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68화 (168/210)

168화

애니는 불안과 긴장으로 굳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올 게 왔군.’

서한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 영역에 발 들인 손님을 만나러 방문하도록 하지.」

누가 보냈는지 간단한 언급도, 서명도 없다.

하지만 블랙마켓의 존재와 그곳을 지배하는 자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단 한 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검은 뱀.’

최근 3년간은 존재감이 옅었지만, 검은 뱀은 황도 뒷골목의 밤을 지배하던 자였다.

황실이 아무리 치안을 잘 유지해도 빛에는 그림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검은 뱀은 약 10년 전쯤 황도의 슬럼가를 장악한 남자의 별명이었다.

유흥가, 소매치기, 좀도둑, 거지들의 왕.

나는 알고 있었다. 검은 뱀의 진짜 이름을. 그리고 그가 왜 3년 전부터 황도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

‘북쪽에 가 있었으니 당연하지.’

검은 뱀의 본명은 클라우 테슬란.

현 테슬란 공작이다.

전 공작의 사생아 출신으로, 황도 뒷골목에서 힘을 키운 뒤 테슬란 공국으로 돌아가 부친과 형제들을 암살하고 공작 위를 손에 넣은 남자.

공작이 된 후 공국을 확실하게 장악하느라 지난 3년간 황도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터다.

덕분에 그 빈자리에 페니 테라스라는 정보기관을 만들기 편했다.

‘실제로 페니 테라스의 관리자인 밀란도 검은 뱀의 수하 출신이기도 하고 말이지.’

아마 검은 뱀은 주인인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내가 남의 집 안마당을 홀랑 집어먹은 거라 생각하리라.

‘그러게, 누가 그렇게 오래 버려 두래?’

자신이 먼저 버렸으면서, 밀란이 배신했다며 죽여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을 거다.

그 남자 성격이… 아르파드 이상으로 더러웠으니까.

처참한 꼴인 나를 보고 이렇게 말했던 인간이니까.

“너 그 꼴로 왜 살아 있냐? 그냥 죽는 게 나을 텐데. 도와줘?”

마탑주를 만나러 왔다가 끔찍한 꼬락서니인 나를 보고 호의랍시고 그렇게 물어봤던 자였다.

검은 뱀의 경고장은 밀란이 보낸 보고서와 함께 도착했다.

밀란의 보고 내용은 이러했다.

「뱀은 아직 둥지를 떠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신년제 전에 움직일 듯합니다.」

“…….”

어쨌건 이 인간과 직접 부딪치게 되는 건 시간이 좀 필요할 거다.

나는 이자를 충분히 써먹을 자신이 있었다. 원하는 게 뭔지 아니까.

지금 나에겐 그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진홍월이 올 때까지 잠시 미뤄 두기로 한 아르파드에 대한 감정 문제는 아니었다.

그건 지금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직 에반젤린과 대주교가 멀쩡하지.’

그들이 자유롭게 나돌아다니게 놔둘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아르파드의 곁을 떠나더라도, 그들은 확실하게 처단한 뒤여야 하니까.

* * *

황실 지하 감옥에는 비명과 신음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아악! 살려 주세요!”

“저는 황후 폐하의, 아니, 이자벨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에요.”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악몽 같은 고문에 따른 소음과 비명 속에서 에반젤린은 자신 몫의 작은 감옥 안에서 몸을 옹송그렸다.

“아, 아아…….”

거친 신음이 흘렀지만 애써 삼켰다.

지난 며칠간 충분히 학습했기 때문이다. 시끄럽게 굴면 대우가 더 안 좋아졌다.

“날 내보내 줘! 나는 황손을 회임하고 있는 몸이라고!”

“나가면 너희 전부 죽여 버리고 말겠어!”

“감히 날 이따위 더러운 곳에 처박아 둬?”

처음에는 기세등등하게 발악하고 저주했으나, 곧 힘이 다했다.

부실하게나마 주던 식사와 물이 그녀가 발악하자 바로 치워졌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주린 배도 채울 수 없었다.

바닥을 닦은 넝마주이 같은 꼴이 된 채, 에반젤린은 이를 갈았다

‘이게 전부 그 여자가 시킨 짓이 틀림없어.’

악의에 가득 차서 명령을 내렸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 없었다.

‘역시 날 질투하고 원망해서 그런 거야.’

새삼 신탁을 받을 예정이던 날이 떠올랐다.

아르파드와 함께 당당하게 돌아온 힐리아의 모습이.

천장에서 내리꽂히는 빛이 마치 힐리아를 위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 여자를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아르파드도.

뺨의 흉터가 다시 욱신거렸다.

서러운 눈물이 맺혔다.

“흑, 싫어! 싫어어!”

배고픔과 두려움은 결국 서러움을 이기지 못했다.

에반젤린은 어둠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발걸음 소리가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에반젤린은 줄줄 흐르는 눈물 콧물을 소매로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등잔을 든 사람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에반젤린 자신을 향해서였다.

그녀는 두려움과 서러움도 잠시 잊고 무릎걸음으로 감옥 문 가까이 다가갔다.

“도와줘요. 제발 나를 좀……!”

빛과 그림자가 가까워졌을 때야 자신을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힐리아……!”

“오랜만이야, 에반젤린.”

힐리아는 부드럽고 화사하게 꾸민 상태였다. 평소에 비하면 그다지 화려한 치장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따라 달라 보였다. 깨끗한 피부에 분홍빛 손톱 끝까지 빛나는 윤기,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다이아몬드와 진주 머리핀이 장식돼 있었다.

그 아래 새하얀 목을 두른 핑크 다이아몬드를 엮은 세 줄 목걸이와 커다란 루비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등잔의 작은 빛을 받았을 뿐인데도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밝게 빛났다.

그리고 힐리아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스타틸리아의 별까지.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 넝마가 되어 굴러다니고 있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야말로 다이아몬드와 다 부서진 자갈을 비교하는 꼴.

서러움과 분노가 새삼 치솟았다.

“내 꼴을 보고 비웃기라도 하려고 온 거야?”

악에 받쳐 힐리아를 노려보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에반젤린을 힐리아는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내려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에반젤린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전혀 예상 못 한 말을 입에 담았다.

“기분이 어때, 에반젤린? 아니, 진짜 이름은 이게 아닌가.”

에반젤린의 경악은 몇 가지가 겹쳤다.

어떻게 자신의 진짜 이름에 관해 안단 말인가?

아니, 그전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한국어? 지금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 거야?’

안 쓴 지 오래되어 발음이 조금 어색하게 들리긴 했지만, 확실한 한국어였다.

힐리아는 그녀가 한국어를 알아들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러자 힐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너도 슬슬 눈치채지 않았어? 충분히 알 만큼 행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힐리아의 하얗고 가는 손가락이 무쇠로 만들어진 감옥 창살을 살살 건드렸다.

“안 그래? 빙의자 유신아?”

“…!”

대주교가 <운명의 서>를 읽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아주 매끄러운 발음이었다.

* * *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세 번째 죽음 직전, 목이 잘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던 때에 들었던 마지막 말들을.

“잘 가. 원작의 여주인공 씨.”

“아하하! 이제 내가 진짜 여주인공이야.”

그때의 충격과 고통, 공포는 여전히 내 영혼 안에 남아 있었다.

지금 에반젤린은 그때의 나와 달리 단두대에 매여 있지 않았다. 처형이 결정된 것도 아니다.

감옥 안에서 비참한 꼴을 한 에반젤린과 밖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내 상황은 낯설게 느껴졌다.

늘 저 안에서 고통받고 있는 건 나였으니까. 모든 걸 빼앗긴 채로.

지금 우리는 그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그때 들었던 말을 반대로 되돌려 주었다.

오랜만에 입에 담는 한국어는 입에 설었으나, 적어도 에반젤린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된 모양이다.

에반젤린의 초록색 눈동자가 저렇게 떨리는 걸 보면.

“안 그래? 빙의자 유신아?”

저열하지만,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희열이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인공 자리를 탐내다가 바닥까지 떨어진 기분은 어때?”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던 에반젤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아아아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