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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86화 (186/210)

186화

힐리아의 상태가 급변하자, 옆을 지키고 있던 애니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역시 지금 상태로 배를 타시는 건 무리예요.”

옆에서 벨테인 경 역시 동조했다.

“맞습니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힐리아가 궁을 나서기 전 명령해 둔 대로, 조용히 사직하거나 물러난 다음 약속한 장소로 와서 합류한 상태였다.

두 사람 역시 <운명의 서>의 고쳐 쓰기 영향으로, 힐리아가 아르파드와 이혼하고 궁을 나왔다고만 인식 중이었다.

이곳 동쪽 끝 항구 도시인 베네타에서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는 게 힐리아의 최종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힐리아의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것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버텨서 부두까지 왔지만, 바다 냄새를 맡고 상태가 악화되었다.

힐리아 혼자만 예정대로 배를 타자고 우기고 있었고, 주변인들은 전부 반대 중이었다.

그때 검은 뱀이 사람을 두엇 끌고 나타났다.

벨테인 경은 경계하며 힐리아와 애니 앞을 막아섰다.

검은 뱀은 이죽거렸다.

“여전히 나를 죽일 놈처럼 경계하는군. 이젠 슬슬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레이디께서 동행을 허락하신 적 없는데 멋대로 쫓아온 자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소.”

이건 약속 장소에서 힐리아와 벨테인 경이 합류한 순간부터 이어져 온 갈등이었다.

검은 뱀이 수상쩍기 짝이 없게 힐리아의 등 뒤를 졸졸 쫓아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검은 뱀이 내놓은 회심의 말에 벨테인 경도 반박하기 어려웠다.

“이 도시에서 제일 저명한 의사를 데려왔다. 몸이 불편한 레이디에게 무엇이 제일 필요한지는 분명하지 않나?”

“……!”

애니와 벨테인 경 역시 의사를 수배하려 애썼다.

하지만 주인인 힐리아가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다급하게 고집을 부려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은 이제 막 베네타에 들어온 참이었다.

의사를 찾을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하루 정도 검은 뱀이 안 보인다 했더니, 미리 베네타로 와서 의사를 수배해 데려온 모양이다.

결국 벨테인 경은 옆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검은 뱀은 재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깐깐한 기사를 내려 보았다.

검은 뱀의 돈과 협박으로 끌려온 의사가 힐리아의 몸을 살피려던 차였다.

힐리아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더니 벌떡 일어났다.

측근들은 다들 한 소리로 힐리아를 걱정했다.

“안 됩니다!”

“그러다 쓰러지세요!”

힐리아는 애니의 만류를 뿌리쳤다.

그 순간, 왼손 약지의 반지에서 마치 위험 신호와 같은 빛이 퍼져 나갔다.

이건 지난 한 달 가까이 힐리아가 매일 <운명의 서>를 새로 써야 할 때마다 보였던 위태로운 빛과 달랐다.

그보다 더욱 강하고, 위험한 경고의 빛.

현재 힐리아는 스타틸리아의 별을 중심으로 다른 네 신물의 힘을 모두 합치고, <운명의 서> 역시 연결해 놓은 상태였다.

즉, 지금 반지가 내뿜는 위험 신호는 <운명의 서>가 보내는 것이다.

힐리아는 본능처럼 느꼈다.

아르파드에게 어떠한 이상이 생긴 것을.

순간 아르파드 외에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늘어지게 만든 어지럼증이나 구역질도 까맣게 잊었다.

지상에서 가장 강대한 신성력이 백열하며, 힐리아의 손 위에 빛으로 빚어진 책이 나타났다.

파라라락―!

바람 한 점 없음에도 빛나는 페이지가 바삐 넘어가, 그 주인이 원하는 곳을 비췄다.

바로 힐리아가 바꿔 쓴 두 개의 문장이 위치한 페이지를.

그녀가 매일 새로 쓰던 그 문장은 마치 용암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쩡―!

힐리아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새로 써넣은 문장이 깨졌다. 문장을 이루던 단어들이 빛의 파편으로 화해 그대로 흩어졌다.

“!”

그리고 새로운 문장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힐리아나 다른 누군가의 의지로 써넣어진 문장이 아니었다.

먼 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재 상황을 옮겨 놓았을 뿐.

「아르파드는 회귀 이전의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소중하고 행복했던 순간에 더해, 끔찍하고 지독했던 기억들까지. 전자보다 후자의 양이 압도적이었다…….」

왜 자신이 써넣은 문장이 깨졌는지 알 수 있었다.

‘아르파드가 기억을 되찾으면서 내가 <운명의 서>에 써넣은 문장을 지워 버린 거야!’

전조는 이미 있었다. 지난 한 달 내내 아르파드는 계속해서 <운명의 서>에 저항하고 있었으니까.

‘아르파드가 기억을 되찾을지도 모른다는 건 예상했어.’

그래서 힐리아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멀리 도망칠 예정이었다.

무리해서라도, 그를 지키기 위해.

그런데 이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회귀 전의 기억을 어째서?’

아르타누스가 막고 있는 것 아니었나?

<운명의 서> 위를 새로운 문장이 빠르게 내달렸다.

「…헤아릴 수 없는 기억의 압력 속에서, 광기가 아르파드를 잠식했다. 이는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광증과는 다른 것이었으나, 그를 미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힐리아는 경악해서 손을 뻗었다.

“아르파드!”

<운명의 서>를 중심으로 무수한 빛의 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 *

무의식 안.

아르파드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끝없는 기억의 세례에 미소 지었다.

그 안에는 힐리아와의 행복하고 소중했던 때의 기억도 분명히 존재했다.

별처럼 빛나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들.

그것은 너무나도 작고 찰나에 불과했다.

아르파드의 위로 쏟아진 진흙 같은 기억의 절대다수는 고통과 광기에 얼룩져 있었다.

그는 수도 없이 죽었다. 많은 수가 부친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광증이 그를 잠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수없이 반복된 죽음의 기억은 분명 지독했지만, 아르파드의 정신을 갉아먹은 건 다른 것이었다.

의미 없고, 끊임없이 이어질 뿐인 반복.

“대체 언제쯤 끝나는 거지? 끝이라는 게 정말로 있긴 한 건가?”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된 끝에… 결국 또 반복되겠지.”

그 끝에서 아르파드는 광증과는 상관없이 미쳐 버렸다.

의미 없이 이어지는 회귀가 그의 영혼을 넝마로 만들었다.

“끔찍하게 지루하군.”

회귀 직후 스스로 목을 베어 죽은 것은 수백 번쯤 될 것이다.

그래 봤자 별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는 눈에 띄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 죽이기만 한 것도 아마 세 자릿수가 넘어갈 거다.

말 그대로 미쳐서 날뛰었다.

아르타누스가 그의 기억을 모두 봉인한 이유도 알 만했다.

그때 그 상태가 지금의 아르파드에게 도움이 될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드래곤의 생각 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쏟아지는 광기의 세례를 받아들였다.

기꺼이.

이 확신이 가슴 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위기에 처하면 그녀는 절대 나를 버려둘 수 없어.’

도박이었다.

하지만 더없이 달콤하고 기꺼운 시험이기도 했다.

아르파드는 승리를 확신하며 스스로를 광기의 한가운데로 내던져 불태웠다.

그 순간.

“안 돼―!”

흘러넘치는 어둠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비쳐 들었다.

무저갱에 스며드는 햇살처럼.

눈을 태워 버릴 정도로 백열하는 빛의 중심에 사랑스러운 분홍빛이 나타났다.

눈물과 걱정, 분노로 가득 찬 보랏빛 눈동자가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흰 손끝이 늪 같은 광기의 기억 속에 빠진 아르파드를 끄집어내어 당겼다.

언제나 아르파드를 파멸로부터 건져 올리는 건 그녀뿐이었다.

비명 같은 책망이 영혼을 울린다.

“대체 이딴 바보짓을 왜 한 거야?!”

아르파드는 말없이 눈매를 접으며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태양을 마주하는 사람처럼.

힐리아는 계속해서 화를 냈다.

“방금 어떻게 될 뻔한 건지 알아? 그냥 놔뒀으면 진짜 미쳐 버렸을 거야! 그건 광증도 아니라서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도 없었을 텐데!”

말하면서 점점 분노가 구체화 되는 듯했다.

“게다가 이제 더는 회귀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단 말이야! 그런데 당신이 미쳐 버리면……!”

“그래서 그런 거야.”

“…뭐?”

“일부러 미쳐 버리려고 한 거라고.”

아르파드는 해사하게 웃으며 경악으로 굳어 버린 힐리아를 향해 속삭였다.

“그대가 약속을 어겼으니까.”

“…!”

말투가 바뀌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근래에는 거의 듣지 못한 말이었다.

힐리아가 카타콤으로 찾아가 약탈혼을 의뢰하던 그즈음 아르파드의 말투와 닮아 있었다.

마치 아르파드의 의식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아르파드가 강조했다.

“그대가 약속을 어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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