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솔직히 지금 아르파드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이른 상태였다.
완전한 드래곤의 신체를 가지지 못한 상태로 그 힘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부작용이었다.
아직도 목구멍 안쪽에서는 쇳내가 치밀었다.
하지만 몸 상태를 돌보기 위해 쉰다거나 멈추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겨우 힐리아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몇 시간 차이로 놓친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가 그녀를 납치해 갔다.
‘검은 뱀, 그놈이……!’
안 그래도 아르파드는 검은 뱀이 힐리아에게 접근한 걸 알고 있었다.
사실은 힐리아가 먼저 접근한 거였지만, 아르파드가 보기엔 어쨌건 검은 뱀 탓이었다.
‘본인이 알아서 잘 피했어야 할 거 아닌가!’
당사자가 들으면 억울해할 생각이었다.
그때 애니가 무릎걸음으로 아르파드의 앞으로 기어 왔다.
그리고 바지 자락을 잡고 매달리며 빌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충실한 시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없이 주워섬기는 말에 따르면, 어제 저녁 식사 후 애니와 벨테인은 이상할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나고 보니 힐리아도, 검은 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음식에 뭔가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겠군.’
직접 경험한 벨테인이 말을 덧붙였다.
“검은 뱀 그자가 여관 직원들까지 매수한 게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여행으로 피로가 쌓였다고는 해도,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잠이 들었습니다.”
아르파드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너희는 죄가 없다? 특히나 유일하게 곁을 지키고 있던 수호 기사 주제에?”
그러자 벨테인 경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절대로 아닙니다. 지키지 못한 죄는 그분의 안전을 확인한 이후 주인께 청하겠습니다.”
너는 내 주인이 아니니, 처벌할 주체도 아니라는 의미가 아래 깔려 있었다.
아르파드의 눈썹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평소의 10배 정도 강한 불만과 분노 어린 눈빛으로 벨테인을 노려보았다.
애니는 다급하게 외쳤다.
“전하, 제발 아가씨를 구해 주세요! 우리 아가씨께서는… 지금, 지금 회임 중이십니다!”
“…!”
두 명은 아르파드가 이렇게까지 놀라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명백히 흔들리는 모습.
애니는 울부짖으며 아르파드에게 더 강하게 매달렸고, 그때 벨테인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제 검은 뱀 그자는 황손의 아비가 되겠다는 불순한 말까지 하였습니다!”
힐리아의 임신 사실을 처음 들은 순간, 아르파드는 순수하게 놀랐다면 이번엔 반응이 좀 달랐다.
안 그래도 짙고 날카로운 살기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형태를 이룰 듯 강해졌다.
전혀 단련하지 않은 애니는 피부가 따끔거리는 듯한 감각에 놀랐다.
그때 아르파드가 애니의 말에 대답을 내렸다.
“네 말은 틀렸다. 데임 로렌.”
“예? 하지만 분명히 아가씨께서는……!”
단어 하나하나에 맺힌 아르파드의 의지는 강렬했다.
“그 표현이 틀렸다는 거다. 네가 아무리 비가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라지만, 아가씨라니. 그녀는 ‘황태자비’다. 그 외에 다른 호칭으로 그녀를 부르는 건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 * *
“으음……?”
힐리아는 깨끗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었다.
분명히 기절하듯 잠들 때 본 여관의 천장은 목재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돌로 짜 맞춰진 성의 천장이다.
게다가 반투명한 레이스 캐노피가 우아하게 펼쳐져 있었다.
힐리아는 기겁해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여긴 어디야?”
얇은 잠옷만 입고 있던 터라 이불을 끌어 올려 몸을 가린 채, 힐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낯선 방의 광경.
델핀 공작저의 침실이나 황태자궁 상아의 침실과는 비교할 수 없었으나, 제법 잘 관리된 귀족의 성이 분명했다.
게다가 하녀들이 그녀가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씻으실 수 있게 준비할까요?”
“아니면 식사를 먼저 가져올까요?”
지나치게 태연한 표정의 하녀들이 보이는 태도가 이상했다.
마치 힐리아를 몇 년은 모셔 온 사람이라도 되는 듯했다.
“당신들 누구야? 여긴 어디고? 대체 누가 어떻게 날 여기로 데려온 거야?!”
비명 같은 외침에도 하녀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똑같이 물을 뿐.
“배고프지 않으신가요? 주인님께서 일어나시면 식사부터 챙겨드리라 하셨습니다.”
“세숫물을 가져올까요? 아니면 목욕 준비해 드릴까요?”
마치 정해진 대답 외에는 할 줄 모른다는 듯한 태도.
그러다가 힐리아의 눈에 한 가지가 눈에 띄었다.
하녀가 착용하고 있는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진 팔찌였다.
‘역시……!’
힐리아는 벌떡 일어나 하녀의 손목을 잡고, 팔찌를 빼냈다. 하녀는 전혀 저항하지 않았고, 팔찌를 빼앗기자 그대로 픽 쓰러졌다. 다른 한 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 가스팔의 인형들이었어!’
이전에 마탑에서 몇 번 본 적 있었다.
마력이나 공이 전혀 들지 않으며, 저항하지 않고 시킨 일만 반복하는 인형.
마력과 구동 명령을 공급하는 마도구만 떼어 내면 바로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감시자 둘을 단번에 처리했지만 힐리아는 기뻐할 수 없었다.
‘이게 여기 있다는 건 지금 내가 가스팔 놈에게 잡혀 있다는 소리잖아!’
그나마 좀 자고 났더니 몸 상태가 나아져서 다행이지만, 상황이 많이 안 좋았다.
그녀가 누워 있는 방 안에는 가스팔의 인형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니나 벨테인 경은 그림자도 없었다. 하다 못 해 검은 뱀조차도.
힐리아는 소리를 죽인 채 걸어서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이 열리는지, 탈출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힘을 주어 창문을 여는 데 성공한 순간이었다.
쾅!
창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절로 닫혔다. 등 뒤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이런 이런, 역시 절대 얌전히 안 있는군.”
싸늘한 오한이 등줄기를 핥는 것을 느끼며, 힐리아는 천천히 뒤돌았다.
그녀가 누워 있었던 침실의 문이 열려 있었다. 복도 쪽 통로로 통한 문이.
그곳으로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긴 로브가 온몸을 가리고 있었고, 드러난 팔에는 기묘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이 맥동 치고 있었다.
힐리아는 남자의 이름을 씹듯이 뱉었다.
“가스팔!”
가스팔은 빙긋 웃으며 힐리아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번들거리는 시선이 온몸을 훑는 것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힐리아는 무의식적으로 호신용 단검을 찾았다.
하지만 기절한 이후 여관으로 옮겨졌을 때 애니가 옷을 갈아 입혀 단검 같은 걸 숨길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되어 온 걸 보면, 단검을 숨기고 있었어도 빼앗겼겠지.
다만 왼손 약지에 끼워진 스타틸리아의 별은 그대로였다.
‘제발!’
그녀는 다섯 여신에게 빌면서 신물의 힘을 발동시키려 했다.
<운명의 서>를. 안 된다면 다른 보석들이라도.
하지만.
“윽!”
스타틸리아의 별도, <운명의 서>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무리해서 힘을 끌어오려 한 반동인지 배가 욱신거렸다.
안 그래도 과도하게 무리한 직후였다. 더 했다간 아이가 위험할지도 몰랐다.
결국 신물의 힘을 빌려 오는 건 포기한 힐리아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젠장!”
가스팔의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곧 엄마가 될 텐데 그렇게 험한 말을 해서야 쓰나.”
힐리아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물론 가스팔의 주제넘은 참견에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 자식이면 나와 함께 널 욕할걸. 아니, 한술 더 뜰지도 모르겠네.”
애 아빠를 생각하면 말이다.
힐리아는 무섭게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떻게 안 거지?”
“뭘?”
“내 임신 사실. 어제까지는 나도 몰랐던 걸 말이야.”
이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임신 사실을 아는 건 의사를 제외하면 내 주변 사람들뿐이야.’
애니와 벨테인 경, 그리고 검은 뱀.
그 외에는 아이의 아빠조차 모르고 있을 터다.
그런데 가스팔이 알고 있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힐리아는 얼음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어떻게 알았냐고 조금 전에 묻지 않았나? 이미 확신하면서 왜 확인하려고 하지?”
외부인인 의사를 의심할 수도 있을 거다.
그가 아니라면 역시 검은 뱀이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그녀는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벨테인 경이 여관의 요리사에게서 직접 받아 온 식사를 몇 술 뜬 이후, 잘라 낸 것처럼 기억이 끊겼다.
힐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 * *
살이 에일 듯한 살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아르파드는 칼을 뽑아 들었다.
뒤이어 칼날을 벨테인 경의 목에 들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