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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65화 (165/210)

165화

느지막한 오전.

상아의 침실에 딸린 곁방에 시녀들이 발걸음마저 조심하며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발간 얼굴로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고 있었다.

“역시… 전혀 대답이 없으신…….”

“어제 저녁 식사도 올리지 않았는데…….”

“…시녀장께서 우리가 방해하면 안 된다고…….”

다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지난 3개월간 주인이 사라져 늘 그늘졌던 황태자궁이다.

드디어 주인이 돌아왔으니 활기가 돌아야 정상이지만, 지금 궁 안은 이질적인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이자벨이 황후 자리를 박탈당하고, 에반젤린 역시 황통을 어지럽히려 했다는 죄목으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지난 3개월간 기세등등한 황후궁의 궁인들과 기 싸움을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주인이 돌아오자마자 정적은 단번에 쓸려 내려갔다.

어깨가 절로 춤을 추듯 올라갔다.

큰일을 끝내고 무사히 돌아온 황태자 부부는 상아의 침실로 들어갔다.

황태자궁의 누구도 감히 두 사람만의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시녀 중 한 명이 어제저녁 아르파드 황태자가 황태자비를 안고 들어왔을 때를 생각하며 볼을 붉혔다.

황궁 내 천주신의 신전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였다.

꽤 먼 거리를 힐리아를 공주님처럼 안아 든 채, 그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걸어왔다.

‘마치, 두 분이 입궁하신 첫날처럼.’

그때는 힐리아가 아직 황태자비로 인정받기 전이었다.

갑작스러운 약탈혼으로 황궁 전체가 뒤집힌 상황에서 두 사람이 그렇게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오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덕분에 황궁이 한 번 더 뒤집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긴 거리를 아르파드가 힐리아를 안고 와도, 궁인들은 익숙한 반응이었다.

입궁부터 달콤한 꿀이 쏟아지는 듯한 금실을 자랑했던 두 사람이 아닌가.

그간 황태자 부부가 황궁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 애정 행각은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지근거리에서 모셔 온 시녀는 알 수 있었다.

어제는 분위기가 평소와 매우 달랐다.

그래서일까. 황태자 부부가 침실에서 나오지 않는 일은 종종 있었음에도, 유달리 궁인들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특히 시녀장 공작 부인이 신신당부해 둘 정도였다.

“절대 두 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안에서 먼저 종이 울리기 전까지는 숨소리도 조심하도록.”

그리고 상아의 침실에서 아무 기별이 없어도, 하루 세 번 곁방 앞에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준비해 두도록 시켰다.

시녀들은 손을 대지 않아 식은 음식을 치우고, 다시 따뜻한 것으로 바꾸어 두었다.

다들 숨소리마저 죽인 채, 조용히 곁방을 나갔다.

이 상황은 사흘 내내 이어졌다.

Chapter 18. 숙명과 운명

“당신의 상처나 위로보다… 그냥 내가 당신을 원해.”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순간, 아르파드가 날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건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약해진 아르파드를 이용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이기적이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기적으로 굴 생각이니까.’

게다가 누구보다 위로를 원하는 건 나였다.

아르파드를 원하며 매달리는 건 내가 더했다.

그의 뜨거운 체온에 닿고 싶었다. 그의 감정을 좀 더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을 부린 것에 불과했다.

격정적인 밤은 마치 영원히 이어질 듯했다.

이불 속에서 꼭 끌어안은 나와 아르파드의 머리 위로 새벽녘의 푸르른 빛이 흐트러졌다.

베개에는 나와 아르파드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지난밤 수도 없이 섞였던 우리처럼.

아르파드는 알지 못하는, 드래곤이 남긴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제 있던 곳으로 보내 주겠다.

“아니, 잠깐만!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어요!”

-무엇이지?

미약한 수치심이 치밀었다. 내 입으로 이걸 남에게 묻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임이 틀림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아르파드와 육체적으로 맺어지면, 광증이 해결되는 게 확실한가요?”

이건 내가 가스팔을 통해 알고 있는 아르파드의 광증을 해결할 방법이었다.

마탑주 가스팔은 대륙 내 인간 중 드래곤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이였다.

‘하지만 드래곤 자신보다 더 잘 알진 않겠지.’

드래곤이 직접 주는 확답보다 확실하진 않을 거다.

아르타누스는 바로 핵심을 찔러 왔다.

-내 후계자가 ‘완전해지면’ 광증은 걱정할 필요 없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그 완전해진다는 게……!”

분노와 원망이 한데 뒤엉켜 말을 다 내뱉지 못했다.

드래곤이 한 말을 그대로 읊으면 진실이 될 것 같아서.

몸서리치게 싫고 끔찍한,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안 할 거니까. 당신이 말한 ‘그 짓’.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네가 원한다고 하여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정해져 있는 운명, 아니, 숙명에 가까운 일이니.

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그따위! 그따위 거 절대 안 믿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아.”

드래곤은 표정 없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에 감정이 섞이는 순간은 수정 결정 속, 잠든 제 신부를 볼 때뿐이었다.

-지금은 그리 믿고 행동해도 상관없으나…….

나는 드래곤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운명이든 숙명이든 상관없으니까 내 질문에나 대답해, 빌어먹을 도마뱀.”

-…….

“나와 몸을 섞으면 광증이 두 번 다시 그를 괴롭힐 일이 없는 게 맞는 건지.”

드래곤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내내 아르파드에 딸린 장식품처럼 보던 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아르타누스의 말과 표정에서 감정적 동요가 느껴졌다.

-…그녀를 보는 것 같군.

‘그녀’가 누구를 의미하는 건지 예상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닮은 건 머리색 뿐이고, 그조차 우연이거늘.

나와 이스트리드 공주의 머리색이 비슷한 건 우연인 모양이다.

용의 신부가 가진 신체적 특징 같은 건 아니라는 거겠지.

이 빌어먹을 도마뱀이 나를 보고 공주를 떠올리고 있다는 건 의미가 있었다.

이용할 수 있다는 소리일 테니.

“네 신부를 사랑한 게 진짜라면 어서 말해.”

거의 협박하듯 말했으나, 사실 아무런 힘이나 강제력은 없었다.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멸하여 연인의 곁으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드래곤이 사랑하는 여자를 떠올리게 만드는 나를 정말 무시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리라 확신했다.

아니, 제발 그러기를 바라며 나는 억지를 부렸다.

“말하란 말이야!”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 침묵 끝에 드래곤은 결국 내가 바라는 정보를 토해 냈다.

-단순히 육체만 이어지는 것이라면 일시적이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라면 광증이 재발할 가능성도 있다.

“…!”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가스팔이 틀렸던 건가.

이렇게 되면 나는 아르파드의 곁을 떠날 수 없게 된다.

내가 없는 상황에서 광증이 재발하면 아르파드는 결국 죽을 테니까.

가슴이 조이듯 아파 왔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똑같은 거잖아!’

어쩌면 그게 저 재수 없는 도마뱀이 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때 드래곤의 말이 더 이어졌다.

-그 외에 광증에서 해방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첫 번째는 용혈의 후계자가 자신의 신부를 통해 아이를 가지면 된다. 단, 이때 광증에서 벗어나는 건 당사자 한 명뿐이다. 두 사람의 자식은 벗어날 수 없어.

“그건… 자식에게 광증을 떠넘기는 거나 다름없잖아.”

-네 표현이 크게 틀리진 않다. 실제로 너희가 황가라 부르는 가문은 그렇게 생겨났으니까.

이 말만 들으면 지금의 황가가 용혈의 저주에서 해방되기 위해 만들어진 부산물인 것 같잖아.

내용과 달리, 드래곤이 내뱉는 음성은 더없이 무감했다.

-두 번째는 더욱 간단하다. 신부와 용혈의 계승자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사랑하여, 몸을 섞으면 된다.

“아까 몸을 섞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래. 그저 몸을 겹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진심으로, 온몸과 마음을 다해 서로를 원해서 하나가 되어야 하지.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곧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선조와 후손까지 모두 포함하여, 나와 이스트리드, 단 한 번의 경우 외에 성공한 적 없는 일이니까.

아르타누스는 차갑게 선언했다.

-너 역시 그를 광증에서 해방시키길 원하지 않나? 그렇다면 훨씬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다.

아르타누스는 이 대화의 직전 나에게 ‘준 것’ 아니, ‘걸어 놓은 마법’을 발동시켰다.

피처럼 붉은 마력이 내 왼손을 휘감더니 곧 붉은 칼날을 가진 단검의 형상을 만들었다.

단검의 손잡이는 황금빛으로 빛났다.

아르타누스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칼날, 비늘과 뼈로 빚어진 손잡이.

끔찍하게 이기적인 드래곤은 다시 한번 더 나에게 ‘요구’했다.

-그것으로 심장을 찔러 인간으로서의 그를 죽여라. 그리하면 드래곤으로서 그는 완전해질 것이다. 비로소 나의 진짜 후계자가 되겠지. 이건 오로지 신부만이 가능한 일이다.

저주받아 마땅할 드래곤은 나에게 아르파드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그를.

어쩌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드래곤 역시 그렇게 태어난 걸지도 모른다.

아르파드가 저런 존재가 된다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이가 맞을까?

그 이전에 한 가지 지독하도록 잔인한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정말 아르파드를 찌를 수 있을까?’

대답은 하나였다.

“절대 싫어. 그런 짓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아.”

이건 내가 적극적으로 아르파드를 유혹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게 아르파드의 광증을 근본부터 해결하는 방법이었으니까.

내가 그의 곁에 없어도 괜찮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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