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긴장으로 입 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그럼에도 목마르다는 것을 떠올릴 정신도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아르파드의 입에 고정된 느낌이다.
날렵하면서 예쁜 선으로 이루어진, 뭘 안 발라도 반짝거리는 분홍색 입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르파드는 내 이름을 부르더니 엉뚱한 소리를 했다.
“너무 열정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니까, 좀 부끄럽군…….”
“…뭐?”
내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렸더니 아르파드가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서로의 입술이 겹쳐졌다.
“으응!”
우리는 한참 동안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폐활량의 한계를 매번 시험하던 아르파드는 오늘도 기록 하나를 경신했다.
농담이 아니라 미약한 현기증을 느낄 정도가 되어서야 놔주었다.
이후 아르파드의 엉뚱한 대답과 행동에 타박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니, 사람이 어렵게 고백했더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자 아르파드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이걸 원하고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본 거 아니었어?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키스가 고픈 표정이었는데.”
“뭐라는 거야, 진짜!”
아직 내 허리를 안은 아르파드의 가슴팍을 퍽 하고 때렸다.
언제나 그랬지만, 내 손만 아팠다.
조금만 더 놀리면 진짜 화가 날 것 같았다.
“나는 농담한 거 아니야!”
“알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러면 뭐야?”
고개를 갸웃하자,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잠시 나를 응시했다.
이번에도 예상 못 한 말부터 불쑥 나와 또 나를 당황하게 했다.
“미안해.”
“어? 뭐가?”
아르파드는 고개를 숙여 내 손을 부드럽게 감아쥐어 당겼다.
그러고는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아,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 그때 내가 정말 잘못했다 싶어서.”
나는 그제야 아르파드가 왜 사과했는지 이해했다.
내가 카타콤으로 찾아가 약탈혼을 의뢰했던 그때를 말하는 거다.
‘그렇지만 그때 우리는 꽤 수월하게 합의하지 않았나? 저렇게 말할 만한 일이… 아!’
새삼 깨달았다. 그때 꽤 분위기가 험악했었다는 걸.
아르파드는 미간을 누르며 작게 탄식했다.
“내가 만나자마자 목에 칼부터 들이대고, 멱살도 잡았지.”
맞다. 그랬었지.
사실 1년도 되지 않은 일이다. 그사이에 사건 사고가 잦아서인가. 지난 생처럼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까맣게 잊…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콩깍지가 꽤 낀 모양이다.
그때의 일이 어째선지 머릿속에서 로맨틱하고 수월했던 걸로 인상이 바뀌어 있었다.
“당신은 나를 구하려고 일어나자마자 달려온 거였건만……!”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나 만나자마자 협박부터 하지 않았나?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비밀을 다 밝혀 버릴 거라고.
아르파드도 나 못지않게 첫 만남의 기억에 로맨스적인 왜곡이 강하게 끼어 있는 건가?
“…!”
곧 깨달았다.
아르파드가 진짜 그렇게 왜곡해서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나를 위해서 농담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걸 알고서.
“왜 진작 말 못 했는지 알겠어. 첫 눈도장부터 내가 잘못 찍어 놓은 탓이야. 대뜸 칼부터 들이대는 미친놈에게 어떻게 그런 말들을 쉽게 하겠어.”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건…….”
말하다가 나는 계속 생각해 온 질문을 내뱉었다.
“화 안 내? 정말 믿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아르파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짧은 침묵 후에 대답했다.
“당신은 또 그렇게 묻는군?”
“응?”
무슨 말이지?
아르파드는 두 손을 뻗어 내 양 뺨을 감싸며 속삭였다.
“당신이 내 신부라는 걸 알려 줬을 때도 그렇게 물었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그때도 아르파드는 화를 내지 않았었다.
“조금 서운한데.”
“내가 너무 늦게 말해서?”
아르파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사실을 고백하면 내가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한 게. 그때도, 지금도. 당신이 하는 말을 내가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의심한 거야?”
“…….”
나는 잠시 울컥 치솟는 걸 억누르느라 애써야 했다.
잘못하다간 울어 버릴 것 같아서.
용을 써서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아니, 당신이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해서 말한 거야.”
“다행이군.”
“그리고 화 안 낼 거라는 것도 알아.”
“내 노력이 아주 무용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야.”
“다 알면서 당신 목소리로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어. 이기적이지?”
“아니.”
아르파드는 내 이마에 키스했다.
“너무 기뻐.”
이번엔 내가 아르파드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안아 줘.”
열정적인 손길이 더듬어 올라와 능숙하게 허리띠를 풀어냈다.
나는 다시 한번 열락으로 잠겨 들었다.
끝내 그에게 말하지 못한 하나는 속에 품은 채로.
이틀이 지난 뒤 요즘 자주 그러하지만, 본의 아니게 꽤 느지막이 아침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였다.
애니가 신중한 표정으로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비 전하, 외궁에 있던 죄인이 도망쳤다고 합니다.”
외궁에 있는 죄인은 한 명뿐이었다.
치료받고 있던 에반젤린.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애니는 조금 걱정하면서 물었다.
“놔줘도 될까요?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괜찮으니까 놔둬.”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결국 제 무덤을 택했구나.’
그리고 애니를 물리고 혼자 앉아 <운명의 서>를 펼쳐 들었다.
* * *
“헉, 허억!”
숨이 거칠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몸을 좀 추스른 뒤 그녀는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렸다.
그러다가 궁인들의 감시가 허술한 틈에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장소가 황궁 바깥과 가까운 외궁인 것도 있었고, 곧 있을 신년제와 대관식 준비로 워낙 주변이 정신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에반젤린은 숨이 턱에 찬 채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절대 이렇게는 안 끝내! 멍청한 힐리아! 날 안 죽인 걸 후회하게 해 주지!’
치료받는 동안 열심히 계획을 다 세워 두었다.
‘어떻게든 그 책만 다시 빼앗아 오면 돼.’
게다가 되찾은 기억도 있었다.
에반젤린은 자신이 <운명의 서>에 문장을 써넣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성공했었어!’
그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었다.
그때의 희열이 떠오른다.
힐리아를 몇 번이나 끌어내리고 주인공 자리를 손에 넣었던 기억이.
“그리고 너로 인해 모든 걸 빼앗기고, 세 번의 시간을 거슬러 온 회귀자이기도 하지.”
회귀라니.
그런 능력으로 모든 걸 알면서 숨기고 이기다니.
‘사기야! 치사해!’
비겁하고 뻔뻔했다.
그러자 힐리아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비겁하다고?”
“그러면 너는?”
힐리아의 말에 미약한 양심이 찔렸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티끌만 한 찜찜함마저 떨쳐 버리기 위해 고개를 저으며 달렸다.
힐리아의 힐난에서 도망치듯.
걸음걸음마다, 자신의 비참한 몰락에 대한 기억을 한 꺼풀씩 벗어 내는 것처럼.
나는…….
나는……!
나는……?
빠르게 뛰던 걸음이 점점 멈췄다.
터덜터덜 걷다가 에반젤린이 고개를 들었다. 멍한 눈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나는… 뭐지?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곧 에반젤린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기억이 녹아 버리듯 사라지고 있었다. 하나씩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빙의 후의 기억들이 하나씩 하나씩.
힐리아가 <운명의 서>와 공명할 때 되돌아온 과거의 기억들 역시.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잃고 있었다.
전부 빼앗기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지독한 공포가 영혼을 잠식했다.
“아아악!”
에반젤린은 뒤돌아서 자신이 도망쳐 온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으로.
힐리아가 있는 곳.
<운명의 서>가 있는 곳.
운명의 진짜 주인. 주인공이 있는 곳.
그녀는 ‘에반젤린’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새로 얻은 삶이었어도 화려한 주인공이 아니었으니까. 가장 원하던 것은 얻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유신아’가 운명의 주인이라 들었을 때 뛸 듯 기뻤다.
유신아로서의 자신이 역시 진짜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에반젤린으로서의 기억과 자아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깨닫게 된다.
‘유신아’의 삶이 땅이라면, ‘에반젤린’의 삶은 그 위에 지은 건물이다.
결국 이 세상에서 그녀가 해 온 것, 얻은 것, 잃은 것은 모두 에반젤린으로서였다.
그걸 잃는다는 건 모든 걸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후회마저도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제발……!’
눈물이 넘쳐 흘렀다.
“도와줘!”
필사적으로 달렸다. 뜀박질은 곧 걷기로 변했다.
조금씩 느려지는 걸음으로 발을 질질 끌면서 그녀는 마침내 생각했다.
‘내가 뭘 하려고 했지?’
그녀는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너무나도 낯선 광경이었다.
‘뭔가… 너무 슬프고 두렵고, 꼭 부탁해야 하는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리가 아플 정도로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더더욱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 전에… 여기는 어디지?
나는, 누구야……?
‘유신아’는 지독하게 낯선 세상에 덩그러니 떨어져 버렸다.
* * *
<운명의 서>를 이용한 운명을 바꿔 쓰기와 드래곤 아르타누스가 나와 아르파드에게 준 회귀의 권능은 공통점이 있었다.
말 그대로 운명을 뒤바꾸는 힘.
그것에는 대가가 따랐다.
정당한 힘의 주인이라 해도.
아르타누스는 회귀의 권능을 대가로 거의 모든 힘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르타누스에게 회귀의 권능을 받은 정당한 후계자인 아르파드 역시 나에게 권능을 넘기고 대가를 치렀다.
그간의 모든 기억과 나와의 인연까지.
<운명의 서>와 감응한 순간,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정당한 힘의 주인이 운명을 바꾼다 해도 대가가 필요했다.
그런데 정당한 주인조차 아니었던 에반젤린이 <운명의 서>를 써서 나와 본인, 세계 전체의 운명을 뒤틀었다.
이후 내가 <운명의 서>를 손에 넣으면서 그건 모두 지워졌다.
그 대가가… 부작용이 에반젤린에게 하나도 없을까?
당연히 정당한 주인에 비해 몇 배로 강한 여파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운명의 서>는 그것을 나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운명을 바꾸려 한 대가는 크다. 운명에는 운명으로. 실패한 자격 없는 자는 자신의 운명을 잃게 된다.」
「이 상실은 <운명의 서>와 그 주인에게서 떨어질수록 가속화된다.」
「여자는 ‘에반젤린’으로서의 운명을 모두 잃었다.」
「남은 것은 자신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떨어진 ‘유신아’ 뿐.」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미아가 되어 버렸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대부분을 잃었다. 파편만 남은 셈이다.
그런 에반젤린을 구해 줄 생각은 없었다.
구하는 데에도 엄청난 대가가 필요할 터다.
지금 나는 단 한 사람을 생각하고 구해서 지킬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여력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