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검은 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귀로 들리지 않았으나, 눈으로 읽어 낼 수 있었다.
‘황태자비 전하.’
…라고.
잠시 흠칫했지만, 나는 곧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공작에게 <운명의 서>의 힘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닐 터다.
그 힘으로 바꾼 현실에서도 내가 황태자비였던 건 없던 일이 되지 않았다.
‘아예 결혼한 적 없는 것으로 바꾸는 건 더 많은 대가를 필요로 할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내키지 않았다.
…아니, 회피하지 말자.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는 게 싫었다.
결국 내 이기적인 미련이 맞았다.
지키기 위해 인연을 끊었지만, 그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은 나 혼자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이런 상념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검은 뱀이 눈앞에 있었고, 목적을 알 수가 없었으니.
정신을 차리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옛 호칭을 불러 저에게 뭘 얻어 내시려는 건지 모르겠군요.”
시치미를 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 나는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다.
눈에 띄는 머리는 평범한 검은색으로 염색했고, 신분 역시 따로 만들었다.
호위하는 용병들은 나를 평범한 자작 부인으로만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이 <운명의 서>에서 아르파드의 저항을 확인하고 있어 철저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다시 아르파드의 기억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아르파드의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는 걸까. 바라지 않는 걸까.’
어쩌면…….
나는 고개를 저어 불필요한 상념을 떨치려 했다.
내 행동이 검은 뱀에게는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그자의 표정이 미묘해진 채 한 걸음 내게로 다가왔다.
고용한 용병들은 충실히 내 앞을 지켰다.
“다가오지 마시오!”
제랄드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은 자들을 구하느라 고생했는데, 생각 외로 괜찮은 것 같았다.
검은 뱀은 용병들을 억지로 밀고 다가오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경계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은혜를 갚으러 온 것뿐이오.”
은혜라.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가스팔이 마법을 통해 검은 뱀을 조종하려 했을 때.
그를 마탑주의 마수에서 구해 낸 건 나였으니까.
레므네미아의 바늘까지 갖춰서 완전해진 <운명의 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힘을 가진 신물이다.
그것이 뿜어내는 신성력은 검은 뱀의 체내에 남아 있는 가스팔의 마법과 주박을 남김없이 태워 버렸다.
물론 대가가 없었던 건 아니다.
‘주시자의 눈은 이제 거의 못 쓰게 되어 버렸지.’
대신 되찾은 건 본인의 인생이었다.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는 있었다.
본인이 말한 그대로.
“레므네미아의 바늘은… 조금 전의 그 엄청난 신성력을 사용하는 데에 필요한 거였나?”
“대단하군. 레므네미아의 바늘로도 봉인하는 게 전부였는데.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건 몇 개라도 가져다 바칠 수 있지.”
검은 뱀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제 몸을 꼼꼼히 바라보았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놈의 끔찍한 기척이 내 안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것참 다행이네.”
그때 나는 실의에 빠져 있느라, 검은 뱀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운명의 서>를 완성해도 아르타누스의 용언을 깨트릴 수 없다는 데 좌절 중이었으니까.’
그러니 검은 뱀이 감격에 겨워하는 반응이나, 진지하게 말하는 약속 따윈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내가 평생을 피하고 싶어 하던 걸 막아 준 건 사실이다.”
“아, 진짜?”
“빚은 확실하게 갚겠다. 검은 뱀과 테슬란 공작으로서의 이름 모두를 걸고 맹세하지.”
“…그러던가.”
어차피 내가 검은 뱀에게 원한 건 <운명의 서>를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마지막 신물뿐이었다.
황태자비로서, 더 나아가 황후로서 계속 자리를 지켰다면 테슬란 공작에게 요구할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알 바 아니라고.’
검은 뱀은 회심의 미소를 얼굴 가득 띤 채,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꽤 곤경에 처한 듯한데, 나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소?”
보통 황태자비였던 여자가 이혼 후 황도를 떠나고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다.
실제로는 전혀 아니라는 게 문제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 일이 하나 있긴 해.”
그러자 비로소 검은 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뭐든지 말하시오. 내 이미 약조한 대로 이 은혜에 대해서는…….”
뭔가 무게를 잔뜩 잡고 떠들어대는 말허리를 뚝 자르고 단언했다.
“길 막지 마.”
“…뭐?”
“혹시 귀도 안 좋은 거야?”
검은 뱀은 하나뿐인 눈으로 나를 멍청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기분이 매우 안 좋았다.
그야 당연했다.
‘도마뱀 놈 때문에 내 남자 놔두고 가게 생겼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그 와중에 갑자기 시커먼 놈이 나타나 헛소리를 떠들어 대는데 기분 좋을 리 없다.
검은 뱀은 당황해서 다시 물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당신이 해 준 일의 대가로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잖아!”
“네가 지금 거기서 비키는 게 내가 원하는 거야.”
“미치기라도 한 건가?! 지금 본인이 무슨 기회를 마다하는 건지 알긴 해?!”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마차 안으로 돌아가서 마부와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그냥 밀고 가 버려.”
“자, 잠깐만!”
* * *
아르파드는 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단순히 빛과 어둠에 대한 호오의 문제는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더없이 지루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파드는 태어난 이후 자아를 인지한 뒤 잠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감각을 거의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기억조차 못 하는 어린 시절에는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겨우 열 살도 안 된 그를 두고 어머니가 쓴웃음과 함께 하셨던 말을 떠올리면 그때도 비슷했을 것이다.
“갓난아기 때도 너는 너무 예민했지. 자그마한 소리에도 깨서는…….”
“시끄럽게 울어 젖혔나요?”
“아니. 그래서 더 안쓰러웠어.”
“어머니나 유모를 괴롭히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안쓰러울 일은 없지 않나요?”
희고 섬세한 손가락이 어린 아르파드의 뺨을 쓸어내렸다.
눈빛이나 행동과 달리 아직 젖살이 남아 말랑말랑한 아들의 뺨을 꾹 누르며 록셀린은 희게 웃었다.
“울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고,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앞만을 보고 있더구나. 내겐 그게 더 안쓰러워 보였어.”
여전히 어머니가 뭘 안쓰러워 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너무 당연해서 벗어나거나 나아질 기대도 안 하는 것으로 보였거든. 강보에 싸인 갓난쟁이가 말이야.”
이 대화는 부황조차 알지 못하는 아르파드 혼자만의 추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대화의 끝에 존재할 리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피어올랐다.
“정말? 안 믿어질 정도인데? 당신 요즘 내 옆에서 건드려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다고.”
그러했던가?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다시 그 목소리는 멀어진다.
누군가의 곁에서 정신을 놓을 정도로 깊이 잠들었던 기억 따윈 없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감각이 남아 있었다.
안심되는 체온, 가벼운 숨결, 귓가에서 재재거리던 웃음소리.
그 모든 게 아르파드가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감각들을 선사해 주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르파드는 지독하게 헤매었다.
잃어버린 조각이 너무 커서, 그게 빠져나간 빈 공허가 아르파드의 대부분을 잠식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다만 정확히 무엇을 빼앗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아르파드를 더 미치게 했다.
헤매던 그가 도착한 곳은 황도 가장 구석지고 깊은 어둠 속이었다.
카타콤 내부의 은신처.
그곳을 지키던 묘지기가 아르파드―정확히는 용병왕 제랄드―를 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난 진홍월 때는 발걸음 하지 않아, 이제 올 일 없으시리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랬다. 얼마 전에 있었던 진홍월에 아르파드는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
자신이 지긋지긋한 광증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르파드는 정해진 대로 망자의 입에 넣어 주는 은화를 묘지기에게 던져 주었다.
카타콤 가장 깊은 곳, 그가 가장 위험한 시기 자신을 가두기 위한 감옥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 들어선 순간, 아르파드는 환영을 보았다.
“!”
벚꽃잎을 닮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달빛 아래 흐드러져 있었다.
짙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촉촉해 보이는 입술이 열려 도발적인 말을 던졌다.
“저를 약탈해 주세요.”
그 한마디가, 아르파드의 뇌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