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칼이 꽂혔음에도 대주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통각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처럼.
아르파드는 혀를 차더니, 손등을 관통한 칼을 뽑아낸 다음 대주교를 발로 걷어찼다.
“큭!”
비오 대주교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몇 미터나 뒤로 날아가 데굴데굴 굴렀다.
그는 무릎을 꿇고 대주교가 건드린 내 치맛자락을 툭툭 털어 주었다.
“내 귀한 아내의 깨끗한 옷에 더러운 게 묻었군.”
“고마워요.”
아르파드 덕분에 방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운명의 서>에 집중했다.
이것은 강대한 힘을 가진 신물, 작게는 사람의 운명부터 이 세계의 흐름까지 간섭하는 힘의 결정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정당한 주인이었다.
이 책을 손에 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척추에 벼락이 친 듯한 감각을.
마치 하나의 세계가 내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듯한 압도적인 감각이었다.
이것과 비슷한 감각을 나는 느껴본 적 있었다.
‘아르타누스가 나에게 과거의 진실을 보여 줬을 때와 유사해.’
세계 그 자체에 새겨진 기억을 보여 주는 것.
그때와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아르타누스 때는 그저 무력하게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면, 지금은 직접 손을 댈 수 있을 것 같았다.
‘에반젤린이 회귀 전 했던 것처럼.’
내가 진짜 <운명의 서>의 주인이라면…….
나는 집중했다. 의식을 뾰족하고 예리하게 세워 책 속을 파고드는 느낌으로.
‘열쇠가 되는 다섯 여신의 신물이 다 갖춰지지 않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어.’
신물의 힘과 내 의식이 강하게 연결된다.
그와 함께 내 의지를 따라 책의 페이지가 끝없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세 번의 회귀.
그리고 이어진 지금의 삶.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희디흰 페이지가 연이었다.
미래에 해당하는 시간대라 백지인 모양이다.
흰 페이지 사이에서 헤매던 나는 마침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덩그러니 새겨진 문장 하나를.
「힐리아는 아르파드의 심장을 찔러 죽임으로써 완전하게 하였다.」
신성언으로 쓰인 문장은 다른 글자들과 다르게 희미한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역시 아르타누스의 용언(龍言) 마법이 내가 그를 죽이는 미래를 고정해 놓은 거야.’
이 붉은빛은 아르타누스가 쓰던 마력과 같은 색이었으니까.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새삼스레 아르타누스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도마뱀 따위에게 분노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쩌면 <운명의 서>는 아르타누스의 저주를 깰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니까.’
에반젤린은 이 책의 문장 하나를 고쳐 쓰는 것으로, 내 존재를 지우는 데 성공할 뻔했다.
아르파드가 회귀의 권능을 내게 옮기지 않았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챈 아르파드는 잠자코 내가 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내가 손을 깨물어 피를 내자 참지 못하고 외쳤다.
“힐리아!”
나는 아르파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
내 간절하고 굳은 의지를 본 아르파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났지만, 곁에 서 있는 것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바로 개입할 수 있도록.
나는 손에서 나온 피로 <운명의 서>에 쓰인 아르타누스의 저주를 지웠다.
그리고 신성언으로 새로운 문장을 써넣었다.
「힐리아는 아르파드를 죽이지 않았다.」
<운명의 서>에 그 문장이 고정되어 성공한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 새로 써넣은 글자들이 빛을 내며 무너졌다.
곧 고쳐 쓴 문장은 아르타누스의 붉은 마력에 감싸인 채 원래의 것으로 돌아갔다.
내가 아르파드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저주스러운 문장으로.
“…!”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참은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입에서 피를 토해서지.
“힐리아!!!”
<운명의 서>를 손에 넣자마자 과도한 힘을 쓴 대가였다. 거기에 운명을 바꿔 쓰려다 실패한 여파까지 겹쳤다.
의식이 까맣게 물드는 너머로 경악과 불안을 가득 안은 아르파드의 얼굴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나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도마뱀…….”
* * *
아르파드는 쓰러지는 힐리아를 안전히 붙잡을 수 있었다.
밤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힐리아의 몸에서 환하게 비추던 빛이 갑자기 사라졌다.
허공에 뜬 채 힐리아의 주변을 보호하듯 둥둥 떠 있던 여신의 신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툭, 투둑.
보석들은 빛을 잃고 힐리아의 주변에 떨어졌다.
“비 전하!”
“힐리아 님!”
“괜찮으신 겁니까?!”
사방에서 의식을 잃은 힐리아에 대한 걱정이 터져 나왔다.
그중 가장 먼저 힐리아를 걱정해야 할 아르파드는 잠시 굳었다.
쓰러지는 아내를 끌어안은 순간, 정체 모를 기억들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찔러 왔기 때문이다.
“난 당신이 싫다고! 납치 피해자가 가해자를 좋아하게 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약탈혼이라니, 야만적이야!”
“아르파드, 사실 나는…….”
머릿속에 없는 기억들.
그럼에도 거짓이라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억의 파편들이었다.
기억만이 아니라 겪은 순간의 감정들까지 선명하게 가슴에 틀어박혀 왔다.
아르파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비슷하게 굳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에반젤린과 비오 대주교.
이 두 사람은 아르파드와는 다른 기억들을 경험했다.
힐리아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회귀 전의 기억들이었다.
에반젤린은 갑작스레 쏟아지는 두통에 비명을 질렀다.
“윽……?”
그녀는 <운명의 서>를 들고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아하! 아하하하! 내가 진짜 주인공이야!”
<운명의 서>를 펼쳐 문장 하나를 자신의 피로 뭉개고 바꿔 쓴 뒤였다.
책에 남은 얼룩 같은 문장은 에반젤린이 본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것과 색이 다르고 삐뚤빼뚤한 한글로 쓰인 문장.
대주교 역시 유사한 두통을 느꼈다.
기억들이 송곳이 된 것처럼 그의 뇌리를 후벼 팠다.
힐리아의 회귀가 있기 전에 비오는 뒤늦은 참회를 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처럼.
“저 가짜에게 속아 진짜 사도인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아, 부디, 부디 용서를…….”
이후 비참하고 끔찍한 첫 회귀를 경험하고, 신전으로 숨어든 힐리아도 보았다.
그녀는 처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준 비오에게 너무나도 감사하며 진실된 신뢰와 애정을 보여 주었다.
“전부 대주교님 덕분이에요. 신전에 보호를 청하면서도,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거든요.”
“대주교님, 사실 저는 시간을 거슬러 돌아오는 경험을 했어요…….”
진짜 사도가 그를 믿고 의지하며, 남들에게는 차마 고백하지 못할 비밀을 토해 놓았었다.
신뢰를 부숴 버리고 배신한 건 자신이었다.
배신당한 힐리아가 상처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 처음부터 날 도와주려던 게 아니라 에반젤린의 편이었……!”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신 따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사람은 없어요.”
최악의 방법으로 그녀의 신뢰를 배신했다.
그녀에게 고문에 가까운 고통을 주었다.
마지막에 그 숨통을 끊으라 명령한 것도 그였다.
“이제는 쓸모도 없고, 그 여자에 대해 기억하는 이들도 없지. 쓰레기를 치우기엔 적절한 때다.”
비오의 명령에 따라, 신관들이 힐리아를 자살한 것으로 위장하여 목 졸라 죽였다.
“…헉!”
뇌를 후비는 고통 속에서 비오는 겨우 눈을 떴다.
그가 알아보지 못했고, 배신하여 죽였던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마땅히 찾아내고 지켜서 신들의 뜻을 구현해야 할 ‘진짜 사도’가.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너무나도 때늦은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