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Chapter 19. 선택
황도 중심에는 마치 태양을 본뜬 듯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궁이 존재한다.
그리고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달과 별들처럼 여러 주요한 장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천주신과 지모신의 신전이 있었다.
여러 신전 중 황도 내에 건물을 올릴 것을 허락받은 건 이 두 곳뿐이었다.
대부분 신전이 그러하듯 두 신전은 눈부신 백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또 하나, 상징적이고 특징적인 장소가 바로 마탑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오만하게 치솟은 까마귀 날개깃보다 검은 기다란 건축물.
황궁을 제외한 세 곳의 공통점은 황도 안에 있다는 것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제한적이나마 황권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드래곤 아르타누스의 권위를 힘입은 강력한 황실은 역사적으로 딱 한 경우에만 이 세 곳에 칼을 들이댔다.
반역.
몇 번 없던 일이나, 아예 존재한 적 없는 일은 아니다.
이번에 황실의 칼날이 향한 곳은 마탑이었다.
당대 마탑주 가스팔이 이자벨, 에반젤린, 비오 등 반역자와 내통했기 때문이다.
지금 마탑은 시체를 다 파먹힌 곤충의 껍데기나 마찬가지였다.
마탑은 그 주인에 따라 매번 구성원과 성향이 바뀌는데, 가스팔은 그 자신이 곧 마탑으로서 행동했다.
제자나 동료 따위는 키우지 않고, 오로지 도구로만 탑을 채워 놨다.
마탑주의 측근이라 불리던 중요한 인물들은 가스팔의 목이 떨어진 직후 그 자리에서 정지해 쓰러졌다.
곧 시체와 유사한 인체들이 사방에 널렸다.
시일이 지나도 이것들은 부패하지 않았다.
호문쿨루스, 혹은 그에 준하는 인형들이었던 것이다.
이를 상상도 못 하던 몇몇 허드레 일꾼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벌벌 떨다가 체포되어 끌려갔다.
황실 기사들은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도, 처분이 실행되기 전까지 마탑을 철통같이 지켰다.
그러나 아무리 단단히 지키려 해도 결국 틈새는 존재할 수밖에.
텅 빈 껍질 속으로, 그림자를 닮은 검은 뱀 같은 한 남자가 숨어들었다.
바스락.
찢어진 종이와 산산조각 난 유리 파편이 가죽 부츠에 밟혀 가벼운 소리를 울렸다.
검은 늑대 털 망토로 몸을 가린 남자는 텅 빈 마탑 안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전히 기분 나쁜 곳이군.”
그에게는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 곳이다.
주인을 잃어 텅 빈 상태지만, 이곳을 쉽게 들어올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본래 이곳은 주인의 허락 없이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니까.
남자는 하나뿐인 눈으로 사방을 노려보았다.
거기에 탑의 주인이 남긴 흔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돌아왔어야 했는데.”
그때였다. 분명 아무런 기척도 없었건만, 허공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왜, 원수의 목을 직접 자르지 못해서 불만인가요?”
“…!”
외눈에 검은 모피를 뒤집어쓴 남자는 경악했다.
‘어떻게? 분명히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하나 남은 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검은 안대에 가려 있지만, 그의 숨겨진 눈은 가죽 한 겹 따위로는 가릴 수 없었으니까.
그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단검을 내던졌다.
쉭―!
날카로운 소리를 울리며 날아간 칼날은 금속성과 함께 튕겨 나오지 않았다.
슥, 하는 기묘한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져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덕분에 남자는 갑자기 끼어든 여자의 기사가 오러를 휘두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뮤젠 소공작인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며 그 존재를 인지한 순간, 그의 인식을 방해하던 마법이 깨졌다.
덕분에 오러를 두른 칼을 내민 아론과 그 뒤에 선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북쪽 오지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새 신부께서 이런 곳에는 무슨 일이신지?”
네 정체를 알고 있다는 선언이었다.
여자의 가는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자, 소드 마스터는 오러를 거둔 채 옆으로 물러났다.
봄꽃을 두른 듯한 머리 색을 가진 여자는 당당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처음 만나는군요. 크라우 테슬란 공작.”
힐리아는 남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쳐 준 셈이다.
* * *
크라우 테슬란.
별명은 검은 뱀. 이자는 몇 년 전까지 황도 뒷골목을 지배하던 자였다.
전생에 내가 그를 만난 곳도 지금 우리가 선 곳과 같은 장소였다.
물론 상황은 여러모로 달랐지만.
“꼴을 보아하니, 지금 가스팔 놈이 가장 흥미를 느끼는 실험체가 너인 모양이군. 살아 있는 게 끔찍하지?”
“그걸, 어떻게…….”
“그야 전임자니까 알 수밖에.”
그는 살기 어린 미소를 짓더니 나에게 물었다.
“내가 서푼짜리 동정심에 동하는 경우는 드무니까, 바로 말해. 죽고 싶은지 아닌지.”
“…왜?”
“죽고 싶으면 죽여 줄 테니까.”
나는 죽고 싶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결국 더 고통받다가 단두대로 끌려갔다.
그때 선택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은 말할 수 있었다.
‘그때 난 옳은 선택을 한 거야.’
덕분에 빙의자에 대해 알 수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은 절대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아르파드를 찾아갈 일도, 아내가 될 일도.
이렇게 사랑하게 될 일도.
회귀 이전, 그와의 진짜 첫 만남을 되찾게 될 일도.
나는 다시 술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리고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 집중했다.
크라우 테슬란. 검은 뱀은, 방심할 수 없는 자니까.
낮은 목소리가 텅 빈 탑 안을 휘돌았다.
“황태자께서는 귀한 아내가 이런 위험한 곳에서 낯선 사내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걸 아실는지요?”
아르파드에게 알리겠다는 협박이다.
평소라면 저 말은 나에게 협박이 될 수 없었을 거다.
이런 일을 진행할 때 아르파드에게 숨기는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검은 뱀과의 만남은 비밀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검은 뱀을 굳이 찾아온 건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였다.
‘또, 그것마저 실패할 경우… 아르파드의 곁을 떠나기 위해서니까.’
절대로 그만은 알아서는 안 됐다.
* * *
황태자 부부의 귀환 이후 황태자궁은 기쁨과 활기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상으로 일감이 산처럼 쌓여, 궁인들과 신하들을 과로로 몰아넣고 있긴 했지만.
어쨌건 경사를 앞둔 상황.
다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딱 한 명만 제외하고.
“…….”
아르파드의 잘생긴 흰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미간에는 미미한 주름까지 잡혀 있었다.
사실 황태자궁에서 가장 기분이 좋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남자다.
모든 정적을 물리쳤으며, 곧 황위에 오르게 될 예정인 아르파드 이스트리드.
게다가 얼마 전에는 드디어 사랑하던 여자와 맺어지지 않았나.
그야말로 인생의 승리자였다.
진정한 의미의 첫날밤을 지낸 이후 밀린 일로 끌려 왔을 때는 율켄이 어이없어할 정도였다.
“살면서 전하의 입이 귀에 걸린 건 정말 처음 보는군요. 그렇게 좋으십니까?”
더욱이 평생 그를 괴롭혀 온 광증 역시 곧 해결될 예정이다.
며칠 전 사랑하는 아내가 드디어 조개처럼 숨기고 있던 비밀을 전부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르타누스께서 확언하셨어. 우리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육체적으로도 맺어지면, 광증은 사라질 거라고.”
그 말에 아르파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이미 사라졌겠군.”
“어떻게 바로 확신해?”
“당신을 사랑하는 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자신 있으니까. 당신만 나를 사랑하면 되겠지. 혹시, 나 사랑 안 해?”
힐리아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웃으며 대답했다. 망설임 없이.
“사랑해. 진심으로.”
“그러면 된 거지. 진홍월 때에는 우리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겠군.”
율켄은 조마조마하며 물었다.
“괜찮, 으십니까? 전하?”
그러자 아르파드는 조금 전의 그늘과 미간의 주름을 내던지고 환하게 웃었다.
“당연히 괜찮지. 아주 좋아. 좋지 않으면 안 되는걸.”
그를 오래 모셔 온 율켄은 아주 잘 알았다.
‘지금, 어엄청나게 기분이 나쁘시군.’
그야말로 뇌관을 건드린 화약 같은 상태다. 잘못 건드리면 바로 폭발하는.
율켄은 정말로, 진심을 다해 지금의 아르파드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안 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 임무’를 신신당부한 건 아르파드 본인이었으니까.
“비 전하께서 비밀리에 황궁 바깥으로 발걸음 하셨다고 합니다.”
“…뭐?”
아르파드의 하얀 얼굴을 덮었던 부자연스럽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