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Chapter 20. 꼬리잡기
율켄은 요즘 들어 죽을 맛이었다. 솔직한 기분으로는 아르파드에게 대놓고 정신 좀 차리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아무리 아르파드라지만 얼마 전에 ‘그 일’을 겪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크고 상처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니 당연했다.
동시에 원망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두 분이 계실 때 뭘 어쩌셨기에 황태자비께서 이혼까지 하고 떠나신 건지…….’
어쨌건 부부 사이 일이다.
게다가 아르파드가 지금 워낙 예민해져 있어서 한소리 하기도 애매했다.
지금 상황처럼.
“방 안이 왜 이 꼴인 거냐!”
호통 소리가 납작 엎드린 황태자궁 궁인들 등 위로 쏟아졌다.
“하, 하지만 전하께서 어제 아침에 상아의 방을 치워 두라 명하시지 않았습니까?”
“…!”
그 말에 아르파드는 잠시 멈칫했다.
분명히 본인이 그렇게 명령한 게 맞기 때문이다.
그의 명령대로 상아의 방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대대로 내려온 가구들을 제외하고 ‘누군가’의 취향과 편의를 위해 새로 추가된 소품이나 물건들은 전부 빠졌다.
그리고 침구와 양탄자, 태피스트리 등도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이 생기기 전의 모습 그대로다.
어제 아침 이 방에서 눈을 뜬 뒤 아르파드는 내내 지독한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미칠 것 같은 건 이 상실감의 원인이 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 끔찍한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원래 자신이 쓰던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순간, 아르파드는 깨달았다
그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비참했다.
마치 어머니에게 버려진 아이라도 된 듯.
하지만 왜 이러는지, 누구 때문인지 스스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잠자리도 이상하게 낯설고 불쾌했다.
몇 달간 거의 온 적 없기라도 한 것처럼.
‘그럴 리 없잖아. 결혼 생활 동안 상아의 방에서 잔 적은 손에 꼽는데…….’
이 생각을 떠올리고 아르파드는 혼란에 빠졌다.
분명히 그렇다. 정략적인 이유로 이루어진 결혼이었고, 효용이 다한 후 자연스럽게 이혼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맞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이상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하룻밤 정도 잠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빠질 수 있나?
불면의 밤은 아르파드에겐 숨 쉬는 것처럼 익숙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까지 신경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견디기 힘든 걸까.
결국 자신의 침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아르파드는 패배한 기분으로 상아의 방으로 향했다.
적어도 지난밤에는 거기서 잠들 수 있었던 걸 기억했기 때문이다.
상아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아르파드는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구르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바로 어제 아침, 그가 깨어났던 곳과 달랐다.
누군가의 흔적이 깔끔하게 지워진 상아의 방은 이상하리만치 끔찍했다.
궁인들을 불러 호통치면서도 바뀐 상태인 침실 내부 물건 하나 차마 건드리지 못했다.
“다시 원래대로 돌려놔라.”
“원래대로라 하시면…….”
“어제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와 똑같이.”
황당하고 억울해하면서도 궁인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명을 따랐다.
옆에서 지켜보던 율켄이 한마디를 던졌다.
“이럴 거면 왜 바꾸라고 하신 겁니까?”
“나도 몰라.”
“예?”
아르파드는 지독한 혼란 속에서 다시 한번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
어째서 이렇게까지 불안하고, 갈급한지. 가슴 안쪽까지 텅 빈 기분인지.
그리고… 절대 그러면 안 되는 사람에게서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도.
자신이 왜 이러는 건지 고민하고, 떠올려 보려 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관자놀이가 찌릿하고 아파 왔다. 없던 두통까지 생긴 게 이상했다.
광증이 도진 게 아닌가 하기에는… 그는 얼마 전 직접 확인했다.
진홍월의 밤, 붉은 달빛을 온몸으로 맞았지만 광증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때…….
“축하해.”
“왜 그렇게 말해?”
“당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을 축하해 주는 말처럼 들려.”
“…그럴 리가…….”
그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아르파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누가 곁에 있었나? 하지만 그런 기억은…….
희미하게 떠오른 기억은 머리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흩어졌다.
남은 건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는 이제 광증에서 해방되었다. 이건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와 같은 상실감과 위화감을 아르파드는 매 순간, 모든 장소에서 느끼고 있었다.
공기 중의 불안감을 그 혼자 모조리 마시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 * *
<운명의 서>가 빛났다. 자연스럽게 이혼이 성립되었다는 아래, 새로 써넣은 문장이 있었다.
「결혼 생활 및 이혼 과정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왜곡되고 대체되었다. 누구도 이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새로 써넣은 문장들은 다른 글자들과 달리 위태롭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 * *
지난 일주일간 황태자궁은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다.
주인인 아르파드 황태자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상태였으니 더욱 그러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살기를 자제하지 않고, 흩뿌릴 지경이었다.
덕분에 사소한 보고마저 전부 율켄을 통해 올리게 되었다.
간단한 서류 전달을 맡은 시종이 집무실 밖에서 기절했다고 하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솔직히 최근 며칠간은 율켄마저도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였다.
‘에휴. 그래도 그분이 계실 땐 분위기가 아주 좋았었는데…….’
율켄은 제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뭐지? 꼭 그분이 우리 전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세상에 아르파드를 말리거나,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부친인 황제라 해도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정략적인 이유로 임시로 자리를 지킨 것에 불과한 황태자비에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 리 없잖은가.
미묘한 위화감을 애써 지우며 율켄은 집무실 문을 열고, 부러 활달하게 말했다.
“이러다 황태자궁이 드래곤 레어 소리를 다 듣겠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정무만은 성실하게 처리하고 있던 아르파드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언제는 그런 적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그건… 그렇군요?”
아르파드가 얌전해질 만한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적 있기라도 한 듯이 자신이 말하지 않았나.
율켄은 곧 고개를 휘저어 이 이상한 기분을 털어 버렸다.
“그나저나 또 한 입도 안 대신 겁니까?”
용감한 시종이 겨우 가져다 놓은 듯한 트롤리의 음식에는 손댄 흔적이 없었다.
율켄은 새삼스럽게 물었다.
“잠은 좀 주무시고 있는 겁니까?”
아르파드는 힐끗 부하를 노려보곤 시선을 돌렸다.
“안 어울리게 웬 걱정이지?”
이건 한숨도 못 잤단 말이다.
그리고 율켄이 알기로는 지난 일주일간 식사를 제대로 한 날이 없었다.
“저야 전하께서 무식하게 튼튼하시다는 걸 잘 아니까 괜찮지만, 걱정하실 분…….”
“…뭐?”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던 아르파드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율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어질 말을 고대하는 듯.
하지만 율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아뇨, 아닙니다. 말이 헛나왔네요.”
“…….”
아르파드는 다시 온 얼굴을 찡그린 채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전혀 집중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이라도 해야 가슴이 뻥 뚫린 듯한 느낌이나, 이상하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기분을 아주 조금 더는 척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분명한 건 하나였다.
이 위화감, 불쾌감, 상실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고만 있다는 것.
* * *
흔들리는 마차 안.
그녀는 왼손 약지의 반지가 반짝거리는 걸 보았다. 위태로운 깜빡임.
“또…….”
힐리아는 한숨을 쉬며 <운명의 서>를 다시 꺼내 들었다.
펼쳐 든 페이지에는 그녀가 새로 쓴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그것들은 위태롭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금빛의 글씨에는 희미한 붉은색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신성언으로 새로 쓰인 문장에 저항하는 듯.
이 붉은빛이 강해지면 견디지 못한 문장이 사라질 듯 깜빡거리게 된다.
그러면 힐리아는 그 문장을 새로 써넣곤 했다.
지난 일주일간, 매일.
이번에도 다시 문장을 써넣은 뒤 힐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점점 빨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
문장을 바꿔 써야 하는 주기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