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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63화 (163/210)

163화

황제의 분노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반면 아르파드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아마 내가 그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던 때라면 오해했을 거다.

자기 어머니 일에도 어떻게 저리 태연하냐면서 피까지 얼음으로 된 건 아닌가 하고.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슬퍼하고 있었고, 화를 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처럼.

다만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자 팔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아르파드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침잠한 붉은 눈동자에 남은 흉터를 보고, 그를 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아르파드는 지금이 공식적인 장소라는 것도, 또 보는 눈이 많다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내 체온만이 위로라는 듯 가만히 기대어 있었다.

* * *

힐리아가 아르파드를 위로하고 있는 동안에도 일은 진행되었다.

그사이 황제의 명을 받은 황실 기사들이 황실 영묘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증언대로입니다. 황후 폐하와 일페논 대공의 유해가 일부 사라졌습니다.”

특히 일페논 대공의 유해의 경우 선황후와 어린 아르파드의 광증을 일으키는 데 이용되었기 때문에 훼손이 심했다.

황제는 증오가 절절 끓어 넘치는 눈으로 이자벨을 노려보며 외쳤다.

“내가, 너무나도 어리석었구나. 내 아내를 죽인 자를 황후의 침실에 넣어 두고, 내 아들을 잘 돌보리라 믿었다니!”

이자벨은 악을 쓰며 어깨를 뒤틀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변명이나 분노, 증오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가해자의 변명을 피해자가 들어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황제는 선언했다.

“황후는 폐위하지 않는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이 말에는 분노와 증오로 벌벌 떨던 이자벨마저 잠시 굳었다.

의아해하는 반응들이 터져 나오다가 이어진 황제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의 몸으로 제 주인인 황후를 살해한 반역자다. 게다가 록셀린을 죽이고, 그 유해를 이용하여 황태자까지 살해하려 한 지독하고 극악한 자! 이 죄를 알고 있었다면 결코 황후 자리에 올리지 않았을 터. 따라서 짐의 두 번째 혼인은 무효이며, 이자벨 루스는 황금록(황실 계보도)에서 그 이름을 파낸 뒤 원래의 형태로 되돌리리라. 내 옆자리에는 록셀린 외에 어떤 이름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황금록은 그 이름대로 금에 새겨진 계보도였다.

폐위되거나 반역으로 쫓겨난 이들조차 인명록에 새겨진 이름 위에 줄이 긋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황제는 이자벨의 이름을 파내고 다시 메워, 새겨진 적 없던 것처럼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이자벨을 폐위하는 정도가 아니라, 황후였던 적이 없다고 선언하겠다는 소리였다.

에반젤린이 대주교에게 매달렸다.

“혼인 문제는 천주신과 지모신의 신전에 권한이 있잖아요. 어떻게든……!”

대주교는 차갑게 대꾸했다.

“황제의 분노를 직접 마주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

“이제 이자벨의 죄는 덮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대주교는 에반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자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던 에반젤린의 표정이 굳었다.

“…이게 나은 선택입니다. 성녀님과 배 속 아이라도 무사해야 합니다.”

에반젤린은 뻔뻔하게 웃고 있는 마탑주와 짐승처럼 울부짖는 이자벨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이후 황제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외쳤다.

“죄송합니다. 폐하. 어머니가 이토록 악독한 짓을 했는지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 아이에 대한 것도 어머니께서 강요하셨던 일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막아야 했는데……!”

에반젤린은 능숙하게 거짓 눈물을 흘리며, 추궁당할 죄까지 전부 이자벨에게 떠넘겨 버렸다.

황제는 차가운 눈으로 에반젤린을 내려 보다가 대꾸했다.

“짐이 그걸 믿을 정도로 바보로 보였나?”

“…네?”

그때 얼음장보다 차가운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다.

“에반젤린 루스는 자신이 품은 아이를 황태자의 핏줄로 바꿔치기하려 했다. 황통을 어지럽히려 한 일 역시 반역죄다. 즉시 체포하라.”

에반젤린은 발버둥 쳤다. 그러나 황실 기사들의 힘에는 당해 낼 수 없었다.

대주교가 막아서려 했으나, 여기서 기사와 다투었다간 황실과 정면으로 싸우는 일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저는 아니에요, 폐하! 전부, 전부 어머니의 명령이었어요! 게다가 이 아이는 황실의 핏줄이 확실한……!”

기사들 손에 질질 끌려가던 에반젤린의 눈에 마탑주가 보였다.

태평함을 넘어 미친 건가 싶을 정도로 기괴하게 웃는 남자.

에반젤린의 비명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너! 대체 왜 배신한 거야?! 네가 원하는 걸 주겠다고 했잖아! 이래 봤자 너도 죽는 건 똑같은데!”

그러자 마탑주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난 안 죽을 거거든.”

“뭐?”

“거래한 게 있으니까 말이지.”

마탑주는 아르파드와 힐리아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툭.

그 순간, 마탑주의 목이 잘려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어?”

에반젤린은 상황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멍하니 기사들에게 잡혀 있었다.

“내 어머니를 죽이고도, 잘도 뻔뻔하구나.”

마탑주 가스팔의 목을 벤 것은 아르파드였다.

그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목을 잃은 마탑주의 몸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 광경은 기이했다. 사람의 목이 잘리면 당연히 붉은 피가 흘러야 한다.

하지만 마탑주의 시체에서 흐르는 건 붉은 피가 아니었다. 희미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액체.

플라스크에 담아 두었던 시약이 쏟아지는 듯했다.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말이 맞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인간의 몸이 아니군.’

주변에서 경악과 의문이 튀어나왔다.

“푸른 피는 뭐지?”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푸른 피가…….”

“마탑주잖아. 스스로 마법 실험하다가 저렇게 된 거 아냐?”

웅성거림 속에서 아르파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입을 막길 잘했어. 할 필요 없는 말까지 줄줄이 늘어놓고도 남을 놈이니.’

자신의 혈액 등 신체를 일부 받기로 했다는 걸 말할 수도 있었다.

아르파드의 시선이 힐리아에게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아르파드는 꽤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힐리아가 마탑주를 대할 때의 태도를.

‘두려워하고 있어. 끔찍할 정도로.’

아르파드는 타인의 두려움에 민감했다. 특히나 힐리아의 감정 상태나 반응에는 더더욱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힐리아는 작전을 위해 거래하면서 마탑주를 이용했지만, 스며 나오는 두려움을 다 숨기지 못했다.

아르파드는 그걸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예견한 힐리아의 부탁이 기꺼웠다.

“마탑주가 허튼소리 할 것 같으면 즉시 목을 날려 버려요.”

“처음부터 거래 조건을 지킬 생각이 없었군?”

“당연하잖아요? 원수에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원수’라는 단어는 이상하지 않았다.

아르파드에게 가스팔은 원수가 맞았으니까.

하지만 힐리아의 목소리에 담긴 선연한 분노와 고통의 원천은 알 수 없었다.

아르파드는 개의치 않았다.

힐리아가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것도.

아직 다 고백하지 않은 게 많다는 것도.

그보다는 힐리아가 자신을 좋아하고, 의지하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 때문에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내의 곁으로 돌아왔다.

바닥에 쓰러진 마탑주의 시체에서 기묘하게 빛나던 문양이 꺼지듯 사라지는 것에는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힐리아 외에는.

그녀는 아르파드를 마주 안아 주면서 긴장감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 * *

죄인 이자벨과 에반젤린은 체포되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황후궁에 있던 궁인들, 루스 후작가의 가신과 고용인들까지.

줄줄이 끌려와 지독한 고신이 이어졌다.

황제의 분노는 수도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악시온 대공비도 마찬가지였다.

노구를 이끌고 직접 황궁 지하실의 이자벨을 찾아가려다가 조카 손녀의 만류로 참아야 했다.

황궁 전체가 분노와 참담함으로 인해 우울한 상태였다.

이건 황태자궁 역시 다르지 않았다.

대신전에서의 일 이후 아르파드는 상아의 침실에 틀어박혔다.

아르파드는 내내 가라앉은 분위기로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힐리아는 아르파드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러자 아르파드가 붉은 눈을 들었다.

“아니, 생각보다… 안 괜찮아.”

아르파드가 모친을 잃은 건 열 살쯤이다.

그때의 기억과 상처는 아직 남아 있었다.

이자벨이 벌인 일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며, 상처는 더욱더 커졌다.

힐리아의 목소리에 안타까움과 동정이 스며들었다.

“내가 도와줄 일 있어요?”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손에 응석을 부리듯 제 머리를 비볐다. 그러고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위로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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