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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85화 (185/210)

185화

“저를 약탈해 주세요.”

그래, 분명히 저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귀를 의심하고, 눈앞에 선 여자가 미쳤나 생각하면서도… 단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던 순간이.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난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뇌리에서 되살아난 기억이 한 방울 톡, 하고 머리를 때린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새로이 태어나는 듯한 충격이다.

그녀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뚜렷해졌다.

“힐리아.”

혀와 입술로 소리를 빚어내 공기 중으로 내놓는다.

그러자 무채색이던 세상이 온통 봄으로 물들었다.

메마른 가지에서 분홍빛 수줍은 꽃잎이 무수히 피어나 마치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람의 이름을 이루는 글자와 단어 하나하나가 이토록 아름답고 경이로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니, 이름만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그랬다.

아르파드는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던 지난 며칠간, 자신이 물 밖에 내던져진 물고기 꼴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토록 고통스럽고, 안타깝고, 슬펐으며…….

무엇보다 공허했는지.

심장을 뽑힌 채 걸어 다니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봄의 색으로 물든 찬란한 기억이 그의 정수리 위로 들이부어졌다. 아르파드를 다시 한번 태어나게 만드는 세례(洗禮)였다.

“미쳤어요?!”

“왜 화 안 내요?”

“누가 알아준다고 이러고 있는 건데?!”

“내가 당신을 좋아하나 봐.”

힐리아의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는 겨우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게 당연했다.

아르파드는 필사적으로 한 줌 되찾은 힐리아의 기억에 매달렸다.

빼앗겼다가 되찾은 소중한 보물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갈에 찬 짐승처럼 힐리아에 대한 기억을 긁어냈다.

하나하나, 빼앗겼던 보석의 파편을 주워 모아 소중히 닦았다.

허겁지겁 기억을 그러모으던 중, 아르파드는 이질감을 눈치챘다.

“!”

그는 어느새 의식의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와 있었다.

불가사의한 힘으로 빼앗겼던 힐리아에 대한 기억을 되찾기 위해 당연한 과정이었다.

힐리아에 대한 기억을 되찾은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무의식의 가장 깊은 어둠 안에 거대한 문이 존재한다는 걸.

아르파드는 손을 뻗어 문을 건드려 보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 고동을 닮은 진동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아르파드는 알 수 있었다. 이 문 안에는 ‘기억’들이 고여 있었다.

전부 그의 것이지만, 지금은 갖지 못한 기억들.

어마어마한 양의 기억들이 저 문 뒤에 갇혀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기억을 가두고 봉인해 둔 것 같았다.

봉인된 기억 중에는 당연히 힐리아와의 기억도 있을 터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르파드는 갈급하게 손을 뻗어 문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잡아 뜯어내려 하는데…….

어떤 거대한 울림이 아르파드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멈춰라.

긴 백금발에 파충류를 닮은 긴 세로 동공의 붉은 눈동자.

아르파드가 보기에도 자신과 많이 닮은 남자였다.

처음 보는 얼굴과 목소리. 그럼에도 낯설지가 않았다.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아르타누아 평원의 폭발 직후, 힐리아는 아르타누스를 만났다고 했으니까.

아르파드는 대뜸 물었다. 조상이자 가문의 수호자에 대한 존경이나 경외감은 어디 가져다 버린 태도였다.

“네놈이 그 빌어먹을 도마뱀이냐?”

-…여전하군.

아르파드로서는 영문 모를 소리였으나, 명확한 게 하나 있었다.

지금 아르타누스는 그의 기억 앞을 막아선 채였다. 명백히 기억을 되찾는 걸 방해하고 있는 거다.

“내 기억에 손을 댄 게 네놈이냐?”

-이번 생의 네 신부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것이라면, 틀렸다. 하지만 그 이전의 것이라면 틀렸다고 볼 수는 없겠군.

“이전의 기억이라고?”

기묘한 표현이지만 아르파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힐리아가 이미 말해 준 적 있었으니까.

“회귀 전의 기억 말인가?”

-그래.

회귀로 인해 쌓였을, 지난 3번의 삶.

힐리아를 만나지 못하고 무수히 반복하던 자신의 생.

거기에 무한한 회귀 끝에 마침내 ‘힐리아’를 처음 만났던 그 기억까지도.

이는 아르파드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렇다면 더 되찾아야겠다. 당장 그 앞에서 꺼져.”

-한 번 더 충고하건대, 여기서 그만두는 것이 나을 게다.

“웃기지 마. 내 기억이야. 왜 너 따위가 방해하니, 충고하니 하는 거지?”

-내 뒤를 이어 세계를 지탱해야 하는 용이 미쳐 버리는 건 원치 않으니까.

자신을 후계자라 말하는 것에 대해서 아르파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거슬리는 건 다른 부분이다.

아르타누스는 자신이 봉인된 기억을 되찾으면 미쳐 버릴 거라 단언하고 있었다.

“왜? 내가 전에 미쳐 버린 적이 있기라도 한 거냐?”

-틀리지 않다.

자신이 미친 적 있다는 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어차피 힐리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반쯤 미친 듯 살아왔으니까.’

게다가 이미 자신이 수없이 많은 회귀를 거쳐 왔다는 사실도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아르타누스가 주제넘게 막아서고 있으나, 저 안에 봉인된 건 자신의 기억이다.

주인이 제 것을 되찾겠다는데 왜 도마뱀 따위에게 방해받아야 한단 말인가?

저 안에는 힐리아와의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요약해서 설명해 준 기억.

힐리아가 말해 준 것을 들으면서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그녀가 말하는 것으로 그때의 경험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직접 이 손에 쥐고 싶었다.

아르파드는 <운명의 서>의 힘으로 인해 힐리아의 관한 기억을 한번 빼앗겼다가 겨우 되찾은 직후였다.

지금의 아르파드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힐리아를 욕망하고 또 욕망했다.

당연히 저 문 안에 봉인된 힐리아와의 추억이 미치도록 탐이 났다.

하지만 그게 가장 중요하지는 않았다.

‘가장 간절하고 중요한 건 그녀지.’

힐리아를 보고, 끌어안고 싶었다.

영원히.

아르파드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가 어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되찾아야겠어.”

-이해할 수 없군. 너는 평생 광기에 휩쓸리는 걸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며 살지 않았나?

맞는 말이었다. 저 빌어먹을 도마뱀이 물려준 피 덕분에 아르파드는 평생을 외줄 타기를 하는 듯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건드리면 미쳐 버릴 거라 드래곤이 보증하는 걸 바득바득 열려고 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르파드는 전혀 두렵지 않았고,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힐리아가 왜 내 곁을 떠났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어.”

-그건…….

“말하지 마. 말하면 죽여 버린다. 네놈 입으로 들을 일이 아니니까.”

왜 자신을 떠났는지 대답해 줄 수 있고, 말해야만 하는 이는 힐리아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해. 내 광증이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내 곁을 떠날 수 있었다는 거. 굳이 진홍월에 맞춰 확인까지 한 뒤에 떠난 걸 보면 더 분명하지.”

카타콤으로 찾아와 약탈혼을 의뢰하며 힐리아가 했던 말 중 하나가 떠올랐다.

“그럼 당신은 곧 미치겠군요. 아니, 반드시 미쳐야 할 거예요.”

그때 자신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던가.

‘마치, 예언 같다고 생각했었지.’

그 예감은 맞아떨어진 셈이다.

아르파드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미쳐 버리면 힐리아는 절대로 나를 떠날 수 없겠지.”

-…!

이 광기 어린 확신에 드래곤마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 보인 순간이었다.

아르파드는 손을 뻗어 자신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의 문을 열어젖혔다.

댐의 수문을 갑자기 열면 쏟아지는 급류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기억들이 아르파드의 뇌리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자아 따위는 흔적도 없이 짓눌려 버릴 압도적인 압력.

아르파드는 평범한 자아를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조차 영혼이 광기에 휩쓸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 * *

대륙의 동쪽 끝, 항구 도시 베네타의 한 부두에 주저앉아 헐떡이고 있던 힐리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창백한 얼굴이 완전히 흙빛으로 변했다.

‘아르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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