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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64화 (164/210)

164화

지하실에는 한 점의 빛도 스며들지 않았다.

퀴퀴한 먼지와 곰팡내가 비강을 쿡쿡 찔렀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고, 사지는 전부 쇠사슬로 결박되어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수갑에 달린 가시가 살을 찔러 상처를 냈다.

“…!”

한때 황후궁의 주인이었으나, 이제 황후였던 사실조차 인정되지 않게 된 여자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파편화된 신음이 어둠 속에서 웅웅거렸다.

끼익―

그때 비명과 신음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들어섰다.

여전히 단 한 조각의 빛도 이 안에 드는 걸 허락받지 못하였으나, 이자벨은 알아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불씨를 품은 루비처럼 빛나는 저 눈은 세상에 단둘만이 가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랑하고 증오하는 남자와 그 아들.

아무리 빛이 없어도 그녀는 이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발터!’

발터 이스트리드.

제국의 황제이자, 그녀가 사랑하다 못해 증오하는 남자.

황후인 적 없다고 부정당했지만, 그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그것부터 주장하고 싶었으나 재갈에 막힌 입은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풀어, 풀어 줘! 그리고 내 말을 들어! 내 증오와 내 감정을 들어 달라고!’

“으으읍! 으으아으아읍―!”

하지만 황제는 서늘한 눈으로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여자를 내려 볼 뿐이었다.

“내가 어리석었지.”

‘그래! 나도, 내 감정도 너무 얕봤어! 당신은 그래선 안 됐어!’

이어진 황제의 말은 이자벨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아내의 손에 익었던 도구라 큰 문제없이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숨겨진 가시를 미처 못 봤어.”

“…!”

“그 가시에 아내가 죽고, 아들까지 해를 입을 뻔했다니… 며느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리되었겠지.”

황제의 말은 이상했다.

이자벨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황후 자리에 앉혀 둘 허울뿐인 존재로 여기는 데에 익숙했다.

차마 이것까진 예상 못 했다.

‘설마… 날 인간으로도 여기지 않았던 거야?’

이 남자는 그녀를 잘못 고른 도구를 보듯 하고 있었다.

혀를 차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네가 주제 모를 감정을 내게 품은 걸 알고 있었다.”

“…!”

이자벨은 경악하여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었다고?

황제는 날카로운 말을 엄선하여 내뱉었다.

“나에게 감정이 있으면 그만큼 더 이용하기 쉬우리라고만 여겼거늘,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게 있었군.”

“…으읍! 으으읍!!”

“주제도 모르는 질투 때문에 벌레가 감히 내 안뜰을 갉아먹으려 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증오만이 환히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형형했다.

“쉬이 죽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말아라.”

“…!”

“네가 그 감정을 품은 것 자체를 저주하도록, 최대한 길고 또 길게 고통을 뽑아내 주지.”

황제의 무자비한 손길이 이자벨의 목을 잡아채 졸랐다.

짐승을 닮은 비명이 우악스러운 손아귀 안에서 막혔다.

황제는 증오를 조절했다. 한 번에 숨을 끊는 실수를 범할 수는 없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수도 없이 저질렀다.

그 때문에 아내를 잃었고, 아들과 멀어져야 했다.

복수는 잃은 것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조촐하고 형편없었다.

그러나 아들 외에 그의 삶에 이제 긍정적인 건 복수를 통한 저열한 희열밖에 없었다.

“…읍, 으읍!”

“네 사랑도, 네 삶도 스스로 저주하고 또 저주해도 부족하도록 해 주마. 불행하게도 시간은 아주 많으니… 함께 증오와 저주 속에서 허우적거리자꾸나.”

이자벨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의 사랑과 원망, 그리고 증오.

그동안 저지른 모든 행동이,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을 한 괴물이 되어 되돌아와 있었다.

* * *

마탑은 황실 기사단에 의해 에워싸여 있었다.

남겨진 마법사 몇몇이 당황하고 불안해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 이 탑은 껍데기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버린 지 오래된.

마탑으로부터 꽤 떨어진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

그 가운데에 옅은 푸른빛으로 빛나는 유리 수조가 존재했다.

그 안에서 관상어처럼 허우적거리고 있던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조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액체가 점점 더 강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빛은 수조 안쪽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형체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온몸에 빛나는 푸른색 문신을 새긴 남자가 손을 뻗자 유리 수조가 쩍, 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가득 차 있던 액체가 밖으로 흘러넘쳤다. 깨진 유리 조각과 액체를 밟으며 남자가 걸어 나왔다.

푸른 빛의 문신으로 가득한 팔로 남자는 봉두난발인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뒤로 넘겼다.

목구멍을 채우고 있던 액체와 함께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이건 예상외네. 1번부터 4번까지 예비 육체가 전부 당하다니.”

마탑주 가스팔은 길게 한탄했다.

그가 황궁 신전에서 쉽게 목숨을 내놓은 이유는 간단했다.

목숨이 여러 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만약을 대비한 육체를 5개체까지 준비해 두었다.

마지막 5번째는 완성도가 모자랐지만, 쓸 수는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앞의 4번까지가 전부 파괴당한 상황이니.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내가 예비 육체를 준비해 두는 걸? 그것도 위치까지…….’

낭패감이나 위기감보다 호기심이 더욱 짙었다.

장난처럼 황궁에서 처음 마주쳤던 때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악과 두려움.

그리고…….

‘그 여자는 나를 처음 만난 게 아니었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숨겨 둔 예비 육체의 존재와 위치까지.

당연히 그는 알려 준 적 없는 사실들뿐이다.

“이미 한번 겪어 본 것처럼 행동하네.”

가스팔의 입매가 날카로운 호선을 그렸다.

그는 마법으로 만든 아공간 속에 넣어 둔 플라스크를 꺼냈다. 유리병 안에는 붉은 피 한 방울이 둥둥 떠 있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4개의 예비 육체까지 잃고 나서야 겨우 얻어 낸 아르파드 황태자의 피.

단물만 빨리고 내버려진 자신의 꼴이 아주 볼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문 해결이나 보복에 열을 올릴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해결할 게 있으니까.

가스팔은 황궁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내 귀여운 실험체부터 일단 회수해 와야겠군.”

* * *

아르파드는 촉촉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위로, 위로라? 어떻게 하면 위로가 될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사람의 체온이다.

털 달리고 따뜻한 생물을 끌어안고 있으면 꽤 큰 위로가 되지 않나.

나도 털 달렸고(?) 따뜻하니까 괜찮겠지?

그래서 상체를 바짝 들이대다시피 해서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나의 체온이 온전히 그에게 전달되도록.

덤으로 내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려 아르파드의 몸 위를 덮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두 가지 조건 모두 클리어지?

아르파드는 설핏 미소 지었으나, 불퉁하게 대답했다.

“부족해.”

위로가 부족하다는 투정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체온이 부족하다?

혹은 복슬복슬한 털이 부족하다?

“흐응…….”

사실 알고 있었다. 아주 잘 알고 있지.

아르파드가 위로를 빙자해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가 상처받고, 지친 건 사실이라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고개를 숙여, 아르파드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겹쳤다.

서로의 숨결이 달콤하고 진하게 얽혀들었다.

이미 그와 나 사이에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애정의 확인.

그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내가 아는 아르파드는 강렬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늘 확신에 차 있었다.

머뭇거리는 건 내 몫이었지.

지금은 아르파드가 머뭇거리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나는 적극적으로 숨결을 헤치며 파고들었다.

내 몸이 하나의 초가 된 것 같았다. 나긋하고 부드러운 살 아래 심지가 있고, 거기에 누군가가 불을 붙인 느낌.

그대로 타오르고 녹아내려, 이 남자의 위를 덮어 버리고 싶은 감각.

내게 불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깊게 파고들었던 숨결이 잠시 떨어지며, 서늘한 공기를 머금었다.

그게 매우 아쉬워 조금 전 양껏 들이켰던 달콤하고 뜨거운 감정을 입에 담았다.

“아르파드.”

내 안에 심어지고, 나를 태우고, 녹이는 존재를.

내게 이름이 불린 그는 어쩐지 당혹스러워하면서 두려워하고, 또 내게 이끌리고 있었다.

아르파드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그랬다. 운명처럼.

나는 작게 속삭였다.

“왜 그래요? 당신답지 않게.”

“…방금 내가 굉장히 파렴치한 인간이 된 것 같은데.”

“아니에요?”

“부정할 수 없긴 하군.”

아르파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당신이야말로 답지 않으니까.”

“무서워하고, 물러나야 나다운 거예요?”

아르파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성급해. 쫓기는 것처럼.”

역시 예민한 남자였다.

나는 날카롭게 갈린 아르파드의 기운을 단번에 누그러뜨렸다.

그의 미간에 키스를 퍼붓자, 예리했던 눈빛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그리고 녹아내린다.

이 순간에도 아르파드는 미약한 이성을 유지했다.

“…당신이 날 동정하고 위로해 주는 수단이 우리의 첫날밤이 되지 않기를 바라.”

“말이 달라진 거 알아요?”

“…뭐가?”

“나라면 뭐든 좋다면서요? 동정이든 화를 내든.”

“내 마음은 여전히 같아.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기회든 다 이용하고 싶긴 한데… 그래서 참는 거야.”

“왜?”

“나중에 당신이 티끌만큼이라도 후회하는 건 싫으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자세를 바꾸었다. 내 무릎 위에 누운 그의 머리를 소파에 눕히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르파드의 무릎 위에 앉았다.

나를 향한 불꽃이 너무나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목이 바짝 말라, 혀로 입술을 축여야 했다.

나는 그의 위로 쓰러지며 속삭였다.

“당신의 상처나 위로보다… 그냥 내가 당신을 원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친 손길이 내 등을 잡아챘다.

번개가 친 것처럼 짜릿한 희열이 온몸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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