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아르파드는 또 다른 기억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정신을 수습했다.
힐리아를 보호해 궁으로 데려가고, 체포한 죄인들에 대해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닥친 상황은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다.
힐리아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와중에 비오 대주교가 발광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 돼! 말도 안 돼! 내가 무슨 짓을!”
피를 토하는 듯 처절한 울부짖음이었다.
그가 조용해진 건 참지 못한 아론 뮤젠이 뒤통수를 후려갈긴 뒤였다.
비오는 그대로 시체처럼 늘어졌다. 죽지는 않았으나,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손속에 사정이 없었다.
그때 정신을 차린 에반젤린의 비명이 울렸다.
“꺄악! 아악! 피가! 살려 줘!!”
그제야 주변의 시선이 에반젤린에게 모였다.
“의사, 의사를 불러 줘어―!”
에반젤린은 엉금엉금 기어 힐리아와 아르파드 근처로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뮤젠 경과 벨테인 경 선에서 저지되었다.
벨테인 경은 에반젤린이 델핀 공작가에서 힐리아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목격한 증인이었다.
게다가 에반젤린은 그와 힐리아를 엮어 불명예스럽게 재판정에 세운 적도 있었다.
그런 이를 힐리아가 의식을 잃은 지금 가까이 오게 할 수는 없었다.
벨테인 경은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물건을 보듯 에반젤린을 내려다보았다.
“내 주인의 안전을 더 더럽힐 순 없을 거다.”
지금 에반젤린은 분노나 억울함 이전에 본능적인 공포에 몰려 있었다.
수치심이나 염치는 잊고 벨테인 경에게 달라붙었다.
“살려 줘! 아파! 아악!”
에반젤린이 황실의 혈통을 임신했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배가 불러 오른 상태에서 치맛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적어도 아이의 상태는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루드비히의 아이라면 황실의 계승권을 주장할 위험성이 있으니까.
아르파드의 눈짓을 받은 시녀들이 다가가 에반젤린의 상태를 살폈다.
곧 그들 중 임신 및 출산 경험이 있는 여인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이미 유산된 상태인 듯합니다.”
“유산?”
“예. 그런데…….”
유부녀 출신 중 가장 나이 든 하녀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르파드가 자세히 고하라 명하자, 그녀는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유산된 태아와 태반이 보이지 않습니다.”
황궁에서도, 신전의 폐허에서도 꽤 떨어진 황도 구석의 거대한 하수도 안.
오수 속에서 무언가 검붉은 것이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그것은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긴 관 아래쪽에서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마탑주 가스팔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 혹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듯 부정형의 검붉은 덩어리를 보았다.
그가 팔뚝만 한 플라스크를 내밀자, 안으로 검붉은 것이 후드득 떨어졌다.
가스팔은 마력으로 플라스크 안의 귀중한 실험체 상태를 확인했다.
“나쁘진 않구나. 덕분에 신성력은 꽤 비축했고.”
대주교는 에반젤린에게 늘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퍼붓곤 했다.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 때로는 몸이 좋지 못해서, 심지어는 기분이 안 좋아서.
그렇게 과도하게 퍼부어진 신성력을 ‘이것’은 에반젤린의 체내에서 충분히 축적할 수 있었다.
“좋아. 그러면…….”
마탑주는 위험스레 웃은 뒤 플라스크를 갈무리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근래 황궁은 활기로 가득했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양위하겠다 선포한 뒤 권력 역시 나누어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찬탈이나, 황제가 아들을 의심해서 시험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양위였다.
분위기는 아주 평화로웠고, 화기애애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황궁 내 분위기는 지극히 부드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작고 난처한 소란이 황태자궁 앞에서 벌어졌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비 전하께서는 알현을 거절하셨다지 않습니까!”
“만나 뵙게 해 주시오! 제발! 그분을 뵙고, 제대로 사죄를……!”
대주교의 앞을 막아선 황태자궁 궁인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건 측근 시녀인 애니였다.
그녀는 차갑게 대꾸했다.
“비 전하께서는 대주교께 받을 게 없다 하십니다. 이후로도 뵙지 않기를 바라신다고요. 하니, 돌아가십시오.”
“…!”
지금 대주교의 꼴은 엉망이었다.
늘 순백색으로 성스럽게 빛나던 신관복은 지난밤 에반젤린을 탈출시키고 신전 터에서 바닥을 구르느라 걸레 꼴이었다.
귀부인들이 늘 감탄할 정도로 곱고 반질거리던 밤색 긴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다.
아르파드는 돌아오는 길에 부러 비오를 황궁 앞에 내던져 두었다.
깨어나자마자 힐리아에게 달려와서 난리를 피울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신전 폐허에서 한 것처럼.
아르파드의 예상대로 그는 눈 뜨자마자 황태자궁으로 달려왔다.
사도를 만나는 것만 생각하느라 제대로 치료도 하지 못해 걸레가 된 옷에는 피까지 얼룩져 있었다.
누가 봐도 기겁할 만한 꼬락서니.
대주교가 그 꼴 그대로 황태자궁 앞에 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보다 더 죄인에게 어울리는 꼴은 없다.’
그는 황태자궁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비, 그의 사도가 있는 방향을 향해.
당연하지만 황실 기사들과 궁인들은 그를 절대 황태자궁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꺅! 저, 저거 뭐예요? 왜 저런 게 황궁 안에 있죠?”
“세상에, 저는 거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얼굴이 꽤 익숙한… 어머, 세상에! 저 사람, 비오 대주교 아니에요?”
“어? 정말!”
워낙 사람의 눈이 많은 곳이라, 비오 대주교가 엉망이 되어 황태자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는 건 곧 화제가 되었다.
아르파드가 원한 대로.
모두가 의문스러워하며 속닥거렸다.
“왜 대주교가 황태자궁 앞에서 저러고 있는 거야?”
“게다가 황태자비 전하를 찾는다며?”
“대주교는 루스 영애 쪽 사람 아니었나?”
“게다가 내가 듣기로 어제 죄인을 지하 감옥에서 꺼내 탈출시키려다가 사고가 나서 아이까지 유산되었다던데…….”
안 그래도 에반젤린의 배 속 아이는 황태자가 아닌 루드비히의 아이라고 암암리에 결론이 난 터였다.
그렇다면 황실의 핏줄이 맞긴 한 셈이니, 차후에 황위 계승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황후나 에반젤린에게 원한이 있는 이들은 차라리 잘됐다며 악담을 했다.
에반젤린은 황태자비의 마지막 배려로 황궁 구석에서 궁의에게 치료받고 있다는 소식이 끝이었다.
에반젤린에 대해 더 궁금해하는 이도, 찾아가 보려 하는 이도 없었다.
지금 황태자궁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대주교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주교는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부디… 저는 속았던 것뿐입니다. 사도이시여, 마지막으로 기회를…….”
천주신의 신전은 대륙의 모든 신전 중 가장 세가 강한 곳이었다.
그 천주신의 대주교 정도 되는 위치면, 위에 두 명의 추기경과 성황 외에는 모실 이가 없었다.
신에게 일생을 바쳤기에 황제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특권 역시 가진 존재.
그런 이가 황태자비를 향해 저렇게 무릎 꿇고 비는 광경은 단연 이색적이었다.
실질적으로 대주교는 자신이 섬기는 신의 사도에게 무릎 꿇고 죄를 빌고 있는 것이나, 영문을 모르는 자들 눈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보였다.
그동안 황실과 비밀리에 대립각을 세워 왔던 천주신의 신전이 황태자비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설마 이제 와서 황태자비께 빌어 보려는 거예요?”
“재판 때 루스 영애 곁에 대주교가 있는 걸 분명히 봤었는데…….”
“뻔뻔하기도 해라.”
흰 눈을 뜨는 이들이 많았다.
대주교가 처참한 꼴로 경배를 올리고 있는 당사자, 힐리아는 조금의 감상도 느끼지 못했다.
힐리아는 커튼 틈새로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며 눈을 찡그렸다.
아르파드나 신하들의 걱정과 달리, 힐리아는 황궁으로 돌아온 직후 바로 정신을 차렸다.
궁의에게 건강상 문제가 없다는 것도 이미 확인받았다.
하지만 힐리아가 쓰러지는 걸 본 아르파드는 오늘 하루는 정무를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바로 곁에 붙어서 힐리아의 상태를 섬세하게 확인 중이었다.
“…괜찮아?”
아르파드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힐리아는 부러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응. 걱정 마. 쌩쌩하다니까. 당신에게도 말했잖아. 생소한 힘을 처음 써 봐서 몸이 놀란 거야.”
아르파드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의문스럽고 또 묻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녀가 쓴 신물의 힘은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지난밤 자신이 갑자기 떠올린 기억은 대체 무엇인지. 힐리아가 이에 대해 알고 있는지도.
아르파드는 망설였다.
이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힐리아 앞에서는 늘 답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된다.
창가에서 커튼 틈새를 바라보고 있는 힐리아의 옆모습이 너무나도 씁쓸해 보였다.
‘당신은 왜 이렇게 비밀이 많을까. 늘 나에게는 다 말해 주지 않지.’
어쩌면 이건 아직도 아르파드가 힐리아에게 제대로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아르파드는 망설임 끝에 겨우 결심할 수 있었다.
아내의 옆으로 다가가 창문의 커튼을 닫아 밖에서 비는 중인 남자의 모습을 가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평온한 척 힐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당신은 종종 내가 얼마나 질투 많은 남편인지 잊는 것 같아.”
“갑자기 무슨 말이야?”
보랏빛 눈동자가 둥그레지는 것을 아르파드는 더없이 사랑스럽게 보았다.
“다른 사내에게 아내의 시선을 빼앗긴 남편의 질투를 이해해 달라는 소리야.”
잠시 긴장으로 굳었던 힐리아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보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당신,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