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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92화 (192/210)

192화

벨테인은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아르파드는 확신이 가득한 어조로 대꾸했다.

“내가 아는 레누스 벨테인이라는 놈은 주인을 지키지 못한 상황에서 남 탓을 먼저 하고 있을 놈이 아니거든.”

“그야 비 전하의 안위와 연관된 문제이니, 정황상 가장 의심스러운 자를 언급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한 상태였던 애니는 벨테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여정 내내 수상하게 달라붙는 검은 뱀을 직접 경험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의심과 불만을 지니고, 벨테인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델핀저에서 오래 일하며 벨테인과 잘 아는 관계이기도 했다. 좀 더 가까운 사람의 편을 들고자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네놈의 눈빛을 보니까 더 확신이 가는군.”

“누, 눈빛?”

황당하다는 듯한 물음에 아르파드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힐리아를 바라보거나 이야기할 때 놈이 늘 보이던 그 기분 나쁜 눈빛과 지금 네놈의 눈빛은 전혀 달라. …넌 그놈이 아니야.”

애니는 경악했다.

‘눈빛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한 거야?’

벨테인과 10년이 넘게 동고동락해 온 자신은 전혀 이상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보다는 그냥 평소에 늘 마음에 안 들어 하시던 벨테인 경을 괜히 트집 잡으시는 게 아닌……?’

거기까지 생각하던 애니는 곧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 식사를 벨테인 경이 직접 가져오시긴 했는데…….’

조금 전 벨테인은 검은 뱀이 여관 직원들을 매수해서 식사에 수작을 부렸으리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친분을 제외하고 보면 여관 직원을 의심하는 만큼 식사를 직접 가져온 벨테인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애니는 벨테인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힐리아를 모셨는지, 힐리아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잘 알았다.

섣불리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그때 아르파드가 과감하게 움직였다.

스걱―!

그대로 칼을 휘두른 것이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람의 목이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애니는 비명을 질렀다.

“꺄악!!”

비명은 중간에 당혹스러운 의문으로 바뀌었다.

“베, 벨테인 경?”

목이 잘렸음에도 벨테인의 몸은 멀쩡히 서 있었다.

게다가 단면에서 흐른 피의 양도, 색도 이상했다.

양은 지나치게 적었고, 검붉은 피 사이에 기묘하게 푸른색으로 빛나는 것이 섞여 있었다.

아르파드는 놀라지 않았다. 낮게 혀를 찰 뿐.

“역시 그때 죽은 게 아닌 모양이군. 이상하게 쉽다고 생각하긴 했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목을 베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와 유사한 감각.

“마탑주 놈이 만든 꼭두각시인가.”

* * *

힐리아와 가스팔을 둘러싼 풍경이 일그러지더니 바뀌었다.

햇살이 스며드는 성의 침실에서, 어두침침한 지하에 있는 마법사의 연구실로.

힐리아는 이곳이 가스팔이 임시로 만든 새 실험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전 생에서 온갖 끔찍한 짓을 다 당했던 마탑 내부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가스팔의 등 뒤에는 거대한 수조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기이하고 징그러운 형태의 부정형 형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붉은 마력과 흰색의 신성력이 형체 안에서 복잡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힐리아는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두 힘 모두 익숙했으니까.

‘드래곤의 마력과 신성력.’

서로 반발하는 두 힘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회전했다.

가스팔은 성큼성큼 걸어 힐리아에게 다가갔다.

“어때? 아름답지 않나? 물론 아직 한참 미완성 상태지만 말이야.”

“변태 자식!”

저 실험체의 모습은 꽤 익숙했다.

3회차 때 마탑에 갇혀 있는 동안 보았던 가스팔의 실험체들과 유사했으니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시기가 빠르다는 것.

이전 생에서 힐리아가 가스팔의 실험체 생활을 한 건 이 시기가 아닌 몇 년 더 흐른 시점의 일이다.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하고 난 뒤 죄인의 자격으로 실험체로 넘겨졌으니까.

가스팔에게 들었던 말도 있었다.

“실험체에 신성력을 적용하는 아이디어는 일 년 전에야 떠올렸지. 에반젤린의 도움으로 신전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건 겨우 반년 전이고. …거기에 너까지 손에 들어온 거야.”

“이제 내 필생의 연구가 완성될 수 있어.”

그때 가스팔이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실험체와 지금 수조 속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건 꽤 흡사했다.

새삼 그때의 고통과 공포가 치솟았다.

가스팔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힐리아의 아랫배를 향했다.

“드디어 진한 혈통을 가진 황족의 태아를 손에 넣었군. 이걸로 모든 준비가 갖춰졌어.”

“…!”

소름과 혐오감이 치솟았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긴 했다. 가스팔이 얼마나 용혈과 드래곤에 집착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고, 배 속 아이에 대해 언급했으니까.

하지만 대놓고 아이를 실험체로 쓰겠다는 말을 들은 충격이 덜해지는 건 아니다.

힐리아는 두 손으로 배를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등에 지하실의 차가운 벽이 닿았다.

저도 모르게 욕설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 줄 알아? 이 개×끼야!”

가스팔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밀려 올라갔다.

“네가 내 손에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끝난 거야.”

게다가 충격받고 걱정되는 문제는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벨테인 경은 대체 언제 바꿔치기한 거야?”

“확실히 많이 아끼는 기사인 모양이군. 그자가 배반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벨테인 경은 절대 나를 배반할 사람이 아니야.”

그는 신물의 힘에 조종당하면서도 결국 끝에 가서는 이겨 낸 사람이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절대 자의로 배신한 게 아닐 거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뿐.

가스팔은 사람과 거의 흡사한 인형을 만들어 조종했다.

아까 내가 정지시킨 인형은 만들기도 쉽고, 인간이 아닌 티가 잘 났다.

가스팔이 공을 많이 들인 것들은 인간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이번 여정 도중에 애니, 벨테인 경과 합류했을 때는 워낙에 경황이 없었다.

게다가 여행 도중에 멀미인 줄 알았던 입덧으로 컨디션이 최악으로 떨어졌으니, 더 이질감을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 벨테인 경은 가문 내 관리와 페니 테라스 문제로 델핀저에 주로 머물렀다.

내 시선이 자주 닿는 곳 밖에 있었으니 마수를 뻗기도 쉬웠을 거다.

가스팔의 대답은 내 예측이 맞다는 걸 알려 주었다.

“약 40일 전쯤이었지, 아마? 꽤 격렬하게 저항했었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무사하긴 해?”

가스팔은 짐짓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힐리아를 달래려는 듯 굴었다.

“걱정 마. 너에게 효과적인 인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죽이진… 않았다는 거지?”

“그래. 어디 있는지 알려 줄 생각은 없지만.”

힐리아의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짓궂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니야?”

“무슨 헛소리야?”

“그 아이도 옆방에서 뛰쳐나와 너를 구하려고 애썼는데, 조금도 걱정 안 하고 있잖아.”

힐리아의 눈이 커졌다.

가스팔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 건지 뒤늦게 눈치챈 것이다.

“크라우 테슬란?”

그자가 나를 구하려고 했다고?

가스팔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지하실 한쪽 벽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치워졌다.

거기엔 마치 곤충 표본처럼 벽에 사슬로 고정된 검은 뱀이 축 늘어져 있었다.

“!”

힐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갈수록 태산이었다.

자신은 가스팔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배 속 아기가 노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큰 힘인 <운명의 서>는 아르파드를 광기에서 구하느라 지금은 쓸 수 없는 상태.

이 와중에 충실한 기사는 인질로 잡혀 있고, 덤으로 검은 뱀까지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 있었다.

도망칠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떠오르는 건 한 명뿐이었다.

지금 절대 있으면 안 되고, 있을 리 없는 사람.

지키기 위해 버려두고 온 사람.

동시에 누구보다 가장 보고 싶은 얼굴.

‘아르파드…….’

다시금 심장이 저릿했다.

그때.

가스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제 목을 쓰다듬으며 환희에 찬 미소를 얼굴 가득 떠올린다.

“아하하!”

“…뭐야?”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힐리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가스팔이 고개를 숙여 힐리아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놀라운데. 네 남편도 너처럼 내 인형을 바로 눈치챈 모양이야.”

“…뭐?”

힐리아는 귀를 의심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무슨 헛소리야? 아르파드가 왜 나와? 지금 황도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황도가 아니야. 바로 근처에 있군. 베네타에 말이야. 네 남은 일행을 만나서 내 인형을 부쉈어.”

“뭐라고?!”

힐리아는 심장이 바닥을 나뒹구는 충격을 느꼈다.

아르파드가 베네타까지 쫓아오려면 최소 몇 주는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쫓아왔다고? 어떻게?

‘어째서’라는 의문은 떠올릴 수 없었다. 너무나도 명백했으니까.

그는 힐리아를 찾아온 것이다.

“지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책임지게 만들고 말 거야.”

아르파드는 자신이 말한 걸 그대로 실천했다.

걱정과 불안이 치솟는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의 안쪽에는…….

어리석고 이기적인 기쁨이 자리하고 있음을 힐리아는 부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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