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에반젤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했다.
힐리아가 알려 준 까마득한 절망에 사로잡혀 넋을 놓고 있었던 여파였다.
너무 도망치고 싶어서, 이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꿈을 꾸는 건가?
철상 사이로 대주교가 손을 밀어 넣어 신성력을 몸에 퍼부은 다음에야 상황을 인식할 수 있었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비오 대주교?”
에반젤린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는 걸 깨닫고, 비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여기에?”
“나름대로 황궁에 제가 심어 둔 이들이 있으니까요. 그것도 지금 일로 전부 소모했지만 말입니다.”
경로가 드러난 간자는 의미가 없어진다.
“괜찮습니다. 사도시여. 제가 반드시 구해드릴 테니까요.”
그때 에반젤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기쁨이나 희망이 아니었다.
불안감.
“내가 ‘원작’의 주인공이고, 너는 그 자리를 빼앗으려는 조연에 불과하다는 걸.”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운명의 서>에 쓰인 유신아가 자신이 아니라 힐리아를 가리키는 거라면…….
“왜 그러십니까, 사도시여?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대주교가 절대적으로 따르는 사도는 결국 힐리아라는 말이다.
<운명의 서>의 주인공.
다섯 여신이 엮어 낸 운명의 주인.
에반젤린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비참하고 끔찍한 자각 후에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하나였다.
‘절대, 절대로 대주교가 그 사실을 알게 하면 안 돼.’
이 꼴이 된 자신을 구하러 달려와 준 유일한 사람이다.
비오 대주교마저 힐리아에게 빼앗긴다면, 그녀에겐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 버릴 것이다.
“아냐, 아니. 아니야. 아까 힐리아가 와서 저주를 퍼붓고 간 충격 때문에 그래.”
대주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반젤린을 바라봤다.
평소는 물론 지금의 에반젤린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나, 대주교의 시선에는 근본적으로 싸늘한 면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도의 이미지에 에반젤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그때마다 비오 대주교가 떠올린 인물은…….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어차피 사도가 아닌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그것도 짐승의 혈통에게 반해, 그 옆에 선 여자.
그 여자가 보이는 당당함과 총명함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이 갔던 건 사실이다.
에반젤린의 부족함을 볼 때마다 비교하게 된 것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에반젤린은 신이 선택한 사도, 그가 원하는 세상을 구현해 줄 도구였다.
‘어쩔 수 없지. 신이 택한 사도라도 완벽할 수는 없으니.’
그런 만큼 더더욱 그의 지도와 도움이 필요할 터였다.
지금은 처참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으니 더더욱.
비오 대주교는 황궁 안에 남은 간자 모두를 소모해서 간신히 손에 넣은 열쇠로 에반젤린을 감옥에서 꺼냈다.
무거운 몸으로 너무 고생한 데다, 심신이 쇠약해져 그녀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비오는 겨우 며칠 사이에 더 커진 듯한 에반젤린의 배를 불안한 눈으로 보았다.
“배 속 아이는 괜찮으신 것 같습니까?”
“아파.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꿈틀거리고, 배가 아파서…….”
지금 에반젤린의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황족의 혈육과 드래곤 하트를 기반으로 마탑주의 마력과 그의 신성력을 넣어 만들어 낸 호문쿨루스다.
제대로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나기만 한다면 최초로 드래곤의 피를 이었으면서도, 신성력을 품은 존재가 될 거다.
‘저게 남아 있는 한 기회는 있어.’
아니, 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자면 비오 대주교의 믿음 가장 깊은 곳에는 <운명의 서>가 있었다.
인간을 창조한 신들의 신물.
세상이 결국은 신의 질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증거물과도 같은 것.
호문쿨루스를 내세우고, 사도인 에반젤린을 통해 <운명의 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그들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비오 대주교는 그렇게 확신했고, 아프다고 끙끙거리는 에반젤린을 그 말로 달래 가며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황궁 내에는 마력을 지배하는 황족들의 간섭이 심하다.
그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나 신관이 철저한 준비를 해 와야만 황족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순간 이동이 가능했다.
비오 대주교는 그 드문 인재 중 하나였다.
물론 그 역시 신물의 지원을 받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쨌건 비오 대주교는 에반젤린을 안은 채, 지하 감옥 안에서 사라졌다.
* * *
에반젤린은 발버둥 쳤다.
“아윽! 아파! 아프다구우!”
어린애처럼 칭얼거리며 대주교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그는 에반젤린을 데리고 수도 외곽의 작은 신전으로 순간 이동한 상태였다.
이것만으로도 신성력의 소모가 컸는데, 에반젤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바닥까지 닥닥 긁어 가며 에반젤린에게 신성력을 퍼부었다.
하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자, 진정하십시오.”
“의사! 의사를 불러와!”
“지금은 의사를 데려올 수가 없습니다.”
“대체 할 수 있는 게 뭔데?!”
에반젤린은 황실의 혈통을 바꿔치기하려 한 반역 죄인이었다.
비오 대주교는 그 죄인을 도망시킨 또 다른 죄인.
지금 그들은 한가하게 의사를 불러 치료받게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대주교는 에반젤린을 달래며 작은 신전의 지하로 향했다.
에반젤린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여긴 <운명의 서>의…….”
“맞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운명의 서>는 가져가야 하니까요.”
에반젤린은 깨달았다.
지금 대주교는 그녀와 <운명의 서>를 가지고 도망치려 하는 것이다.
“그거, 늘 여기 놔둬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최대 한두 달은 괜찮습니다. 물론 원래 위치인 이 신전 안에 보관된 상태가 아니면 해독도, 신력을 옮기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요.”
에반젤린는 불안감을 애써 눌렀다.
‘괜찮을까? <운명의 서>랑 대주교와 함께 움직이면서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이 가짜 사도라는 걸.
‘절대 들키면 안 돼. 내가 아니라 힐리아라는 걸 알면, 이 인간은 날 짐짝처럼 버릴 거야.’
게다가 근본적으로 꺼려지는 부분도 있었다.
‘너무 힘들고 아파. 지금 내 몸 상태로 어떻게 도망치라는 거야?’
대주교가 <운명의 서>를 꺼내 온 뒤 미리 준비해 두었는지 짐을 실은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그걸 보고 에반젤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보고 이 말을 타고 움직이라고?”
“예. 한시가 급합니다. 감옥이 빈 걸 언제 들킬지 모릅니다.”
대주교는 당연히 에반젤린이 자신의 말에 따르리라 생각했다.
상식과 머리가 있다면 그래야 한다는 걸 알 테니까.
다 죽어 간다 해도 일단 최대한 황궁에서 멀어져 숨은 뒤에 몸을 살펴야 맞는 상황이다.
그런데 에반젤린은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한 은인 앞에서 투정을 부렸다.
“마차는? 마차를 가져오기 전에는 나는 못 가!”
“사도시여!”
“애초에, 내가 말을 탈 줄 아는지부터 확인했어야 하는 거 아냐? 말을 타지도 못하는데, 게다가 이 몸으로 어떻게 가?!”
“…….”
대주교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에반젤린을 달래기 시작했다.
“하면 저와 함께 타시죠. 제가 떨어지지 않도록 잡아드리겠습니다.”
에반젤린은 툴툴대면서도, 어쩔 수 없이 대주교의 품에 안겨 말에 올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핑―!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푹! 검게 칠해진 짧은 화살이 말의 다리에 박혔다.
히히힝! 놀란 말이 마구 날뛰었다.
당연히 말 잔등에 타고 있던 두 남녀는 그대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아악!!”
“큭!”
그나마 에반젤린은 대주교가 온몸으로 안고 보호해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말에서 떨어진 충격은 그들이 쉽게 움직일 수 없게 했다.
화살에 맞지 않은 다른 말이 놀라 달아나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아픔과 충격을 삭이기 위해 바르작대고 있는 그들의 곁으로 평온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에반젤린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하는 배를 안고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살려, 살려 줘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이 사람뿐이었다.
“제발…….”
다행히 누군지 모를 사람은 지금 에반젤린의 꼴을 불쌍히 여긴 모양이었다.
마주 잡아 오는 손이 아주 따스하고 고왔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에반젤린의 코끝을 스쳤다.
“어?”
최근에 아주 가까이서 맡아 본 적 있는 향기다.
에반젤린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나타나 손을 잡아 준 이가 누구인지 마침내 보았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달빛 아래 부드럽게 빛났다.
이 순간, 에반젤린은 힐리아의 저 여유 넘치는 미소가 이다지도 소름 끼칠 수 있다는 걸 새삼 절감했다.
손을 빼 보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다. 힐리아가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힐리아의 산호색 입술이 벌어지며 절망적인 단어들이 모여 에반젤린을 짓눌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쳐 온 곳이 겨우 여기니?”
“어떻게, 어떻게……?”
힐리아는 에반젤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론 뮤젠이 쓰러진 대주교의 몸을 뒤져, 커다랗고 네모난 것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몸을 돌렸기 때문이다.
동시에 에반젤린의 손도 놓았다.
에반젤린은 다시 한번 꼴사납게 바닥으로 엎어져야 했다.
누구도 쓰레기처럼 바닥을 구르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힐리아는 비단 천을 풀어내 그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그래. <운명의 서>가 맞군.”
“!”
에반젤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설마, <운명의 서>를 손에 넣으려고 날 잠깐 놔줬던 거야?!’
때늦은, 그리고 절망적인 예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