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아르파드의 입에서 저 말이 나왔을 때 나는 간신히 움찔하지 않을 수 있었다.
태평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야 당연히 많지. 아주 많이.”
아르파드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런 때에 모른 척하거나, 부정하거나, 시선을 피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다.
내가 숨기는 게 있다고 시인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당신이 캐묻지 않고 기다려서 줘서 정말 고마워.”
아르파드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조금 전에도 웃고는 있었으나, 미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침대 맡에 놓여 있던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신물들이 놓여 있었다.
<운명의 서>와 그 밖에 여신들의 신물인 보석들.
마지막 다섯 번째 여신의 신물만 제외하면 전부 내 손에 들어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운명의 서>까지.
이것들을 에반젤린과 비오의 손에서 빼앗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파드의 도움은 꼭 필요했다.
그 때문에 에반젤린이 갇힌 감옥의 경비를 약하게 해 덫을 만들어 두면서 아르파드에게 부탁했었다.
“에반젤린을 미끼로 대주교를 잡을 거야. 도와줬으면 해.”
지금 아르파드는 사실상 섭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의 눈을 피해 이 일을 추진하는 건 어렵다.
굳이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아르파드를 필요 이상으로 속이고 싶지는 않아.’
이건 진심이었다.
이미 속이고 있기에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를 속이지 않고, 계속 곁에 있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다.
내 감정과 욕망이 가슴 속에서 엉키며 서로 싸워댔다.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부분은 아르파드에게 솔직해지자고 마음먹었다.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계산이나 마음과는 상관없이 바라지도 않은 대답을 내놓았다.
“굳이 부탁할 필요 없어. 그냥 같이하자고 한마디만 하면 충분해.”
“…이유는 안 물어?”
“당신이 말하고 싶을 때 알려 줘.”
“…….”
“계속 뭔가 고민하는 건 모를 수가 없으니까. 고민이 끝나고 나면 말해 줘.”
단서를 하나 다는 건 잊지 않았다.
“…그래도 나에게 가장 먼저 말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당신 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
“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말해서 가슴을 찡하게 해 놓고, 막상 참지 못하고 할 말 없는지 묻는 표정은… 솔직히 말하자면 꽤 귀여웠다.
내 눈치를 잔뜩 보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만한 일들이 많았다.
아르타누스의 둥지에서부터 신물들의 일.
아니, 훨씬 이전… 내가 아르파드를 찾아가 약탈혼을 의뢰한 그때부터.
아르파드는 나와 관련된 일에서 강한 의문을 느낀 일이 많았을 거다.
‘안 그래도 예민하고 경계심 많은 사람이니까, 의구심을 많이 느끼고 있었을 거야.’
그의 태도에 대해 아니, 그의 마음에 대해 최소한의 답을 해 주고 싶었다.
입 안에서 단어를 고르고 깎아 가며 꽤 오래 고민하다가 겨우 첫 마디를 내놓을 수 있었다.
“이상하지 않았어? 진홍월 때 내가 어떻게 당신이 카타콤에 있는지 알고 찾아간 건지, 그리고 용병왕 제랄드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던 것도.”
아르파드의 눈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번졌다.
그쪽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놀라움이 아니었다.
“…그것부터 말해 줄 줄은 몰랐는데.”
우리의 첫 만남부터 갖게 되었던 근원적 의문을 먼저 건드릴 줄은 몰랐다는 것에 가깝다.
어쩌면 그는 내가 영원히 숨기려고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기대하기도 전에 이미 포기한 듯 느껴져서 더 미안해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 그때 나는 당신을 처음 만난 게 아니었어…….”
지난 3번의 회귀부터, 나는 천천히 그에게 토해 내기 시작했다.
안에 든 걸 전부 내놓으려는 것처럼.
하나하나가 전부 믿어지지 않는 일들뿐이었다. 내가 겪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법한.
그 믿기지 않는 고해들로 벽을 지어, 가장 중요한 하나만을 숨겼다.
조개가 죽기 전까지 속에 품은 진주를 놓지 않는 것처럼.
* * *
그사이.
황태자궁 밖에서는 아르파드가 미리 명한 ‘쓰레기 뒤처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오 대주교는 질질 끌려 나가며 외쳤다.
“당장 멈추지 못해?!”
그를 끌어내는 자들은 손가락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황실 기사가 자신을 끌어내는 것이라면 신권과 황권의 다툼으로 일을 키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황태자궁의 기사들과 궁인들 역시 그의 앞을 막았을 뿐, 쫓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천주신의 신관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자신을 짐짝처럼 끌었다.
대주교는 비명을 지르며 신관들의 우두머리, 반백의 머리를 가진 중년 사제에게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위포!”
위포는 비오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으나, 그보다 연배가 어린 신관이었다.
비오의 신성력이 훨씬 강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위포는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비오에게 대답했다.
“말을 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죄인이여.”
“뭐라고?”
위포는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오늘부터 대주교의 일좌를 맡게 되었으니.”
“말도 안 돼! 지금 비어 있는 대주교 좌는 없……!”
비오는 뒤늦게 깨달았다. 무슨 의미인지. 자리가 하나 비지 않은 한, 위포가 대주교 자리에 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설마… 성하께서 나를 내치신 것인가?”
“깨달음이 느리군. 그뿐일까. 파문 역시 함께 발표되었다.”
“내가 파문? 말도 안 돼! 나는 대륙 내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갖추었어! 나보다 신심이 깊은 자는 없다!”
대주교가 상관들을 제치고 신전 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근 몇 백 년 내에 다시없을 강력한 신성력의 소유자였으므로.
하지만 강한 권력으로 전횡을 일삼으면, 그만큼 반대 세력도 늘기 마련이다.
비오의 권위를 지탱하던 광적인 지지자들은 신전 붕괴 등 거듭 이어진 실패에 많이 소모되어 버렸다.
거기에 에반젤린이 잉태했던 호문쿨루스에게 신성력이 쥐어 짜졌다.
그야말로 자신이 밟고 있는 아랫돌을 계속해서 잡아 빼 온 꼴이었다.
이젠 무너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거기에 새 대주교 위포는 결정타를 날렸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친히 너를 성하께 고발하셨다.”
“뭐?”
비오의 몸이 경악으로 굳었다.
지금 그가 어떻게든 다시 얼굴을 보고, 모든 죄를 고하고 용서받기를 바라는 이가 바로 힐리아다.
그런데 그녀가 비오를 버렸다는 거다.
어느 정도 예상했으면서도 지독한 충격과 허탈감, 절망이 머리를 짓누른다.
“신관의 몸으로 신물의 존재를 숨기고, 사사로이 유용한 죄.”
힐리아는 비오가 <운명의 서>를 비롯한 여신의 신물을 상부에 알리지 않고 독점했음을 알고, 이를 고발했다.
“그것도 우리가 모시는 천주가 아니라 타신(他神)의 신물을 받들었으니, 천주신의 올바른 사제라 볼 수가 없지.”
“…!”
“게다가 너를 따르는 신관 중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자들과 순식간에 신성력을 소진하고 죽은 자들이 많은 이유 역시 알려 주셨다. 네가 그들의 신성력을 쥐어짰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건, 올바른 길을 위한 희생이었어!”
“과연 이단이나 할 법한 말이로군!”
위포는 결정적인 죄를 가장 마지막에 알려 주었다.
“아르타누아 평원 신전의 폭발 사고를 벌인 죄인이 누구인지도 말이야.”
위포는 비밀리에 자신을 불러 천주신의 신전과 거래하며 황태자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이걸 어떻게 써먹어도 좋으니, 내 아내 앞에 그자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도록 만들어.”
살기등등한 황태자의 말은 거의 협박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비오가 능력이 뛰어난 만큼 독선적으로 굴며 천주신 신전 내부에 쌓인 반대 세력이 한 번에 결집했다.
천주신의 대신전까지 끌려온 비오는 약식 이단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 받았다.
“…따라서 죄인 비오를 처형한다.”
“말도, 말도 안 돼! 성황께서는 어디 계시는 거냐?!”
흉하게 발버둥 치는 비오는 그동안 무슨 짓을 한 건지 지나치게 신성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제대로 저항할 여력도 없었다.
위포는 그를 비웃었다.
“성황께서 내게 전권을 위임하셨다. 이 의미를 모르진 않겠지.”
비오의 스승인 성황마저 그를 버렸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저항을 포기하지 못하고 버르적거리는 비오에게 위포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비오만이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황태자비께서 전해 달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다.”
“뭐, 뭐라고 하셨나?”
비오는 저항마저 잊고, 위포의 소매를 잡고 매달렸다.
조금 전 언도된 사형 명령보다, 힐리아가 전했다는 한마디가 더 중요한 것처럼.
기이한 광경이라고 위포는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황태자비를 숭배한다고?’
마치 그녀를 신처럼 여기는 듯하지 않은가.
역시 죽어 마땅한 이단이 확실했다.
위포는 냉정하게 말을 전했다.
“몇 번의 기회가 다시 온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그러니 내 증오를 가진 채로 죽어 버려.”
“…이렇게 전해 달라시더군.”
“…….”
놀랍게도 그 한마디에 추하게 버르적거리던 비오의 움직임이 멈췄다.
삶에 대한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을 빼앗긴 듯한, 텅 빈 눈.
더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냉혹한 명령이 떨어졌다.
“집행하라.”
“사도, 저는……!”
서걱!
피가 튀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한때 대주교였던 남자의 의식이 끊겼다.
* * *
3번의 회귀부터 아르타누스가 직접 보여 준 과거의 기억까지.
힐리아가 늘어놓은 비밀과 정보의 타래는 길고 길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믿기 힘든 것들뿐.
‘나라도 누가 이런 말을 하면 미쳤나 할 거야. 절대 안 믿겠지.’
아르파드는 어떻게 반응할까.
믿어 줄 거라 신뢰했으므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결과를 기다리고 있자니 더럭 불안해졌다.
불안감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있는 힐리아의 앞에서 마침내 아르파드의 입술이 열렸다.
“힐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