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울컥, 감정이 흘러넘치려 했다. 힐리아는 겨우 참고 대답할 수 있었다.
“나도…….”
“거짓말.”
아르파드의 입에서 처음으로 원망 어린 말이 나왔다.
힐리아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날 버리고 갔잖아. 그런 당신이 날 보고 싶었을 리가 없어.”
겨우 참았던 감정이 결국 터져 나왔다.
힐리아의 눈가에 몇 방울 맑은 액체가 진주처럼 어리는 걸 보며 아르파드는 치솟는 욕망을 꾹 눌렀다.
안 그랬다간 저 눈물을 모두 핥고, 입술을 삼키고 놓아주고 싶지 않아질 게 뻔하니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지. 게다가 힐리아의 몸 상태도 생각해야 하고.’
“전하, 제발 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우리 아가씨께서는… 지금, 지금 회임 중이십니다!”
새삼 억울함과 원망이 치솟으려 했다.
‘내 아이를 가지고도 나를 버렸단 말이야?’
하지만 이걸 대놓고 내뱉지는 못했다.
힐리아의 상태를 걱정한 것도 있었고, 더 나아갔다가 만에 하나라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로 또 버려질까 봐 무서웠다.
어린아이 같은 감상이지만, 진심이었다.
물론 힐리아가 다시 버리고 도망친다면 그는 땅끝까지, 아니, 대륙 너머까지라도 쫓아갈 테지만 말이다.
“몸은 괜찮아?”
“나는 괜찮…….”
겨우 조금 정신을 차리고 아르파드를 정면으로 마주 본 힐리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당신 얼굴 왜 이래?!”
아르파드의 얼굴이 반쪽에다가 회색빛을 띠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겨우 한 달 못 봤다고 움푹 파인 뺨을 매만졌다.
“아니, 잘생긴 얼굴이 이렇게 상하다니. 이건 대륙적 손해라고!”
버리고 도망갔으면서 얼굴 살이 좀 내렸다고 이렇게 당황하다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기뻤다. 아르파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 덕분이지.”
“…응?”
“당신이 떠난 뒤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니까. 아무리 나라도 얼굴이 상할 수밖에.”
사실 그 때문이 아니라 드래곤의 마력을 무리해서 운용해 하룻밤 만에 베네타까지 온 여파가 더 컸지만.
아르파드는 일부러 숨겼다.
힐리아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걸 원치 않은 것도 있었고, 불쌍하고 약한 척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조금 불쌍해서라도, 동정해서라도 자신을 또 떠날 생각을 하지 말아 주기를 바랐으니까.
아르파드의 머리는 부지런히 움직여 어떻게든 힐리아에게 다시 버려질 가능성만은 줄이려고 발악 중이었다.
“…….”
힐리아는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꾸르륵거리는 기괴한 소음 섞인 목소리가 끼어들어 둘만의 세상을 방해한 것은.
“끄륵, 거기 잉꼬부부… 꺼으윽, 사람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짓은 그만하시, 켁! …지.”
그제야 힐리아와 아르파드는 가스팔의 존재를 깨달았다.
힐리아와 달리 아르파드는 그를 충분히 경계하고 있긴 했다.
다만 지금 가스팔은 힐리아가 찌른 드래곤의 단검 때문에 고생 중이었기에 그냥 놔둔 것이었다.
단검은 드래곤 하트로 만들어진 거라 그 마력을 보자마자 아르파드는 누구의 손이 닿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안 죽었군. 쯧.”
아르파드는 불만 가득한 어조로 혀를 찼다.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던 가스팔은 마침내 입으로 단검을 토해 냈다.
“커헉!”
단검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의 손안에 들어왔다.
가스팔은 이채 어린 눈빛으로 힐리아를 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대단하군.”
아르파드에게 당하거나 타격을 입는 건 예상하고 경계한 바였다.
“설마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타격을 입을 줄은 몰랐는데…….”
가스팔은 자신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지나치게 얕보았던 모양이야. 무력한 여자라고 말이지.”
하지만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가스팔은 환희 넘치는 눈빛으로 아르타누스의 단검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거의 사랑에 빠진 듯한 끈적한 눈빛이었다.
“이렇게까지 강력하고 순도 높은 드래곤 하트를 통째로 써서 만들어진 마도구라니… 믿어지지 않는군. 황후의 보관에 있던 드래곤 하트보다 몇 배는 강력해.”
손끝으로 날을 훑으며 내뱉는 말에는 열정을 넘어서서 광기가 어려 있었다.
“이렇게까지 완벽한 마법식이라니. 아름다워… 드래곤이 직접 손댄 게 아니면 불가능하겠지.”
가스팔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이런 물건을 선물해 주다니. 차라리 감사해야겠군! 아하하!”
그러자 힐리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누가 너 같은 놈에게 선물로 준대?”
그 순간.
가스팔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힐리아가 단검을 회수한 것이다.
아르타누스는 힐리아의 의사에 반응하도록 단검에 마법을 걸어 두었으므로.
“헉! 안 돼!”
드물게 진심 가득한 가스팔의 낭패한 비명이 울렸다.
그가 갖은 애를 썼지만, 주인의 뜻에 따라 마력으로 흩어져 되돌아가는 걸 주워 담지는 못했다.
붉은 마력은 물처럼 자유롭게 흘러 힐리아의 왼손으로 돌아갔다.
“…….”
잠시 허무하고 억울한 침묵이 지하실 안을 휘돌았다.
가스팔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가 된 꼴이었다.
한편, 아르파드는 단검을 이루고 있던 마력이 힐리아의 왼손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워낙 완벽히 숨겨져 있어 평소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니 모를 수 없었다.
‘아르타누스의 힘이군.’
그 엄청난 마력과 권능을 직접 다뤄 본 지금은 더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때 날 재워 두고 빌어먹을 도마뱀이 힐리아에게 뭔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그런 걸 묻고 있을 때가 아니니 알아내는 건 나중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하지만 감히 힐리아의 몸에 저런 흔적을 남겨 두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왼손에.’
힐리아의 왼손에 있어도 되는 건 두 사람의 결혼반지뿐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아르파드는 조금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자신과 이혼하겠다고 현실까지 조작하고 도망쳤으면서 힐리아의 왼손 약지에는 여전히 스타틸리아의 별이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결혼반지가.
하지만 불쾌감도 만족감도 지금은 마음껏 누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스팔이 대놓고 힐리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불쾌한 눈빛이었다.
아르파드는 힐리아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가스팔을 향해 칼을 내밀었다.
검신을 따라 붉은 오러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꺼져. 그러면 당장 목숨은 부지하게 해 주지.”
“당장? 나중엔 안전 보장을 안 해 주겠다는 거로 들리는데?”
아르파드는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잖나. 지금 네놈이 물러나도 끝까지 쫓아가서 명줄을 끊어 버릴 테니까.”
가스팔 역시 히죽 마주 웃었다.
“그건 전혀 협박이 안 되고, 협상도 아니라는 걸 잘 알겠지?”
“모르면 바보 아닌가.”
두 남자는 서로 충만한 살의와 광기를 내보이며 웃었다.
힐리아는 조금 황당했다.
‘아니, 왜 저렇게 유쾌하게 웃는 건데?’
둘 다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가스팔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 쪽에서는 제대로 된 거래를 제안하도록 하지. 내가 원하는 걸 내놓으면, 네 아내만은 무사히 살려서 내보내 주도록 하지. 네가 바라는 게 그거 아닌가?”
가스팔의 탐욕스러운 눈이 아르파드를 핥듯이 바라보았다.
그걸 깨닫고 힐리아는 새삼스레 욱했다.
“그딴 눈으로 내 남편 보지 마!”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드래곤 당사자를 제외하면 가장 짙은 용혈을 지닌 샘플이 내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데.”
“누가 누구 손아귀에 들어와 있다는 거지?”
아르파드는 검기를 날려 가스팔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실험체가 든 수조를 향해 날렸다.
그러자 가스팔은 놀랍게도 몸을 날려 수조 앞을 막아섰다.
조금 전 아르파드가 힐리아를 지키려 한 것처럼.
아르파드의 오러는 가스팔의 결계에 막혀 수조나 그 안의 실험체에는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
다만 가스팔과 아르파드의 다른 점이 있다면 분노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중한 것이 다칠 뻔했다는 위기감 같은 게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스팔에게는 눈앞에 있는 힐리아와 아르파드도 소중한 실험체와 그 재료였으므로.
가스팔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하는 약속을 못 믿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해. 그쪽 부부의 사기에 내가 워낙 많이 당하지 않았나. 그런 사람들이니 남의 약속도 못 믿는 거겠지.”
가스팔은 제 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살려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쓸모가 끝나자마자 아르파드가 목을 날려 버린 걸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는 너는 예비 목숨을 다섯 개나 준비해 두고 우리를 속였으면서.”
“그게 참 신기하단 말이야. 내가 여분의 육신을 준비해 두는 걸 아는 자는 마탑 내에도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걸까.”
호기심과 의문 어린 눈이 다시 한번 아르파드의 뒤에 선 힐리아를 향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의심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하지.”
가스팔은 뻔뻔하게 요구했다.
“내가 원하는 건 용혈의 소유자야. 황태자와 지금 여자의 배 속 아이. 이 둘 만이면 돼. 여자 자체는 필요하지 않지. 그러니 놔줄 수 있어.”
아르파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믿을 것 같나?”
“그야 당연히 못 믿겠지. 내가 너희를 못 믿는 것처럼.”
그때 가스팔이 손을 내밀었다.
“대신 우리가 서로를 믿을 수밖에 없는 강제적인 조건을 만들 수는 있어.”
“뭐?”
“나는 드래곤의 용언 마법을 오래도록 연구했거든.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수준의 언령 마법을 일부 구현해 냈지.”
“…!”
가스팔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말려 올라갔다.
상대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내미는 자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었다.
“그 언령을 써서 계약하지. 네 아내의 안전을 그로써 보장하겠어. 어때? 이래도 믿을 수 없는 제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