 겸, 조금이라도 회복할 시간을 벌려고 물어보았다.
“얼마든지.”
힐리아는 경악하여 끼어들었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죽어도 안 돼! 내가 왜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당신을 두고 왔던 건데!”
온 힘으로 아르파드의 팔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그러자 가스팔의 말에 흥미를 보이던 아르파드의 시선이 힐리아에게 돌아갔다.
“왜 그랬던 건데?”
사실 이건 아르파드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너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지금은 힐리아의 안위가 가장 우선이었기에 접어 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힐리아 입에서 저 말이 나오자 당연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을 두고 떠났는지.
그것도 추억과 현실을 조작해 가면서까지.
한 귀로 듣기에 비난으로도 들릴 수도 있는 말.
힐리아의 눈이 붉어졌다.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힐리아는 거칠게 침의 소매로 닦아 낸 다음 결연하게 외쳤다.
“당연히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런 거지!”
“…!”
동문서답이다. 그럼에도 아르파드의 멍청한 심장은 저 말이 좋다고 두근거렸다.
한편으로는 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고, 눙쳐서 넘기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서운함이 치솟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힐리아는 도망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을 표현했다.
땅끝까지 도망쳐 왔음에도 아르파드가 쫓아왔고, 무엇보다 지독한 위협 앞에서까지 진심을 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신을 지키고 싶어서 도망친 거야!”
잠시 의아해하던 아르파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이 여전히 날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 한다는 점을 확인한 건 당연히 기쁘지만… 날 떠나는 게 어떻게 지키는 일이 되는 거지? 반대인 것 같은데.”
아르파드는 더없이 진지했다.
“심장이나 영혼 없이 살 수 있을 리 없잖아. 당신이 떠나는 건 결국 날 죽이는 짓이야.”
“…!”
다급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열정적인 고백의 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무시당한 가스팔은 조금 전처럼 자신에게도 주의를 집중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마력을 일으켰다.
스컥―!
하지만 그가 그림자로부터 쏘아 낸 촉수는 아르파드의 오러에 손쉽게 잘려 나갔다.
“이런 분위기는 방해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는 것도 모르나?”
“그딴 게 어디의 불문율이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야 사랑의 기쁨과 소중함도 모르는 노총각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
“…….”
가스팔은 딱히 진심으로 화가 나지는 않았다.
물론 아르파드의 인신공격이 사실이긴 하지만, 가스팔은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족속이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미리 준비해 둔 마법진 몇 개가 동시에 발동하여 아르파드의 등을 공격했다.
짜증이 났기 때문은 아니다. 원래 그럴 작정이었다.
펑! 퍼펑!
아르파드는 뒤에 눈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오러로 마력탄을 전부 처리했다.
가스팔은 낮게 혀를 찼다.
‘역시 약해졌어도 빈틈이 거의 없어.’
어째선지 모르겠으나, 아르파드가 전에 없이 약해져 있는 건 분명했다.
굳이 그를 인질이 있는 이곳까지 초대한 이유에는 그것도 컸다.
약해져 있다면 그만큼 쉽게 제압하여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소중히 여기는 인질까지 있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아르파드가 넘어옴과 거의 동시에 힐리아가 벌인 일 때문에 가스팔의 노림수가 빗나갔다.
‘설마하니 드래곤의 힘이 담긴 무기를 가지고 있었을 줄은…….’
드래곤이 힐리아에게 직접 준 게 틀림없었다.
단검이 형체를 드러내기 전까지 가스팔이 그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도, 또한 단검에 찔린 순간 신체의 마법 회로와 마력이 타오르고 끓어 넘쳐 망가질 뻔했던 것도 그렇다.
그 때문에 가스팔이 움직이지 못한 동안 저 둘이 만나 버렸다.
인질을 잡고 느긋하게 협박해 원하는 걸 얻어 내려 했는데 전부 어그러졌다.
저 단검이라도 손에 넣었다면 좀 나았겠지만, 놀리듯이 빠져나가 버렸고.
‘정말 드래곤에게 축복받은 존재가 맞는 모양이군.’
낭패감과 짜증 사이에서 그보다 더욱 강한 흥미가 치솟았다.
“좋아. 일가족을 전부 손에 넣고, 내가 질릴 때까지 실험하고 고문해 주지.”
“그 전에 네놈 목이 먼저 떨어질 거다.”
가스팔의 마법과 아르파드의 오러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불꽃이 일고, 충격파에 온갖 집기가 부서져 나갔다.
당연히 아르파드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 힐리아에게는 전혀 충격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힐리아는 보았다. 아르파드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역시 무리한 거야!’
하룻밤 만에 황궁에서 동쪽 끝 베네타까지 온 건 비정상적이다.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아르파드의 심신을 심각하게 소모시킨 건 분명했다.
창백한 안색도, 움푹 들어간 뺨도, 힐리아로서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아르파드를 도와야……!’
힐리아는 다시 한번 신성력을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
고갈된 신성력을 끌어 올리려 하자, 다시금 몸에 고통이 왔다.
아이 역시 힘이 들기라도 하는 것인지 아랫배가 또 아릿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이던 힐리아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이 자리에 선 세 사람 모두 잠시 잊고 있던 존재가.
* * *
이곳은 가스팔의 본거지였다. 그가 만든 온갖 마도구와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연히 가스팔에게 유리한 곳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르파드는 타격을 입은 몸으로 힐리아를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 불리한 상황.
결국 아르파드가 조금 밀리기는 하지만, 어느 쪽이 명백하게 유리하지 않은 상태로 전황은 고착되었다.
이 팽팽하고 위태로운 균형이 깨진 것은 외부로부터 날아든 작은 돌멩이였다.
전조 없이 갑자기 붉은 마력으로 감싸인 단검이 바람처럼 날아들어 가스팔의 등을 찔렀다.
퍽!
“커헉?!”
가스팔은 경악했다.
이 공격은 아르파드나 힐리아에게서 온 게 아니었다.
가스팔은 충분히 두 사람을 경계하고 있었으니까.
단검이 날아온 방향은 다른 곳이었다.
가스팔은 이를 갈며 그자의 이름을 불렀다.
“크라우! 네놈이!”
벽에 꽂힌 곤충 표본 꼴인 검은 뱀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을 고정하고 있던 사슬은 대부분 그대로였다.
다만 단 한 곳, 오른손만은 자유로워져 있었다.
사슬을 잘라 내고, 가스팔의 등을 찌른 것은 같은 무기였다.
붉은 마력이 마치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크아악!”
바로 아르타누스의 단검이었다.
* * *
아르파드는 나를 지키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대로 싸움이 길어지면 아르파드에게 너무 불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분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길이 없다면 만들어 내야 한다.
아르파드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 아이도, 나도.
우리 가족 모두가… 무사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그때였다. 다들 잠시 잊고 있던 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은색 외눈이 똑바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검은 뱀!’
크라우 테슬란.
가스팔에게 저항하다가 함께 잡혀 왔다는 그는 벽에 사슬로 결박된 상태였다.
아마 아르파드와 가스팔의 싸움 여파에 정신이 든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마법이 깃든 사슬로 몇 겹이나 묶여 있는 검은 뱀이 싸움에 끼어들 방법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벼락처럼 한 가지 생각이 뇌리에 내리꽂혔다.
나는 가스팔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애를 쓰며 검은 뱀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한 가지 행동을 시도했다. 가능한 일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까.
‘반드시 해내야 해!’
아르타누스가 나에게 준 이 단검을 나타나게 하는 것도, 없애는 것도 내 의지의 문제였다.
가스팔의 손안에 있었지만 내 의사를 따라 다시 돌아왔던 것처럼.
‘그렇다면…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형체를 이루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검은 뱀의 손안이라던가 말이다.
가스팔에게 들키지 않도록 애쓰면서,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성공했다.
검은 뱀의 손안에 아르타누스의 단검을 형체화 시키는 것을.
“!”
검은 뱀은 갑자기 손안에 나타난 단검의 감촉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걸렸다.
나 역시 웃으며 소리 없이 입술만을 움직여서 말했다.
‘네 복수를 해, 바로 지금 그 손으로!’
그리고.
퍽!
아까 내가 직접 찌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위력으로, 아르타누스의 단검이 날아가 가스팔의 등에 틀어박혔다.
“커헉!”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았어도, 아르파드는 역시 아르파드였다.
허점이 드러난 순간, 그대로 달려들어 오러로 둘러싸인 검을 휘둘렀다.
서걱―!
가스팔의 목이 잘려 허공으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