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운명의 서>에 다시 써넣은 문장은 조금 전보다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벌써 글자 자체에 붉은 기운이 희미하게 돌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이대로 더 강해지면 새로 바꿔 쓴 문장들이 사라져 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면 내가 아르파드와 자연스럽게 이혼했다고 현실을 바꿔 버린 것도…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내가 어떤 저항이나 충돌 없이 황궁을 나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운명의 서> 덕분이다.
조금 억울할 정도였다.
에반젤린은 제대로 된 주인조차 아니었고, <운명의 서>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를 지우고 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뻔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진짜 주인인 데다 <운명의 서> 역시 다섯 신물을 모두 찾아내 완전해진 상태다.
당연히 에반젤린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워야 정상이다.
내가 바꿔 쓴 현실은 누구를 죽이거나 지우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아르파드와 이혼하고 떠났다는 것뿐이니까.
그런데도 매일 <운명의 서>를 새로 바꿔 써야 하는 상황이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아르파드가 저항하고 있는 거야.’
이건 내가 어떻게든 피하려는 아르타누스가 확정해 둔 미래와는 반대 현상이었다.
드래곤의 용언 마법이 정해 둔 미래, ‘내가 아르파드를 죽인다’라는 문장은 더 강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다른 방법으로 바꿔 써 보려 해도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굳건하게 유지되는 중이다.
반면 내가 새로 바꿔 쓴 문장은 붉은 기운과 함께 계속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아르타누스의 후계자인 아르파드가 내가 바꿔 쓴 운명에 계속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헤어진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서.
<운명의 서>에 내가 쓴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도는 문장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붉은색으로 물들어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 문장이 아르파드라도 되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감동에 젖어 이 문장을 바라보고 있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바꿔 쓴 운명에 저항하고 있다는 게 그가 얼마나 날 사랑하는지에 대한 증명이기도 하니까.
나는 페이지 위에 쓰인 글씨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아르파드에게 들릴 리 없는데도.
“미안.”
그때였다.
쿵! 흔들리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급박한 정차라 자칫 잘못하면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
뭐지?
내가 경악하고 긴장한 사이, 마차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도적인가 하기엔 지금 내 일행이 지나는 길은 가장 치안이 좋은 가도였다.
제국군이 지키고 있고, 용병 역시 충분히 고용해서 호위 중이다. 도적 떼 따위가 달려들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 나는 <운명의 서>를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닫혀 있던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어 틈새로 밖을 훔쳐보았다.
거기에는 전혀 예상 못 한 얼굴이 보였다.
“!”
* * *
황가의 정기적인 정찬 자리는 기이할 정도로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서로 닮은 부자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침묵만을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다.
“…….”
“…….”
두 사람 모두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황제는 말없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상하군. 근래에 정찬 자리는 꽤 즐겁고 부드러운 자리였던 것 같은데…….’
이자벨 때문은 당연히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역시… 역시?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황태자비는 정략만을 이유로 아르파드와 혼인했던 아이다.
그 아이 때문에 서먹하던 부자 사이에 온기가 돌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황제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또 모르겠다. 자신에게는 그렇게 말했으나, 아르파드와 전처 사이에는 다른 것이 있었을지도.
어쨌건 약탈혼까지 해 가며 부부가 되지 않았었나.
황제는 떠오른 의문을 확인할 겸,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 볼 겸 침묵을 깨뜨렸다.
“그, 네 전처는 잘 떠났느냐?”
아르파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잠시 껄끄러운 침묵을 유지하던 아르파드는 겨우 대답했다.
“모릅니다.”
“모른다니? 궁을 떠날 때 배웅도 하지 않은 것이냐?”
“…….”
그 말대로였다. 배웅한 기억이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 뜨니 사라져 있었다, 에 가깝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들은 분명히 계약 결혼을 종료하고, 정식으로 신전의 허가를 받아 이혼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쯤 친정인 델핀 가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
아르파드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르파드?”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부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르파드는 벌써 만찬 테이블을 떠나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아무리 부자 사이이고, 곧 황위를 물려줄 입장이라지만 이건 큰 무례였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왜냐면 방금 보인 아르파드의 태도가 부모의 애정을 믿고 제멋대로 구는 아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다.
하지만 황제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정확히는 내내 억누르고 있던 부정(父情)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준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았다.
“부황께서는 본인에게나 가족에게 좀 더 무르게 대하실 필요가 있어요. 그래야 아르파드도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믿고 의지하죠.”
“믿고, 의지한다고?”
“당연하죠. 아무리 아르파드라지만, 그래도 부황께는 아들이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너무 당연하지만, 그렇기에 짓누르고 잊으려 했던 사실을 되살려 준 아이가 있었다.
맹랑하고 또 예쁜 미소를 지은 채.
“…?”
아무리 되짚어 봐도, 그게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다.
* * *
만찬장을 뛰쳐나온 아르파드는 그 길로 델핀 공작가로 향했다.
다른 수행원 없이 단신으로.
근 며칠간 그를 괴롭혀 온 이질감과 상실감, 이 지독한 고통을 어쩌면 그곳에 가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잠시 상아의 침실 주인이었던 여자.
떠올려 봐도 인상조차 흐릿하지만, 자신의 이 이상한 상태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자를 직접 본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거의 우격다짐으로 델핀 공작가의 저택 안으로 쳐들어갔다.
“헉! 황태자 전하!”
“전하를 뵙습니다!”
공작저의 규모나 재산, 가문의 위세에 비해 내부 고용인의 숫자가 적은 게 이상했다.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쓸 만한 고용인이 별로 없어서 내부 정리를 했었지. 그 뒤로는 벨테인 경에게 맡기고 있었……?’
아르파드는 의아했다.
어째서 자신이 이걸 알고 있는 건가?
기억과 감정 곳곳이 이상했다. 얼기설기 기워 붙인 것처럼 아귀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너희 주인은 어디 있지? 내가 보러 왔다 전해라.”
그러자 고용인들은 당황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아가씨께서는 안 계십니다.”
“궁에서 돌아오신 후 휴양을 하시겠다며 별장으로 향하셨습니다.”
아르파드는 고용인들을 닦달해서 별장의 위치까지 알아냈다.
바로 별장으로 달려가려던 찰나, 한 가지 의혹이 머릿속에서 돋아났다.
‘거기 있을 리 없어.’
이건 확신이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아르파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잘 아는 사람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는 것처럼.
남겨진 고용인들이 알고 있는 별장에는 절대 없을 게 분명했다.
불현듯 조금 전 자신이 떠올린 기억 속 이름들을 건져 냈다.
“벨테인 경은? 그는 어디 있나?”
분명 그녀는 델핀저와 재산 관리를 믿을 수 있는 측근에게 맡겼다.
친정에서부터 데려온 기사, 벨테인 경에게.
아르파드에게는 아주 많이 거슬리던 남자다.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벨테인 경께서는 며칠 전 그만두고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이유 없이 델핀 공작가를 떠날 이가 절대 아니다. 게다가 사직했다니, 말도 안 된다.
아르파드는 기묘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그는 단숨에 다시 황태자궁으로 돌아와 시녀장을 찾았다.
뮤젠 공작 부인이 바삐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찾으셨습니까, 전하.”
“황태자궁의 시녀 중 애니, 아니, 애니카 로렌이라는 자가 있을 텐데. 데려와라.”
그러자 시녀장은 당혹하여 고개를 들었다.
“전 황태자비께서 데려오신 시녀라면 나흘 전 시녀직을 사직하고 궁을 나갔습니다.”
“…!”
아르파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 * *
어두운 공간 속에서 가스팔은 기묘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앞에는 창백한 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인형’과 주인을 잇는 매개체였다.
인형이 보내는 정보를 즐겁게 수신하며, 가스팔은 미소 지었다.
“그래, 약속한 곳이 꽤 먼 곳이로군.”
그는 아직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움직일 절호의 기회가 올 것은 분명했다.
그는 숨을 죽인 채 이를 기다렸다.
* * *
‘저 인간이 왜 여기서 나와?’
나는 경악해서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내 마차를 세우고 호위들과 다투던 중인 외눈에 흑발의 남자가 씩 웃었다.
“드디어 다시 뵙는군요.”
검은 뱀, 크라우 테슬란이 여기까지 따라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