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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71화 (171/210)

171화

“큭, 안 돼!”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몸을 일으킨 비오 대주교는 힐리아의 손에 <운명의 서>가 들어간 것을 보고 경악했다.

“감히 사도도 아니면서 신물에 손을 대다니!”

제 몸 상태조차 신경 쓰지 않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신관 중에서도 신성력을 공격계로 바꾸는 힘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다.

당대에는 비오 대주교 하나뿐이었다.

“죽어라!”

그가 목숨까지 깎아 가며 빚어 낸 신성력 화살이 힐리아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쩡―!

강력한 마력의 칼날이 신성력의 화살을 모조리 부숴 버렸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며, 대주교는 다시 한번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오러를 휘둘러 비오 대주교의 공격에서 힐리아를 지킨 것은 당연히 아르파드였다.

그의 손목에 감긴 아그리피나의 눈물이 유달리 반짝거렸다.

“내가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데 아내를 해하려 하다니. 악랄함으로도, 멍청함으로도 신을 모시는 몸이라고는 믿을 수 없군. 천주신의 신전은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대주교의 좌를 채우는 건가?”

대주교는 피를 토하면서도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았다.

무릎이 당장에라도 꺾일 듯 부들거렸지만, 정신력만으로 버텨 내며 아르파드와 힐리아를 노려보았다.

“더럽혀진 피를 가진 짐승의 찌꺼기 따위가……!”

모욕적인 말이지만, 아르파드는 코웃음 칠 뿐이었다.

그저 자상하게 힐리아의 상태만을 살피기 바빴다.

“괜찮아?”

“걱정 말아요. 당신이 막아 줬잖아요.”

힐리아는 아르파드에게 웃어 보인 뒤 대주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운명의 서>를 쥔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당신은 이 신물의 주인이 에반젤린이라 믿은 모양이지?”

“…?”

예상 못 한 질문에 대주교는 당혹스러워했다.

‘뭐지? <운명의 서>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 어떻게?’

천주신의 신전 내에서도 <운명의 서>에 대해 아는 이는 매우 적었다.

아니, 지금 살아 있는 이들 중에 <운명의 서>에 대한 걸 아는 자는 비오와 에반젤린 뿐이다.

적어도 비오 대주교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힐리아가 운명의 서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대주교의 의문은 다음 순간 해결되었다.

힐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책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운명의 서>를 중심으로 눈부신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공명음이 울렸다.

웅― 우웅―, 웅, 우우웅―!

한 곳에서만 울리는 게 아니었다.

총 네 곳에서 서로 미묘하게 다른 공명음이 울리며 중첩된다.

대주교는 경악했다. 네 개의 공명음 중 둘이 그의 품속에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러지지 않은 왼손으로 품속을 뒤져 가장 안쪽에 소중하게 넣어 둔 두 개의 신물을 꺼냈다.

모르페네이아의 거울과 데스포이나의 씨앗.

두 신물이 각자 검은색과 녹색의 빛을 내뿜으며 공명하고 있었다.

<운명의 서>에서 퍼트려지는 울림에 대답하듯이.

다른 두 개의 공명음은 두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타틸리아의 별을 손에 끼고 있는 힐리아와 아그리피나의 눈물을 손목에 걸고 있는 아르파드.

네 여신의 신물과 <운명의 서>, 이 다섯 가지 신물은 다른 색의 빛과 파동을 뿜어냈다.

이것들은 절묘한 화합을 이루며 어우러졌다.

마치 더없이 성스러운 성가와도 같은 울림을 자아낸다.

이 현상 앞에서 대주교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말도, 말도 안……!”

그의 손에서 굴러떨어진 두 개의 신물은 빛을 내뿜고 공명하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힐리아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 주인에게 향하듯이.

힐리아는 천천히 낡은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빛바래고 삭아 언제 부서질지 불안하던 책이 새것처럼 변했다.

새하얗고 깨끗한 종이 위로 신성언이 금빛으로 빛나며 새겨졌다.

이전과 달리 완전한 단어와 문장의 형식이 이뤄졌다.

파라락―!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더니 한 페이지에 멈췄다.

거기엔 다른 글자들과 달리 이질적인 문장이 한 줄 적혀 있었다. 검붉은 색의 한글로 삐뚤빼뚤 쓰인 문장.

「‘책’을 읽은 ‘유신아’가 그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났다.」

글자 하나하나가 신성하게 빛나는 다른 문장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전의 에반젤린이 한글로 고쳐 쓴 것이었다.

이를 읽어 주는 것으로 비오 대주교의 앞에서 자신이 의심의 여지 없는 ‘사도’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검붉은 색의 글자들은 신성언의 빛에 천천히 사라졌다. 빛을 이기지 못한 그림자처럼.

<운명의 서>는 그 어느 때보다 완전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진정한 주인의 앞이 아니면 그럴 수 없다.

대주교는 경외감 어린 눈빛을 한 채 성스러운 빛에 둘러싸인 힐리아를 향해 무릎으로 기어갔다.

“사도, 이십니까?”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에반젤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대주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비오! 정신 차려요! 속지 말라고요! ‘유신아’는 나라고, 당신의 사도도……!”

이미 빛에 눈이 먼 대주교에게 에반젤린은 밝은 불빛에 달려드는 나방보다 귀찮은 존재였다.

“꺼져!”

비오 대주교는 전에 없이 차가운 태도로 에반젤린의 손을 쳐 냈다.

에반젤린은 그대로 꼴사납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꺄악!”

대주교는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 힐리아의 발치에 이르렀다.

더없이 경건한 태도로 힐리아의 치맛자락을 잡고 거기에 키스하려 했다.

“사도시여…….”

그의 눈빛은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와 애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에반젤린이 대주교의 사도였던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심으로만 가득한 눈이었다.

‘나를 보고는 저런 눈빛, 한 번도 한 적 없었잖아!’

사도라고 부르며 위해 주는 척하면서도 눈빛 가장 깊은 곳에는 알 수 없는 싸늘함이 남아 있었다.

경외하고 숭배하는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쓸만한 도구를 보는 듯한 시선.

거기에 늘 경멸이 어려 있었다.

에반젤린은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에게 사도로도 숭배받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지금의 힐리아와 달리.

쩌적,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세상은 얇은 유리 위에 위태롭게 세워진 것이었다.

발밑이 부서지기 시작하자, 기반 없이 쌓아 올린 모든 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아득한, 끝없는 절망이 에반젤린을 삼켰다.

순간, 에반젤린은 지독한 통증이 배를 찌르는 걸 느꼈다.

“윽! 아윽!”

저도 모르게 바닥을 긁다가, 이상하게 손끝이 축축하다는 걸 깨달았다.

에반젤린은 더듬더듬 치맛자락을 매만졌다.

힐리아와 신물을 중심으로 퍼지는 빛은 꽤 강렬했고, 덕분에 주변의 실루엣만이 아니라 세세한 형태와 색까지 알아볼 수 있었다.

에반젤린은 치맛자락을 물들인 게 불길한 검붉은 액체라는 걸 눈치챘다.

“…!”

* * *

두 번째 삶에서 대주교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직도 제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니, 참회가 부족한 모양이군요.”

“당신, 처음부터 날 도와주려던 게 아니라 에반젤린의 편이었……!”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신 따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사람은 없어요.”

그때 나는 대주교를 진심으로 믿고 따랐었다.

회귀 사실마저 고백할 정도로.

하지만 신뢰는 최악의 배신으로 보답받았을 뿐.

그런 그가 이번에는 나를 ‘사도’라 부르며 기어 와 내 옷자락에 키스하려 했다.

지독한 혐오감이 치솟았다.

나를 ‘사도’라 부르며 경의를 표하는 그를 이미 본 적 있었다.

아르타누스가 보여 준, 내 회귀 이전의 생에서 있었던 일.

에반젤린이 <운명의 서>를 고쳐 써서 내 존재를 지워 버리려 하기 전.

그는 에반젤린에게 속았다며, 나에게 사죄했었다.

같은 일이 또 반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감정은 천지 차이였다.

분노를 넘어 지독한 역겨움이 치솟았다.

나도 모르게 힘을 주어 대주교의 손가락에 잡힌 내 옷자락을 잡아 뺐다.

“날 사도라고 부르지 마. 싫어. 끔찍해.”

“!”

광기 어린 기쁨과 희열로 빛나던 비오 대주교의 회색 눈동자가 일순 어둠으로 물들었다.

태양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 버린 듯한 절망감이 그를 가득 채우는 것이 보였다.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두려움이나 위협을 느껴서라기보단,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 감정은 비오 대주교에게 제대로 전달된 듯했다.

신으로부터 버려져 절망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다.

그는 처절하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응달의 식물이 햇볕을 찾아 줄기를 뻗는 것처럼.

이는 용납되지 않았다.

푹!

아르파드의 칼날이 용서 없이 대주교의 손등을 꿰뚫었다.

그의 붉은 눈에 살기가 돌았다.

“힐리아가 싫다고 했잖아. 귓구멍도 막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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