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그대가 약속을 어겼어.”
“내가 뭘……?”
내가 그와 무슨 약속을 했었지? 뭘 지키지 않았었나?
헤아려 봐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거짓말하고 도망치긴 했지만, 그건 약속을 어긴 것과는 다르니까.
나는 조금 뻔뻔한 생각을 했다.
아르파드는 열정적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미치지 않게 해 준다며?”
그제야 아르파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했다.
약탈혼을 의뢰할 때 그에게 했던 약속.
“저는 그 대가로 전하가 미치지 않은 채 무사히 황위에 오르게 해 드릴 수 있어요.”
나는 지금 상황마저 잊고, 황당함과 분노가 욱하고 치미는 걸 느꼈다. 다급하게 반론한 건 그 때문이었다.
“해 줬잖아요? 광증은 다 해결됐고, 조금 전에도 내가 당신을 미치지 않게 구해 줬는데, 그건 어디다 잊어버리고……!”
아르파드는 내가 도망치려는 걸 막으려는 듯 더 꽉 끌어안았다.
“아니, 난 이미 미쳐 버렸거든.”
아르파드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황가의 광증이나 조금 전 잡아먹힐 뻔한 광기와는 별개로, 사실 이미 꽤 전부터 완전히 미쳐 있었어.”
분명히 지금 나는 아르파드의 무의식 속에 있었다. 우리에겐 육체가 없었다.
그럼에도 체온과 촉감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누구 때문일 것 같아?”
느릿하게 고개를 든 아르파드의 붉은색 눈동자를 다시 마주하자 긴장감이 가득 차올랐다.
아르파드는 사실상 대답을 정해 놓고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다시 미쳐서라도 나를 잡고 싶어 하는 그의 절절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책임져야지. 평생.”
나는 이어질 말이 조금 두려웠다. 본인의 말대로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돌아 버린 것 같았으니까.
“당신이 책임지지 않겠다면… 무책임하게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면…….”
그의 낮은 목소리가 끈적하게 뇌리를 적셨다.
“지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책임지게 만들고 말 거야.”
그의 입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광기 어린 집착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르파드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반드시.”
“…….”
말문이 막혔다. 그의 진심에 조금 압도되었다고 설명해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망설일 찰나.
“…?”
정체 모를 힘이 내 의식을 아르파드로부터 떼어 내어 강하게 잡아당기는 걸 느꼈다.
“아!”
마주 닿아 있던 손이 서로 떨어졌다.
광기의 여파와 혼란이 짙게 남은 아르파드의 붉은 눈이 홉뜨는 게 보였다.
그리고 마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듯한 낙하감이 내 의식을 집어삼켰다.
“!”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
소음이 뾰족한 못 더미처럼 내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뭐지? 분명 조금 전까지 나는 아르파드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주변의 소음이나 눈꺼풀 사이로 새어드는 빛을 고통이 아니라고 인지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나를 안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계속해서 어깨를 흔들며 부르고 있는 건 벨테인 경.
“나,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내 앞에서 울먹거리는 건 애니.
그리고 두 사람 뒤에 서 있는 건…….
‘저 인간이 왜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검은 뱀이었다.
그는 내가 눈을 뜬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의외로 침착하고 정상적인 제안을 했다.
“일단 안정적으로 쉴 수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나도, 애니도, 벨테인 경도 검은 뱀에게는 반감이 있었다.
하지만 내 몸 상태도 그렇고, 빛을 뿜어내다가 픽 쓰러지는 바람에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결국 우리는 검은 뱀이 사전에 구해 둔 깨끗하고 편안한 여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벨테인 경의 등에 업혀 가면서 내 걱정은 하나뿐이었다.
‘아르파드, 괜찮은 건가?’
아까 그 체험은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르파드의 영혼을 직접 느꼈으니까.
아마도 <운명의 서>의 힘을 통해 아르파드의 무의식에 직접 연결되었던 것 같았다.
내 영혼이 아르파드에게로 잠시 다녀오는 동안 기절했던 거고.
온몸에 힘이 없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무의식에서 만났던 아르파드의 태도와 말투가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부러 미쳐 버리려고 한 거라고.”
“지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책임지게 만들고 말 거야.”
“반드시.”
평생 광증을 피해 살아온 주제에 미쳐 버릴지도 모르는 짓을 하려 하다니.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르파드의 절실함이 새삼 가슴을 아리게 했다.
동시에 울화가 치솟았다.
‘내가 누구를 지키려고 이런 건데! 자신을 위험으로 내던져? 누구 허락받고, 감히!’
옆에 있다면 등짝이라도 몇 대 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곧 허탈한 웃음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버리고 도망쳤으면서 무슨 주제넘은 생각인지.
연이어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설마, 진짜 쫓아오려는… 아니, 쫓아오겠지. 진짜로.’
아르파드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야 했다.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사이 나는 여관 침대에 곱게 눕혀 있었다.
확신이 들자마자 번쩍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안 돼요, 아가씨!”
애니의 비명과 함께 나는 그대로 다시 시트 위에 엎어졌다.
어지럼증과 구역질이 너무 심해서였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겨우 정신을 수습하자, 나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지난 며칠간 나를 괴롭힌 몸 상태에 관해.
검은 뱀이 데려왔다는 의사는 내 몸을 진찰하고 폭탄선언을 했다.
“레이디께서는 지금 회임 중이십니다.”
“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 * *
“전하!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정말 미치신 겁니까?”
율켄은 당황하여 주인을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최근 이상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던 아르파드는 측근인 율켄에게도 날카롭게 반응했다.
“새삼스레. 내가 미친놈인 걸 이제 알았다는 듯이 구는군.”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요즘은 좀 달라지신 줄… 우왁!”
말고삐를 잡고 매달리는 율켄을 아르파드는 냉혹하게 걷어찼다.
그리고 박차를 가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였다. 뒤로 나동그라진 율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도 성질이 좀 죽긴 하셨습니다. 칼부터 휘두르시지 않는 걸 보면…….”
그는 앓는 소리를 하며 비슬비슬 일어났다.
“아아, 정말이지. 우리 비 전하 오신 뒤로는 이런 일은 이제 없을 줄 알았는……?”
율켄은 자신의 생각에 이질감을 느꼈다.
비 전하.
힐리아.
황태자궁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힐리아의 존재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생활했다.
결혼 전과 후의 아르파드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라, 아랫사람 입장에서 힐리아는 구원자 그 자체였으니까.
게다가 율켄은 힐리아의 능력을 거의 숭배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데 이상하게 한동안 힐리아에 대해 잊고 있었던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왜 비 전하께서 한 달 정도 황태자궁에 안 계셨던 거지?’
이에 대해 그를 비롯한 궁인들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 * *
은신처에서 시궁쥐처럼 숨어 있던 가스팔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들은 정보가 그 정도로 충격적이고 기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구를 완성하기 위한 재료로 간절히 원했던 실험체가 바로 황족의 태아였다.
태아는 어떤 형태로든 자라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특히나 그 아이가 드래곤의 혈통을 짙게 물려받았다면, 가스팔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만치 딱 맞는 실험체였다.
이자벨을 도와준 그 대가가 아이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황제는 이자벨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고,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대가로 내놓으라 할 수는 없었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는 아이다.
그것도 제국의 초대 황제 이래 가장 진한 용혈을 타고났다는 아르파드의 유일한 핏줄.
가스팔의 입가에 탐욕 어린 미소가 걸렸다.
사실 가스팔은 이미 힐리아의 신병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수족을 붙여 두고, 적절한 순간을 노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반드시 힐리아를 손에 넣어야 할 이유가 생겨 버렸다.
가스팔이 힐리아를 노리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르파드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인질이었으니까.
‘게다가 최근에는 강력한 신성력을 보여서 그쪽으로도 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아니군.’
지금 힐리아는 가스팔이 원하는 모든 걸 모아 놓은, 그야말로 보물 상자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