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가스팔의 입장에서 ‘주시자의 눈’ 봉인이 풀린 건 예상치 못한 행운이었다.
실험체로서는 쓸 만큼 다 써먹었고, 그 뒤로도 꽤 쓸모 있는 패였던 게 검은 뱀이었다.
온갖 지저분하고 귀찮은 일에 잘 써먹었으니까.
그 때문에 그가 북쪽으로 사라진 뒤 주시자의 눈에 새겨 둔 주박이 끊어진 걸 느꼈을 때 가스팔의 감상은 간단했다.
‘죽은 모양이군. 아까워라.’
단물이 다 빠질 만큼 충분히 써먹어 놓고도 말이다.
아마 당사자가 들으면, 실험체로 굴리고 그 뒤로도 목숨을 빌미로 노예처럼 부려 먹어 놓고, 양심도 없다고 분노할 터다.
그런데 3년 넘게 사라졌던 주시자의 눈이 보내는 신호가 다시 되살아난 순간.
가스팔 입장에서는 잊어버렸던 보물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대부분의 마도구나 실험 장비, 호문쿨루스, 예비 육체까지 4/5를 잃은 곤란한 처지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주시자의 눈’은 아주 반갑고 탐이 날 수밖에.
가스팔은 신호가 되살아난 걸 느낀 순간, 바로 손을 뻗었다.
‘좋아. 바로 잡아채 오도록 할까.’
마도구에 새겨 둔 마법을 통해 검은 뱀의 의식과 연결을 되살리자, 가스팔은 예상외의 상황을 보고 놀랐다.
공유된 검은 뱀의 시야를 통해 보이는 한 여자 때문이었다.
계절에 맞지 않는 벚꽃잎 색의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하얗게 빛나는 여자.
‘황태자비!’
황태자의 피 한 방울로 그를 농락하고는 뒤통수를 친 그 여자였다.
덕분에 예비 목숨 네 개가 날아가기도 한 상황.
그에 대한 대가는 치르게 해야 마땅했다.
어떻게 자신의 예비 육체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도 확인할 겸.
‘그리고 무엇보다… 황태자에 대한 효과적인 인질이 되어 주겠지.’
가스팔은 검은 뱀의 육체를 조종해서 힐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목을 움켜쥐려는 찰나.
“네놈!”
옆에서 방해가 있었다.
캉―!
오러에 둘러싸인 칼날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오러와 마력이 부딪치며 불꽃이 일어났다.
강렬한 파공음이 사방을 두드린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힐리아는 경악과 두려움으로 굳어 있지 않았다.
충격파에 밀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뒤 반짝 고개를 들고 외쳤다.
“뮤젠 경! 조심해요! 그자는 지금 마탑주 본인이나 마찬가지예요!”
“호오?”
가스팔은 또 놀랐다.
그가 검은 뱀의 육체를 조종하기 시작한 이후 전투 방법이 아예 바뀌었다.
암기와 독에 일부 마법을 섞는 게 검은 뱀의 전투 방법이라면, 가스팔은 마법 위주로 싸울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지금 그를 상대하는 아론 뮤젠이 직접 알아챘다면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전투력은 없다고 봐도 좋은 여자가 아론보다 먼저 눈치챈다?
말이 안 된다.
‘내가 검은 뱀의 육체를 조종할 수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게 아니면…….’
이 여자를 앞에 두고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뭐, 찬찬히 심문하면 되겠지.”
가스팔은 계획을 바꾸었다.
원래는 검은 뱀과 주시자의 눈만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무리해서라도 저 여자를 확보해야 한다.
이건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 * *
테슬란 공작이 왼쪽 눈의 마도구를 사용하려 하다가 잠시 비틀거린 직후 나는 이상을 눈치챘다.
눈빛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검은 뱀은 노골적인 경계심과 불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정도는 아주 평범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함을 주는 이는 거의 없다.
단 한 명뿐.
마탑주 가스팔.
그리고 나는 가스팔이 검은 뱀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망했다!’
그나마 아론을 대동하고 와서 정말 다행이다.
소드 마스터인 아론이 아니면 가스팔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르파드뿐이니까.
오러와 마법이 날아다니며 마탑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나는 바람을 따라 구르는 비닐봉지처럼 데굴데굴 굴렀다.
그때였다.
한 가지 물건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저건……!’
아까 검은 뱀의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
‘저걸 풀어내자마자 검은 뱀이 마탑주에게 조종당하기 시작했어.’
그렇다면 내가 찾고 있는 물건은 아마도 저 안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나는 몸을 아끼지 않고 앞으로 내던지다시피 했다.
오러와 마력탄이 휭휭 날아다니며 벽을 박살 내는 와중이라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호신용 마도구, 믿는다!’
그 이상으로 마지막 신물을 손에 넣는 게 중요했다.
돌멩이처럼 데굴데굴 구른 끝에 안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좀 과하게 근육을 혹사해서인지 아랫배가 찌릿거리고 아팠지만, 지금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호신용 단검을 꺼내 안대를 자르고 갈라진 틈새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마구 후볐다.
손끝에 딱딱한 무언가 닿는 게 느껴진다.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신성력의 느낌. 그것을 끄집어냈다.
달칵! 가벼운 소리를 울리며 길쭉한 결정이 떨어졌다.
‘레므네미아의 바늘!’
<운명의 서>를 만든 다섯 자매신 중 막내인, 기억과 망각의 여신 레므네미아.
그 여신의 신물인 보석이었다.
노란색부터 짙은 오렌지색까지 색의 계층이 선명히 보이는 길쭉한 결정.
그것은 내 손에 닿은 순간 눈부신 빛을 냈다.
동시에 내가 소지하고 있는 다른 여신의 신물들 역시 함께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웅-, 우웅―!
다시 공명이 시작되었다.
신전 터에서와 달리 더 크고, 풍부한 선율과 파장이 사방을 감쌌다.
다섯 개의 빛이 내뿜는 온기가 내 몸을 가득 채웠다.
온몸에서 힘이 넘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자신감 있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 힘의 충돌 여파만으로 바닥을 굴러다닐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나를 중심으로 기묘한 공명음과 함께 오색의 빛이 눈부시게 빛났다.
손을 뻗자, 허공에서 <운명의 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섯 여신의 신물(보석)들에서 흘러나온 빛이 운명의 서에 모여들었다.
운명의 서는 네 개의 신물과 공명할 때 낡은 책에서 새것처럼 변한 바 있었다.
다섯 개의 신물이 모두 갖춰진 지금, 운명의 서는 그때보다 커다란 힘을 되찾게 될 것이 분명했다.
책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가 새것처럼 바뀌는 걸 넘어, 순수한 빛의 형태로 화했다.
곧 빛이 해일처럼 흘러넘쳐, 나는 물론이고 검은 뱀과 아론까지 집어삼켰다.
“―!!!”
* * *
“커헉!”
가스팔의 입에서 푸른색의 체액이 왈칵 쏟아졌다.
일반인으로 치면 각혈한 것과 같은 상황.
그는 허리를 꺾은 채 한참 동안 바닥에 푸른 액체를 계속 토해 냈다.
그리고 한참 만에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조금만 늦었으면 진짜 죽을 뻔했군.”
지금 가스팔에게는 예비 육체가 없었다.
마탑의 기반 시설을 빼앗기고, 다른 네 개의 예비 육체를 보관하던 장소 역시 전부 파괴된 상태다.
아무리 그라도 이런 상황에서 새 육체를 만들어 두는 건 불가능했다.
가스팔은 새삼 감탄했다.
‘저게 바로 진짜 운명의 주인이 신물을 모두 손에 넣은 상태에서 가지게 되는 힘인 건가?’
대단하다 못해 끔찍했다.
원래 신성력과 마력이 서로 반발한다지만, 운명의 서의 각성이 만들어 낸 빛의 여파만으로 가스팔과 검은 뱀의 연결이 끊어졌다.
검은 뱀의 체내에 남아 있던 가스팔의 주박이 모조리 타 버린 상황.
덕분에 가스팔은 되찾았다고 기뻐하던 쓸 만한 패를 바로 빼앗겼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지금 가스팔의 머릿속에 없었다.
남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두 눈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그는 은신처 구석에 있는 거대한 유리 수조로 다가갔다.
그 안에는 붉은 부정형의 생명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과 도마뱀을 섞어 둔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안에서 신성력과 마력이 빛나며 어지럽게 회전하고 있었다.
하나 남은 호문쿨루스이자, 그가 만들어 낸 것 중 가장 이상에 가까운 것.
하지만 이 역시 미완성이었다.
에반젤린의 체내에서 신성력을 흡수하고, 간신히 손에 넣은 아르파드의 피를 더해 보완했지만 모자랐다.
‘완성도는 대략 50% 정도…….’
마탑을 잃고 쫓기는 중인 그로서는 이걸 완성할 길이 요원했다.
조금 전, 그가 검은 뱀을 통해 확인한 사실을 몰랐다면 그러했으리라.
<운명의 서>의 강력한 신성력에 타격을 받고 연결이 끊어지던 순간.
그는 분명히 보았다. ‘주시자의 눈’은 대상을 해부하듯 꿰뚫어 볼 수 있는 마도구다.
그 여자를 중심으로 흘러넘치는 신성력의 해일 가운데에서…….
작지만 분명한, 이질적인 마력의 결정체를.
눈앞에 있는 실험체조차 그것에는 감히 비할 수 없었다.
온갖 부족한 것을 누덕누덕 기워 붙여 만들어 낸 불안정한 이것과는.
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그 여자에게 있었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겠군.”
광기 어린 욕망으로 가스팔의 눈이 번뜩였다.
* * *
“하아…….”
가까스로 저녁이 되기 전에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 피로했다.
‘방으로 돌아가면, 일단 다 제쳐 두고 조금 자야겠어.’
내 이런 생각은 델핀 공작저에 들른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늦었군.”
지금 황궁에 있어야 할 아르파드가 델핀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