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아르파드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살기가 형태와 질량을 가질 것처럼 크고 짙어진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새삼 율켄은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히익! 살려 주세요, 비 전하!’
…라고 속으로 외치던 그는 곧 깨달았다.
‘잠깐, 근데 지금 상황도 비 전하 때문에 벌어진 사달 아닌가?’
지금 그의 주인이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지게 만든 이도, 비밀리에 일을 꾸민 것도 바로 그 ‘비 전하’이지 않은가.
하지만 언제나 시한폭탄 상태이던 아르파드를 얌전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도 비 전하뿐이다.
그야말로 아르파드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율켄이 힐리아에게 매달려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헷갈려하던 중 아르파드는 살기를 짓씹으며 물었다.
“밀회의 상대는?”
밀회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에는 상대를 산채로 씹어 먹으려는 듯한 어조였다.
율켄은 달달 떨면서 겨우 대답했다.
“북쪽의 검은 늑대입니다.”
이는 테슬란 공국의 문장을 빗댄 표현이었다.
아르파드의 눈빛이 더더욱 더러워졌다.
“내부 장악이 끝날 시점이 되기도 했고, 대관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 슬슬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행동을 개시하자마자 남의 여자부터 넘볼 줄은 몰랐군.”
그의 어조는 한 귀로 듣기에는 평온했다.
하지만 속은 용암보다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사실 지금 그는 더없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야 마땅했다.
루드비히와 이자벨을 끌어내렸고, 거슬리던 에반젤린도 없앴다.
일생의 업과도 같던 광증도 해결되었다. (그는 이걸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꿈에도 바란 적 없는 사랑마저 손에 넣었다.
그런데도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다.
이유가 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의뢰대로 그녀를 약탈해서 별궁으로 데려가 혼인성사를 올린 직후.
그날 밤, 힐리아는 <약탈혼 계약서> 즉, 사실상 그들의 결혼 계약서를 내밀었다.
거기 있던 조항 중 하나를 아르파드는 선명히 기억했다.
‘분명히 한쪽만 원하면 언제든 이혼할 수 있게 하려고 했었어.’
언뜻 보기에 그건 아르파드에게 유용한 조항이었다.
실제로 힐리아는 그렇게 주장하려 했고.
“…제가 황후 자리나 권력을 원해서 이런 의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이걸로 증명할 수 있어요!”
새삼 드는 생각이었다.
‘계약서 내용을 바꾸길 잘했군.’
부부 중 한쪽만 요구해도 바로 이혼이 가능했던 힐리아의 초안을 양쪽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바꿔 두었다.
의식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신의 한수였다.
그때도 지금도 의문이 들었다.
‘힐리아는 에반젤린과 루드비히를 처리한 후 바로 이혼하고 나를 떠날 예정이었던 게 아닐까?’
아르파드의 의심은 정확하게 힐리아의 생각을 찌르고 있었다.
힐리아는 회귀 사실마저 전부 고백할 때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을 처리하고 나면 바로 이혼할 생각이었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다.
너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아르파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후에는 본인도 잊고 있던 내용이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숨기게 된 격이다.
하지만 아르파드가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저 결혼식 직후 힐리아가 보인 태도와 말, 바꾸기 전 계약서의 내용만이 머릿속에 박혀 있을 뿐.
‘그래. 마치 언제라도 내 곁을 떠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처럼…….’
계약서 내용을 바꿔 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혼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먹고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할 수 있었다.
힐리아에게는 그러한 능력과 실행력이 있었다.
“사랑해요.”
그녀의 고백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믿을 수 없는 사실까지 전부 고백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아르파드의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랑에 대한 믿음이, 곧 그녀가 영원히 곁에 남아 주리라는 보장이 되지 않아서라는 걸 그는 이제 알았다.
스스로 그의 품 안에 날아든 분홍빛 작은 새가 언제 날아가 버릴지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작은 새의 온기와 깃털의 감촉, 그 향기를 알게 되어 새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는데.
그의 소중하고 작고 아름다운 벚꽂색 새는 새장에 갇혀 있지도 않았고, 날개깃은 건강했으며, 사슬에 묶여 있지도 않았다.
언제든 날아서 사라져 버릴 수 있었다.
아르파드는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
분명 나는 지금 검은 뱀과의 만남을 아르파드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말할 이유는 없잖아?’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 황태자 전하께서 이번 일을 모르실 거라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
검은 뱀의 하나뿐인 눈이 나를 미심쩍은 듯 훑는다.
역시 황태자궁 내부의 일까지 북쪽 멀리 있던 그가 알지 못할 거란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다.
테슬란 공국 내부 장악만으로도 벅찬 상황일 터였다.
그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황도 뒷골목의 세력들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그 덕분에 밀란과 그녀를 따르는 이들을 페니 테라스로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었다.
아르파드에 대한 건 넘겨짚은 거였는지 검은 뱀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설마하니 고귀하고 신성한 황태자비께서 이렇게 더럽고 어두운 뒷골목의 일에 관심이 많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역시 내가 페니 테라스의 진짜 주인이라는 것까지 파악한 모양이다.
하긴, 원래 그쪽이 그의 고향이자 주 무대였고, 프리다 웨스의 의상점과 페니 테라스의 연계는 검은 뱀이라면 알아내기 쉬울 거다.
“그것도 어렵게 되찾은 친정의 가산까지 털어 넣으시면서 말입니다.”
델핀 공작가에서 페니 테라스로 흘러 들어가는 자금 내역도 대충 아는 모양이다.
‘내가 3개월간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으니 더 그렇겠지.’
새삼 진짜 도움이 안 되는 빌어먹을 도마뱀에게 나는 소리 없는 욕설을 몇 마디 퍼부었다.
“아, 혹시 그것도 황태자 전하께서 모르진 않으시겠지요?”
“당연히 잘 알고 계시죠.”
이건 100% 사실이라 입술에 침 바를 것도 없었다.
그러자 검은 뱀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머금었다.
“소문대로 남편을 잘 따르시는 양처이신 모양입니다.”
언뜻 칭찬 같지만, 이건 내가 한 모든 일의 진짜 배후가 아르파드가 아니냐는 소리다.
노골적인 조롱에 가까워서 이런 식의 화법에 익숙하지 못한 기사인 아론이 대놓고 분노했다.
“지금 감히 기사의 앞에서 그 주인을 비웃은 건가?!”
소드 마스터가 뿌리는 살기에도, 검은 뱀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글쎄. 그보다는 예의를 잊은 게 아닌지 모르겠군. 뮤젠 소공작.”
남부의 뮤젠 공작가와 북부의 테슬란 공작가.
양 가문의 위세는 테슬란 공작가 쪽이 살짝 더 높다.
게다가 크라우 테슬란은 공작 본인이고, 아론은 아직 소공작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예의를 차리는 게 먼저라고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아론을 말린 다음,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보다는… 악처라는 게 정확한 표현 아닐까요?”
“…?”
“나는 주인에게 허락받는 여자는 못 되거든요. 차라리 남편을 마구 부려먹는 악처에 가깝죠.”
어쩌면 곧 남편을 두고 떠나 버릴지도 모르는 악처기도 했다.
“…….”
이건 예상 못 했는지 테슬란 공작은 잠시 침묵했다.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있는 내가 아니라 아르파드를 상대하는 것처럼 굴어서 마음에 안 들었다.
‘감히 나를 허수아비 취급하려고 해.’
“…황태자께서 비 전하를 아끼신다더니, 소문 이상인 모양이군요.”
“부끄럽지만 사실이랍니다.”
나는 진심을 듬뿍 담아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자 검은 뱀, 즉 테슬란 공작은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다시 훑어보았다.
여전히 내가 왜 여기 나타났는지 영문을 모르겠고,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했다.
하긴, 그의 황도 입성이 공식화되면 정식으로 황태자궁에 초대장을 보내는 게 정상적이긴 했다.
나 역시 지금처럼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테슬란 공작은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마탑주와 내 관계를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황태자비와 황태자 전하께서 그자의 목을 벤 은혜에 제가 갚음을 해야 한다는 말씀은 아니길 바랍니다.”
“설마요. 마탑주는 위험한 자라 기회를 잡았을 때 확실히 없애야 했을 뿐이랍니다.”
내가 그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다.
“굳이 공작을 위해 마탑주의 목을 벨 정도로, 공작의 힘이 저나 남편에게 큰 의미를 지니진 않는답니다. 조금 자의식이 과하신 것 같군요.”
“…….”
테슬란 공작의 표정이 대놓고 떨떠름해졌다.
그러게 누가 상대방의 심기를 굳이 건드리래?
“혹시 목을 자른 정도로 그놈을 정말 죽였다고 섣불리 자신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당연히 아니지요. 하지만 그자가 만들어 놓은 여분의 육체 4개체까지 전부 없앴어요.”
“…!”
내내 나를 의심과 비웃음을 섞어 가며 보던 공작의 하나뿐인 눈에 처음으로 경악이 어렸다.
제대로 허를 찌른 것 같았다.
이 타이밍을 놓칠 순 없었다.
나는 그에게 한발 나아가며 본론을 꺼내 들었다.
“내 목적은 하나예요. 늑대의 송곳니.”
경악으로 굳었던 공작의 표정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변했다.
“지금 가보(家寶)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시는 겁니까?”
“진짜 이름은 ‘레므네미아의 바늘. 기억과 망각의 여신 레므네미아의 신물이죠.”
“…!”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만한 물건을 그냥 내놓으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나는 거래를 제안하는 거죠.”
“거래?”
내민 손을 가볍게 쥐어, 검지만을 내밀었다.
그리고 공작의 검은 안대로 감싸인 왼쪽 눈을 가리켰다.
“당신의 그 눈 안에 있는 ‘것’, 내가 해결해 줄게요.”
공작의 보이는 한쪽 눈은 이제 단순한 경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냈다.
지독한 경계심과 분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