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에반젤린은 발악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주먹으로 철장을 내리쳤다.
손등과 손가락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터졌지만, 당사자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쾅!
어찌나 거칠게 손을 휘둘렀는지 얼굴에까지 피가 튀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피가 섞여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비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으나, 에반젤린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기엔 내가 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에반젤린이 광기에 가깝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외쳤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가 뭘 제대로 알고 그따위 말을 해? 감히 나에게?”
에반젤린의 분노 앞에서 평온을 유지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면서 되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내가 정말로 끝까지 모를 줄 알았니?”
“…?”
“내가 ‘원작’의 주인공이고, 너는 그 자리를 빼앗으려는 조연에 불과하다는 걸.”
“웃, 웃기지 마!!!”
에반젤린은 피를 토할 기세로 소리를 질렀다.
철장을 마구 내려치다가 손톱이 부러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진짜 주인공이야!”
피 묻은 손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발악했다.
“나는 너 따위와는 달라! 시키는 대로만 하고, 남자에게 매달리고 의지하면서 울기만 하던 너랑 나는 다르단 말이야! 난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어! 그렇게 해 왔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황당했다.
“내가 뭘 시키는 대로만 하고 남자에게 매달려 울기만 했다는 거지? 그런 기억이……!”
말하다 보니 감이 오는 부분이 있었다.
“결혼식 전날까진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지만… 아! ‘원작’ 주인공 힐리아를 보면서 네가 그렇게 생각했나 봐?”
“…!”
에반젤린의 눈이 홉뜨였다.
방금 그녀가 나에 대해 늘어놓은 험담은 조금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1차원의 납작한 화면 속 텍스트 속에 그려진 ‘캐릭터’를 두고 할법한 묘사였다.
마치 책 속 캐릭터를 내려다보며, 자신은 다르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말과 같은.
“어쩌지? 하찮은 캐릭터 따위에게 이렇게 밀려서?”
내 말에 에반젤린이 치가 떨릴 정도로 싫어할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무릎을 굽힌 다음, 에반젤린과 시선을 맞춘 뒤 물었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날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말이야. 어떻게 내가 용의 일식이 일어날 걸 알았을지…….”
“…!”
“그리고 네가 뮤젠 공작 부인의 알레르기를 어떻게 이용할지 알고 대응했을까? 왜 아론 뮤젠이 빨리 소드 마스터가 되었을까. 그밖에도 이상한 게 너무 많았을 텐데.”
하얗게 굳은 얼굴로 나를 빤히 노려보던 에반젤린이 물었다.
“내가 왜 몰라? 네가 한국어를 말할 줄 아는 걸 보고 확신하긴 했어.”
“그래? 나는 네가 좀 더 일찍 깨달을 거라 예상해서 좀 놀랐었거든.”
“그전부터 이미 의심하고 있었다고!”
에반젤린이 콱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너도 빙의자인지 말이야!”
‘빙의자’라는 말을 내뱉은 순간, 에반젤린은 스스로 뭔가 깨달은 듯했다.
이유 모를 웃음이 짙게 피어올랐다.
“혹시 빙의자가 맞다면, 그게 내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힐리아의 인생도, 이 세상도 결국 진짜 ‘네 건’ 아니라는 거니까!”
에반젤린의 표정에 떠오른 희열이 더더욱 짙어졌다.
“나야! 역시 내가 틀림없어! 내가 ‘힐리아 델핀’이 되어야 했는데. 네가 내 몸을 빼앗은 거야!”
갑작스러운 에반젤린의 자신감을 나는 뒤늦게 이해했다.
‘아, 그러니까 우리 둘이 육체가 바뀌어서 빙의했다고 생각한 거구나.’
그러니 되돌릴 수도 있을 거라고.
주인공인 내 몸을 차지해서, 본인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진 모양이다.
내 예상이 맞다는 걸 이어진 에반젤린의 발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내놔! 내가 ‘유신아’야! 그렇다면 힐리아가 되어야 하는 건 나잖아! 이런 패배자의 몸은 너에게나 어울려!”
쾅쾅쾅!
조금 전보다 몇 배로 강하게 철장을 후려쳤다. 피가 내 치맛자락에 튈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잠시 내가 웃고 있자니 에반젤린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왜 나도 빙의자일 거라고 생각해?”
“뭐? 하지만 방금 네가…….”
“난 내가 빙의자라고 한 적 없어. 왜냐면 빙의자가 아니니까.”
에반젤린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마치 시체처럼 하얗게 굳은 얼굴을 향해 빙그레 웃어 주며 물었다.
“왜? <운명의 서>에서 그 내용은 못 봤니?”
* * *
에반젤린, 아니, 유신아는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했다.
자신의 몰락을 비웃으러 발걸음 한 멍청한 힐리아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서였다.
‘그래, 주인공인 내가 이 정도로 질 리 없잖아! 클라이맥스를 위한 위기인 거야!’
고난이 커야, 그걸 이겨 내고 맞이하는 해피엔딩이 더 달콤해지지 않겠나.
힐리아가 한국어를 말하며 스스로 ‘빙의자’임을 고백한 순간, 불현듯 알 수 있었다.
빙의 사실을 깨달은 후 늘 가져왔던 의구심의 대답을.
“기왕 빙의할 거면 주인공이어야지. 왜 악녀에게 빙의한 거야?”
자신은 ‘유신아’. 진짜 이 세상의 주인공이자, <운명의 서>의 주인이다.
불청객이나 다름없는 다른 빙의자에 의해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런 위기에 빠졌고 말이다.
확신을 얻자 머릿속에 불을 켠 듯,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이 떠올랐다.
‘그래. <운명의 서>!’
<운명의 서>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읽을 수 있었던 부분.
세 번의 반복 뒤에 한글로 적힌 문장이 떠올랐다.
「‘책’을 읽은 ‘유신아’가 그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났다.」
감옥에서 탈출하고 나면, 그 문장을 고쳐 써 버리는 것이다.
‘에반젤린 몸에 잘못 빙의한 주인공이 힐리아의 몸을 되찾는다.’
<운명의 서>라는 게 여신들이 엮은 세상의 운명을 적은 것이라면, 내용을 고쳐 씀으로써 많은 걸 뒤바꿀 수도 있을지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가능할 거다. 그래야 한다.
그녀의 머릿속이 희열로 물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힐리아가 자신은 빙의자가 아니라고 부정한 것은.
전혀 예상 못 한 진실이 그녀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한국에서 죽은 후 이 세상에 환생한 ‘유신아’이자, 힐리아 델핀이야.”
“그리고 너로 인해 모든 걸 빼앗기고 세 번 시간을 거슬러 온 회귀자이기도 하지.”
이런 상황에서 들은 말이 아니었다면, 웃기는 거짓말이라고 비웃었을 거다.
망상이 지나치다고.
하지만 그녀 자신이 이미 빙의자였다.
게다가 힐리아는 그녀를 처참하게 패배시키고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이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할 이유가 있나?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힐리아의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면, 지금의 패배는 오롯이 자신의 탓이 되어 버리니까.
돌처럼 굳은 머리로 그녀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힐리아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까지 들먹이기 시작했다.
“왜? <운명의 서>에서 그 내용은 못 봤니?”
“…네가 그걸 어떻게……?”
<운명의 서>는 원작에 언급된 적 없었다.
아니, 아닌가? 자신이 원작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확신할 수 없다.
생각이 헝클어졌다.
그녀는 빙의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힐리아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이 자체가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또 괴롭히려는 꿍꿍이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 시점에서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빙의자든 회귀자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결론은 힐리아가 그녀를 이기고 짓밟았다는 것.
회귀자로서든 빙의자로서든, 미래에 대한 지식과 이점을 맘껏 사용해서 말이다.
지독한 분노와 절망감이 그녀를 지배했다.
“비겁해!!!”
“…뭐?”
“회귀자든 빙의자든 너는 미래도, 숨겨진 사실도 다 알았던 거잖아! 그래서 날 이긴 거잖아!”
“그래서?”
“그건 너무해. 치사해! 비겁하다고!”
힐리아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곧 허탈한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내가 비겁하다고?”
“그래!!!”
“그러면 너는?”
“뭐? 나는……!”
그녀는 흠칫했다. 힐리아가 지적한 게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건 힐리아의 말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너도 빙의자로서 많은 걸 알고 있었잖아?”
그녀와 달리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던 힐리아가 처음으로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건 피비린내가 풍기는 상처와 고통이었다.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 너는 빙의자로서의 이점을 이용해서 내 모든 걸 빼앗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였지!”
콰득!
여전히 희고 고운 채인 힐리아의 손끝이 철창을 긁었다.
소름 끼치는 비명을 닮은 끼긱거리는 소음이 울린다.
지독한 원한으로 번뜩이는 힐리아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한 순간, 그녀는 위축되어 버렸다.
이렇게까지 진심 어린 분노와 고통을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
부정하고 싶었으나, 지금 그녀는 힐리아에게 기가 죽고 겁먹은 상태였다.
잠시 그녀를 노려보던 힐리아는 빠르게 감정을 추슬렀다.
광기에 가까워 보이던 증오와 분노, 원한을 누르고 평온한 가면을 썼다.
그녀는 힐리아를 비웃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면서.
하지만 도저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힐리아는 초반의 평온함을 완전히 되찾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어.”
힐리아의 입장에서 이 말은 지금 눈앞에 있는 에반젤린에게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경험한 모든 회차에서의 에반젤린에게 하는 말이었다.
에반젤린의 본명이 유신아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힐리아에게는 여전히 ‘에반젤린’이었다.
그래서 부러 조금 전 ‘유신아’의 이름을 말할 때보다 더욱 강조해서 불렀다.
“…에반젤린.”
힐리아가 호명하는 ‘에반젤린’은 곧 ‘너는 어차피 조연에 불과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두려움을 잠시 잊은 에반젤린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부러움, 질투, 서러움, 비참함, 억울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범벅되어 소용돌이쳤다.
그녀는 용기를 바닥까지 긁어내어 발악하듯 외쳤다.
“아니, 나는 유신아야! 주인공이 맞다고! 내가 진짜……!”
“진실을 알려 줄까?”
“뭐?”
“어째서 네가 빙의했는지?”
에반젤린의 어깨가 우뚝 멈췄다.
이건 빙의 사실을 깨달은 이후 계속 가져온 의문이었다.
어째서? 왜?
그녀가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이 특별해서. 주인공이니까.
그런데 지금 힐리아의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실수야.”
“…뭐라고?”
“하필이면 너와 내가 동명이인이라 벌어진 오류일 뿐이라고.”
말도 안 된다.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입을 벌려도 부정의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대주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운명의 서>에는 지금 현실이 적히기 전에, 비슷하지만 다른 내용이 세 번 반복된다고.
그리고 그 주인공은 ‘유신아’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그녀는 회귀를 경험한 적 없었다.
하지만 힐리아는 그 반복, 회귀의 횟수까지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저 말이 맞다면… 나는… 나는……!’
가슴 안쪽에서부터 절망적인 깨달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치 쐐기를 박는 듯한 힐리아의 마지막 단언이 귀를 찔렀다.
“너는 그냥 에반젤린일 뿐인 거야.”
발악으로도 도저히 반론할 수 없었다.
* * *
힐리아는 에반젤린을 비웃고 돌아갔다.
에반젤린은 다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온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그녀는 다시 고개를 휘저었다.
“아냐. 나는 에반젤린이 아냐. 내가 진짜야. 내가, 나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중이었다.
사람의 기척이 점점 그녀에게 다가왔다.
“…님!”
거의 넋을 놓고 있던 그녀는 재촉하는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사도이시여!”
대체 어떻게 숨어들어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비오 대주교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