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아르파드는 살기 어린 목소리로 뇌까렸다.
“듣고 있겠지. 내 아내를 내놔. 안 그러면 차라리 저번에 내 손에 죽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해 주지.”
그러자 바닥을 구르던 인형의 머리가 히죽 비웃더니 질문했다.
“내놓지 않으면 어쩔 셈이지? 더 강력한 보복을 하겠다고 해야 협박이 성립되지 않나? 그게 가능할까?”
그러자 아르파드는 차갑게 대꾸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머리카락 한 올, 피 한 방울,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죽어 버리겠다.”
“…….”
가스팔은 할 말을 잃었다.
아내를 납치한 인질범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인질로 잡는 남편이 여기 있었다.
잠시 여관방 안에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애니마저 벨테인(을 본뜬 인형)의 머리가 잘리는 걸 볼 때보다 더 경악한 표정이었다.
인형의 머리는 가스팔의 감정까지 드러내 주진 못한다.
다만 목소리와 어조에서 느껴지는 당혹감은 선명하게 반영했다.
“그, 그게 어떻게 나에 대한 보복이라는 거지?”
아르파드는 피식 웃었다.
“내 피 한 방울 받아 내겠다고 바닥을 굴렀던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
하긴, 그들은 서로 이미 알고 있었다.
가스팔의 궁극적인 목적을.
그리고 가스팔이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역시.
게다가 아르파드는 회귀 이전의 모든 기억을 되찾아 가스팔에 대한 정보를 꽤 가진 상태였다.
이미 힐리아를 납치했고 배 속 아이까지 확보한 상태이니, 아르파드까지는 필요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스팔의 용혈에 대한 집착이 이를 막았다.
가스팔은 막상 눈앞에 나타난 살아 있는 상태의 아르파드를 보자 온전히 손에 넣고 싶어졌다.
게다가 함부로 건드리기 힘든 게 분명했던 평소와 달리 약해져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역시 미친 황태자 전하께선 거짓말도 살벌해.”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이보다 더 진심일 수 없는데.”
“…….”
잘린 목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당연히 아르파드는 진심으로 죽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언급된 것만으로도 가스팔은 동요할 수밖에 없을 거다.
간절히 아르파드의 육신을 원하고 있으니까.
가스팔을 흔드는 게 아르파드의 진짜 목적이었다.
그는 속으로 낭패감을 억누르고 평온을 가장했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군.’
지금도 목구멍에서는 피 냄새가 올라왔고, 온몸의 뼈와 근육, 신경, 혈관이 전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만전의 상태였다면 가스팔을 상대하는 데 자신이 있었을 거다.
‘게다가 힐리아가 이미 인질로 잡혀 있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인질이 말이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적을 동요하게라도 만들어야 한다.
억지로라도 빈틈을 만들어야 이 궁지를 돌파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으니.
아르파드는 침착하게 미친 소리를 내뱉고, 미친 행동을 했다.
그는 거의 남지 않은 마력을 쥐어짜 오러를 피워올렸다.
붉은색의 오러는 마치 불꽃처럼 화려하고 위협적으로 한 줄기 타올랐다.
그 순간, 결국 기세에 눌린 마탑주는 항복했다.
결국 탐욕이 이겼다.
“그만.”
기묘하게 역전된 상황 속에서 가스팔은 황당하고 불쾌해했다.
“꽤 오래 살았지만 나보다 미친놈은 처음 보는 것 같군.”
욕인지 칭찬인지 구분이 안 되는 말이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씩 웃었다.
“최고의 칭찬이군.”
그가 힐리아에게 미쳐 있는 건 사실이고, 그 정도에 대한 감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벨테인을 흉내 낸 인형의 육체가 무너져 내리며,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작은 규모의 공간 이동 포탈을 여는 마법이었다.
온 대륙을 뒤져봐도 가스팔이나 비오 정도의 능력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수준의 힘이었다.
이곳에서 가스팔의 아지트가 멀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아르파드는 이런 사실까지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저 너머에 힐리아가 있으리라는 것만이 의미가 있었다.
아르파드는 최악의 몸 상태로 망설임 없이 문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 * *
가스팔의 상태가 이상했다.
아르파드가 가까이 있다는 말을 한 이후, 갑자기 표정이 굳더니 행동마저 멈췄다.
단순히 움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무언가에 주의를 송두리째 빼앗긴 듯한 기색.
‘뭐야? 진심으로 황당해하고 있어?’
저 가스팔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충분히 경악하면서도 그사이 내 몸은 착실하게 기회를 노리고 움직였다.
가스팔의 주의가 내게서 잠시 떨어진 지금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회였으니까.
석상처럼 굳어 있는 가스팔을 향해 나는 거의 구르듯 달려들었다.
동시에 온 힘을 다해 왼손을 휘둘렀다.
“!”
가스팔은 내 움직임을 파악하고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었다.
그야 당연했다. 나는 무력이 0%다 못해 마이너스에 가까운 일반인이었으니까.
게다가 호신용 무기와 마도구 역시 모조리 빼앗겼으니, 그저 맨손을 휘두르는 게 다였다.
그리고 이 사실이 내가 믿는 것 중 하나였다.
가스팔은 나를 상대할 때 육체적인 위협에 있어서만은 방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가까이 접근하자 가스팔이 미리 준비해 둔 결계가 발동했다.
내가 가스팔을 건드릴 수조차 없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였다.
그대로 결계에 튕겨 나가 꼴사납게 나뒹구는 게 예정된 미래였으리라.
하지만 실제 벌어진 일은 달랐다.
쨍―!
기이할 정도로 영롱한 소리가 울리며 가스팔을 감싼 결계가 깨어졌다.
내 손에 들린 붉게 빛나는 단검의 칼날이 너무나도 쉽게 가스팔의 결계를 박살 냈기 때문이다.
‘됐다!’
그렇다. 가스팔이 내 모든 호신용 무기와 마도구를 빼앗아 갔지만, 단 하나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그래도 한번은 도움되네, 빌어먹을 도마뱀!’
아르타누스가 내 왼손에 심어 둔 단검만은!
그리고 드래곤 제(制) 단검은 성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푹!
내가 휘두른 단검은 가스팔의 가슴을 정확히 찔렀다.
“?!”
그와 동시에 지하실 안에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쪽 벽면이 일그러지더니 거대한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거기에서 너무나도 익숙하고 그리운, 누구보다 만나고 싶었지만 절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 나타났다.
겨우 한 달여 못 봤을 뿐인데, 그동안 반쪽이 된 얼굴이 가슴을 긁었다.
나를 알아본 순간, 붉은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마치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파드!”
* * *
가스팔이 연 문을 넘은 뒤, 아르파드는 순간적으로 제 눈을 의심했다.
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도 예상외였기 때문이다.
가스팔과 힐리아가 함께 있는 모습은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힐리아가 가스팔을 찌르고 있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아르파드는 저도 모르게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고, 당황하게 하는 게 바로 그가 사랑하는 여자, 힐리아였으므로.
정말이지 어디서든, 언제든 그녀는 여전했다.
이 사실이 아르파드를 안도하게 했다.
힐리아는 그를 알아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악과 부정, 그럼에도 도저히 막지 못한 감정이 예쁜 보랏빛 눈 너머로 흘러넘친다.
힐리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를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아르파드!”
아르파드는 자신의 이름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타인과 구분 짓는 명패에 불과하다고 무미건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순간만은 달랐다.
그녀의 감정과 목소리가 입혀지고, 채색된 자신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찬양하는 찬송가였다.
새삼스레 아르파드는 깨달았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다.
직접 만나지 못한 시간이 지독하게 길었다.
얼굴과 자태를 눈에 담고, 목소리를 들으며, 그 체온을 느껴 본 게 너무나도 멀었다.
영혼과 의식이 연결된 적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더 기갈에 시달리게 된다. 그게 바로 아르파드의 상태였다.
달려가 힐리아를 품에 안는다.
그와 동시에 아르파드의 오감이 의미를 가졌다.
그녀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은 겨우 살아 숨 쉴 수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녀가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이나, 버리고 갔다는 원망도 아득하니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단 한 가지뿐.
그는 자신을 지배한 유일한 감정을 고스란히 말로 내뱉었다.
“…보고 싶었어.”
“…!”
“정말, 정말 너무…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