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아르타누스는 내가 아르파드를 죽이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드래곤 하트로 만들어진 단검을 손에 심기까지 했다.
-네가 원할 때면 언제든 그 단검을 꺼낼 수 있을 거다.
결국 내가 그를 죽이기 쉽게 단검을 심었다는 거다.
나는 단검을 아르타누스 앞에 내던지면서 화를 냈다.
“당신이 바라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내가 원하지 않으니까! 난 절대 그를 해치지 않을 거야!”
-말했을 텐데. 숙명에 가까운 일이라고.
경악한 나에게 아르타누스의 진짜 ‘육성’이 들려왔다.
본체 상태에서처럼 몸과 정신이 울리고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부하거나 벗어날 방도가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힘의 존재만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네 의사와 상관없이 때가 되면 너는 아르파드를 죽여 완전케 하리라.”
나는 깨달았다. 이건 용언(龍言)이다.
인간으로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언령.
이건 나에겐 저주나 마찬가지였다.
그 저주를 끝맺음과 동시에 아르타누스는 나와 아르파드를 원래 있던 장소로 돌려보내 버렸다.
흐려지는 아르타누스를 향해 나는 별 의미 없는 욕설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빌어먹을 도마뱀이……!”
회상을 끝내고 나는 눈을 떴다.
온몸이 녹아내릴 듯 피곤했다. 하지만 옆자리에 있을 아르파드를 확인하고 싶었다.
악몽과도 같은, 뭐 같은 드래곤 놈이 한 말이 남긴 더러운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손을 뻗은 순간.
뜨겁고 질척거리는 것이 손끝에 닿았다.
“어…?”
뒤늦게 깨달았다. 손이 묵직했다.
아르타누스가 준 단검이 쥐여 있었는데 온통 붉었다. 드래곤 하트의 본래 색 때문이 아니다.
피로 젖어 있었다.
경악과 두려움 속에서 나는 고개를 돌리며 그를 불렀다.
“아르파……!”
내 옆에는 심장을 꿰뚫린 채 죽은 아르파드가 누워 있었다.
“…!”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지 않은 건 혀가 굳어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평온한 천장이 눈앞을 덮었을 때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눈을 굴려 옆자리를 확인했다. 심장이 불길하게 마구 뛰었다.
다행히 아르파드는 평온하게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걱정하며 끌어안아 주며 물었다.
“왜 그래?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악몽을 꿨어.”
아르파드는 나를 부드럽게 달래 주었다.
“괜찮아. 원래 꿈과 현실은 반대라잖아.”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말 내가 바라는 대로 될까?
내 손은 아르파드의 등과 어깨를 매만지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조금의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내 왼손에 붉은빛이 맺히는 게 보였다.
아르타누스가 심어 둔 단검이 여전히 존재했다.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꺼낼 수 있도록.
‘내가 원하지 않아도 제멋대로 튀어나와서 아르파드를 해칠 수도 있어.’
아르파드는 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거야?”
나는 아르파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물었다.
“나, 사랑해?”
아르파드의 눈가가 흐무러졌다.
“당연하지. 사랑해. 가능할 거라 생각해 본 적 없을 정도로.”
그는 안 어울리게 망설이며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가 좋아?”
사랑하느냐는 질문이 아니라, 좋으냐고 묻는 소심함은 정말이지 아르파드와는 안 어울렸다.
이 폭군 같은 남자가 소심해지는 건 내 앞에서만이었다.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워 가슴이 저려 왔다.
“사랑해. 불안할 정도로.”
아르파드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육체적으로도 이미 이어졌다.
‘그렇다면 아르파드의 광증은 사라진 걸까?’
아르파드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 심장 고동을 듣고 있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광증이 사라졌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건 두려우면서도 기대되는 일이었다.
정말 이걸로 아르파드의 광증이 사라진다면 나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는.’
동시에 내가 반드시 그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결과였다.
아르타누스의 말이 맞다는 증명이니 나에게 새겨진 저주 역시 언젠가 아르파드의 심장을 노릴 거다.
‘이제는 진홍월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얼마 전 진홍월에 나는 아르파드의 광증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겪었다.
다시 진홍월이 오면 그때의 경험과 비교하여 확신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래서 만일, 정말로 광증이 사라졌다면… 그때는…….’
나는 의도적으로 뻗어 가는 생각의 가지를 멈췄다.
그리고 아르파드에게 매달려서 졸랐다.
“더 안아 줘. 그러면 덜 불안할 것 같아.”
곧 격정적인 파도가 다시 한번 내 몸을 덮쳤다.
“으응, 조금 더……!”
적어도 아르파드가 광증에서 해방된 게 확실해질 때까지는…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잠시간의 행복한 유예인 셈이다.
* * *
황태자 부부가 공무에 복귀한 것은 귀환한 후 사흘이 지난 뒤였다.
일을 미루고 침실에만 박혀 있던 상황을 신경 쓰거나, 무어라 하는 이는 없었다.
율켄이라면 지금쯤 몇 마디 이상을 해야 했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만큼 이들이 살아 돌아와 황후를 끌어내린 사실이 기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귀환을 가장 기뻐하는 이는 정해져 있었다.
발터 이스트리드 황제.
두 사람은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 황제에게 인사 가는 것으로 다시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부황께 인사 올립니다. 돌아오고 며칠간 제대로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인사를 올리면서도 힐리아는 조금 의아해했다.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황제가 10년은 늙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선황후 폐하의 죽음에 대한 사실이 심한 충격이시긴 했나 봐.’
힐리아는 2회차 때 신전에서 모든 생의 의미를 잃은 황제를 본 바 있었다.
지금 황제의 모습은 그때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그때는 시간과 고통 속에 스스로 상처 내며 닳아 버린 잔해에 가까웠다.
지금은 햇볕 아래 빛바랜 듯한 모습이었다.
늙고 지쳤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상처가 굳고, 잃어버린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워 넣어 자연스럽게 나이 든 고목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의 모습보다 훨씬 보기 좋은 건… 사실이네.’
조금 안심이 되었다.
힐리아는 곁눈질로 남편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황제와 닮았지만 젊은 이목구비.
새삼 자신의 회귀가 아르파드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나에게 준 거였지. 나를 살리기 위해.’
그 당시 아르파드가 이 상황까지 의도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 선택은 돌고 돌아, 결국 본인의 부친을 구원한 셈이었다.
가슴이 술렁거렸다.
아르파드 곁에 있다 보면 늘 그러하듯, 힐리아가 감상에 깊이 젖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아르파드의 웃는 얼굴을 보고 황제가 가볍게 덕담을 던졌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아르파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가 아니라, 굳이 할 필요 없는 팔불출 발언을 했다.
“생애 최고의 날들을 보내는 중입니다.”
힐리아는 기겁해서 아르파드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니, 며칠 전에 아내가 살해당한 걸 알게 된 분 앞에서 무슨 염장이야!’
하지만 아르파드는 부친의 기분을 신경 쓸 정도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본인 말대로 지나칠 정도로 매끈하고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라, 황제와 대조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애정 과시가 황제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도리어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 내외를 보며 웃었다.
조금 전 힐리아가 보며 걱정했던 신산한 표정은 웃음에 부드럽게 이지러졌다.
다행이었다.
힐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황제는 본론을 꺼냈다.
“내가 너에게 큰 은혜를 입었구나.”
“은혜라니요. 과한 말씀이십니다.”
아르파드는 옆에서 ‘너무나도 큰 은혜지요’라고 말하다가 아내에게 옆구리를 찔렸다.
“아들을 구해 주고, 아내의 원한을 갚을 수 있게 해 준 이를 두고 은혜를 입었다 하지 않는다면 뭐라 표현하겠느냐.”
“대단히 맞는 말씀이십니다, 부황 폐하.”
아르파드는 아내의 구박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러니, 내 너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구나. 부디 받아 주겠느냐?”
힐리아는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예, 기꺼이.”
황제가 손을 흔들자, 긴장한 표정의 시종장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이후 힐리아와 아르파드의 앞에 놓고 상자를 열었다.
내용물을 보고 힐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잠시만요. 폐하! 이건 황후의 보관인데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황제가 선물이라며 내민 것은 황후의 보관.
그것도 이자벨이 선황후의 유골을 받는 대가로 마탑주에게 넘겨주었던 드래곤 하트가 제자리를 찾은 상태였다.
이미 힐리아는 백금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황후의 보관까지 더해지면 실권을 넘어 사실상 황후의 자리가 그녀의 손에 들어온 셈이었다.
황후 자리가 비었고 황제가 재혼할 리 없으니, 이건 예정된 수순이라 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너무 빨라!’
게다가 힐리아는 곧 아르파드의 곁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차였다.
황제가 황후의 보관을 힐리아에게 주는 것은 한 가지 외에 다른 의미로 해석이 불가능하다.
아르파드가 낮은 목소리로 부친에게 확인했다.
“선위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황제가 아르파드에게 양위한다. 그러면 당연히 황태자비인 힐리아가 바로 황후가 되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황후의 이혼은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