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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80화 (180/210)

180화

“아르파드……?”

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려는 당혹감과 낭패감을 꾹 눌렀다.

내가 델핀저로 막 들어서던 찰나, 아르파드의 얼굴에 설핏 드러난 차가운 표정이 곧 눈 녹듯 사라졌다.

평소 나에게만 보여 주던 아르파드의 부드럽고 다정한 표정이 얼굴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나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지금 상황 자체가 문제였으니까.

‘설마 내가 어디를 다녀온 것까지 아는 건가?’

그럼 매우 곤란했다.

아르파드나 그 측근들에게는 오늘 내 외출을 알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를 찾는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둔 핑계가 바로 이것이었다.

‘델핀 가문 내부 일 때문에 잠시 공작저에 들렀다.’

그런데 아르파드가 공작저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건, 변명이 시작도 전에 거짓이라고 드러난 셈이다.

그사이 아르파드는 기대 있던 벽에서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끝이 내 뺨에 닿았다.

“황태자비의 기사들이 주인을 잘 보필하지 못한 모양이군.”

“…?”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내 꼴을.

마탑에서 아론과 마탑주의 싸움 와중에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당연히 옷도 머리도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델핀저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황궁으로 들어갈 예정이었기에 아르파드에게 이런 꼴을 들키는 건 예상외였다.

아르파드가 비단 손수건으로 조심스레 내 뺨을 닦더니 안도의 한숨을 쉰다.

“다행히 상처는 안 났군.”

뺨에 묻은 먼지 따위를 보고 혹시 상처가 난 건 아닌지 걱정한 모양이다.

그는 율켄이 바친 다른 손수건으로 직접 내 손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율켄이 이렇게 긴장한 표정을 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그는 아르파드 앞에서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내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이었다.

델핀저를 지키고 있던 벨테인 경과 나를 직접 호위한 뮤젠 경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비 전하의 수호 기사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아닙니다. 저를 벌해 주십시오.”

아르파드의 차가운 눈빛이 내 기사들에게 닿았다.

당장에라도 그 입에서 둘에게 가혹한 벌을 내리라는 명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쳤다.

“두 사람은 죄가 없어요.”

“…….”

아르파드의 시선이 말없이 나를 향했다. 나는 다시 강조했다.

“내 명령에 충실한 죄밖에 없다고요.”

아르파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잠시 침묵이 가라앉다가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기사들이니, 당신의 소관이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바로 아르파드가 나를 안아 들었기 때문이다. 발이 허공에 붕 떴다.

“…!”

나는 놀라서 외쳤다.

“혼자서도 충분히 걸을 수 있어요!”

“당신의 기사들을 그냥 놔두는 대가라고 생각해.”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델핀저의 침실에 들어갔을 때 나는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목욕부터 단장까지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방 안에 옮겨진 욕조에는 더운 김이 오르는 물이 가득 찰랑이고 있었고, 옆에는 향기로운 꽃잎과 향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토르소에는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의 이너 드레스와 가운까지 있었다.

공작저에서도, 황궁에서도 자주 보던 광경이다.

내 단장 시간과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시중을 들어줄 시녀나 하녀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건 나와 아르파드뿐.

내가 잠시 당황해서 서 있는 사이, 아르파드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선명하게 갈라진 근육과 툭 불거진 힘줄이 유달리 도드라졌다.

그는 목욕물에 손을 넣어 휘저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온도는 적당하군.”

붉은 장미 꽃잎을 한 움큼 집어 들더니 욕조에 뿌리고, 향유병을 들어 올렸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우리 둘뿐이었으므로, 말투는 다시 편하게 돌아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르파드는 향유를 목욕물에 부으면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일단은 씻는 게 먼저니까.”

나는 얼굴을 확 붉히면서 외쳤다.

“지금 그런 짓을 할 때야?”

“그런 짓? 무슨 짓?”

아르파드는 고개를 휘적거리다가 곧 씩 웃었다.

“나는 고생하고 온 게 분명한 아내를 따뜻한 물로 씻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다음 푹 쉬게 하려는 것뿐인데?”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설마 엉큼한 생각이라도 한 거야?”

“…!”

새빨개진 내 얼굴을 보더니 아르파드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내 등 뒤로 손을 뻗어 침실의 문을 잠갔다.

철컥. 금속 걸쇠가 걸리는 소리가 유달리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아르파드는 내 허리를 감싸 안아 욕조 앞으로 데려갔다.

“자, 내가 도와줄게.”

“하녀들을 불러 줘. 그리고 애니는?”

“시녀를 황태자 궁에 두고 나온 건 당신 아닌가? 내가 챙겨 올 걸 그랬나?”

비꼬는 어투에서 화가 나 있다는 게 티가 났다.

그래서 나도 마주 비꼬아 주었다.

“곧 황제가 되실 분에게 시중받기는 너무 황송해서.”

그러자 아르파드는 피식 웃더니 낮게 속삭였다. 어쩐지 습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감아 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침실 시중을 얼마나 잘 드는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면서.”

내 허리의 코르셋 끈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스륵, 그건 너무나도 맥없이 풀어졌다.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늘 아르파드의 앞에서 내 마음의 경계심이나 다짐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지곤 했다.

이 순간처럼.

* * *

처음 델핀저에 들어와 아르파드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긴장감이 조금 어이없게 느껴졌다.

깨끗하게 씻겨지고 온몸에 향유까지 바른 다음 뽀송하게 말려지고 나니,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다.

노곤한 상태로 나는 아르파드의 품에 안겨 침대에 뉘어졌다.

그제야 나는 아르파드가 꺼내지 않던 화제를 먼저 말했다.

“왜 화 안 내?”

“충분히 내고 있어.”

화낸다면서 델핀저까지 따라와 나를 씻기고 돌보고 앉았다.

진짜 화난 것 같긴 했다. 평소라면 내 질문에 왜 화내냐고 되물을 사람이니.

내가 먼저 서두를 끊은 덕분인지, 아르파드는 마침내 내내 각오하고 있던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검은 뱀이 위험하다는 걸 당신이 모르진 않을 텐데.”

“…….”

역시 누굴 만나고 왔는지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나는 흐물흐물 풀어지려는 얼굴 근육을 애써 팽팽하게 당긴 다음 물었다.

“혹시 나 감시하고 있어?”

그러자 아르파드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나를 유심히 보다가 되물었다.

“당신은 나 감시 안 해?”

“…….”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감시하고 있으니까.

단지 아르파드의 움직임을 내가 풀어 둔 이들은 놓쳤고, 내 움직임은 아르파드에게 들켰다는 차이뿐.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아르파드는 나를 타이르듯 말했다.

“늘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니야. 우리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한 후에는 거의 없앴고.”

“그러면 이번엔 뭐야?”

“검은 뱀을 감시하고 있던 쪽에서 당신 관련 정보가 올라와서.”

“…….”

아르파드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 곁에 다른 사내가 있는 걸 보고 있자면 속이 뒤집혀. 그런데 새로운 놈이 나타났다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지.”

“…….”

“내가 의처증 환자 같아 보인다고 화낸다면… 할 말이 없긴 하군. 사실이긴 하니까.”

전혀 예상 못 한 말이 튀어나왔다.

“나에게 말하지 않은 회귀 전 생에서 그놈이 당신 정부이기라도 했나, 하는 음험한 상상을 하며 마음을 태우고 있었거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뱀이 내 정부? 말도 안 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새삼 회귀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아르파드의 반응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루드비히 놈이 당신의 남편이었다는 거군? 세 번이나?”

“…그렇긴 했지. 한 번도 제대로 된 남편이었던 적은 없긴 하지만. …왜 그런 표정을 해?”

“역시 루드비히 놈을 그냥 놔두고 싶지 않아져서.”

“어차피 행방불명인데 뭐.”

“하긴, 그게 루드비히 놈에겐 차라리 다행이겠군. 내 손에 들어왔으면 내가 얼마나 질투심이 강한 인간인지 몸으로 뼈저리게 깨달았을 테니까.”

루드비히가 없으니, 이젠 검은 뱀에게 질투하려는 건가?

심각하고 아슬아슬한 와중에도, 아르파드의 저런 모습이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내 콩깍지가 꽤 심각하게 두껍긴 한 모양이다.

나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검은 뱀은 다섯 번째 신물을 확보하려고 만난 것뿐이야.”

“그러면 나를 데려갔으면 좋았잖아. 대주교 때처럼.”

“…미안.”

당신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지, 그러고도 당신을 지킬 수 있을지 방법을 알아보고 싶어서였다는 말은 역시 할 수 없었다.

확인했기 때문이다.

레므네미아의 바늘까지 손에 넣어 <운명의 서>의 봉인을 완전히 풀고 난 뒤.

마탑주의 간섭으로부터 검은 뱀을 자유롭게 만들어 준 이후.

내가 가장 먼저 시도해 본 것은 다름 아닌 <운명의 서>의 미래 수정이었다.

그곳에 적힌 저주스러운 문장.

「힐리아는 아르파드의 심장을 찔러 죽임으로써 완전하게 하였다.」

완전한 힘을 되찾은 <운명의 서>를 가지고 나는 한 번 더 아르타누스의 용언으로 고정된 미래를 바꿔 쓰려 시도했다.

그리고.

“안 돼!”

다시 실패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가 언젠가 정말로 그를 죽이게 되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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