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때는 이미 아르파드와 내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였다.
당연히 가스팔에 대한 회유 역시 함께 논의를 끝냈고 말이다.
그런데 직접 만나서 협상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이렇게 구는 건 예상 못 했다.
아르파드는 버림받기라도 한 것처럼 눈가에 이슬을 달고 나를 바라보았다.
매우 가련해 보이는 가증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내면 내 몸을 노리는 놈에게 화를 내거나 보호해 줘야지!”
“…….”
너무 황당한 나머지 진지하게 화를 낼 의욕도 사라졌다.
그러자 마탑주 가스팔의 눈이 더더욱 위험스레 빛나기 시작했다.
“호오? 이쪽이 팔면 정말로 팔아넘겨질 용의도 있는 건가? 용혈의 소유자가? 대단한데!”
아르파드는 그 말에 살기를 퍼뜨리거나 가스팔의 목을 날리지 않았다.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나는 손을 쭉 내밀어 아르파드의 앞을 막아섰다.
가스팔의 저 징그러운 눈빛에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끔찍한지 잘 알아서이기도 하고…….
‘아르파드가 좋아하겠지.’
내 예상대로였다.
큰 의미가 있지도 않건만, 내가 막는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아르파드는 기뻐했다.
가스팔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용혈의 후계자가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건 정말 드문 일이군. 마치 아르타누스와 이스트리드처럼 말이야.”
나도 모르게 잠시 흠칫할 뻔했다. 하지만 감정의 변화를 드러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특히나, 가스팔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아르파드는 턱을 괴며 아무렇지 않게 대화의 방향을 돌리려 했다.
“글쎄. 그런 것치고는 부황은 오매불망 모후뿐이었지.”
“하긴, 덕분에 이자벨이 나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 록셀린 황후가 황족 출신이 아니었더라면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하고 연구했을지도 몰라.”
이 화제가 길어지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바로 본론을 끌어왔다.
가스팔이 내놓은 드래곤 하트를 쓱 밀어 버렸다.
마탑주의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걸로는 안 된다는 건가? 제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드래곤 하트인데?”
“그렇게 대단한 걸 당신은 왜 거래 대가로 내놓은 건데?”
나는 입꼬리를 자신만만하게 끌어올렸다.
“이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한 거잖아?”
“…….”
입을 다문 가스팔을 무시하고, 아르파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 위에 착하게 손을 올렸다.
나는 가스팔과 거리를 두기 위해 아르파드의 손을 테이블 밖으로 이끌었다.
이후 늘 가지고 다니는 호신용 단검을 들었다. 이걸로 아르파드의 손끝을 살짝 찌르면 된다.
“…….”
심호흡하고 다시 시도했는데도 힘들었다. 차라리 내 손 찔러서 피 뽑는 건 얼마든지 하겠는데.
내가 망설이고 있자니 아르파드가 칼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스스로 상처를 냈다.
손끝에 붉은 피가 맺혔다.
아르파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도리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난 것은 가스팔 쪽이었다.
아르파드의 손끝에서 피가 한 방울, 툭, 하고 떨어지려 했을 때.
“우왁! 이 귀한 걸……!”
가스팔은 몸을 날려 두 손으로 피 한 방울을 받아 냈다.
쿵! 데굴데굴……!
마법으로 막으면 될 텐데, 굳이 온몸을 날려 받아 낸 이유를 나는 잘 알았다.
‘마력 때문에 혈액이 변질할까 봐 걱정되어서 몸을 날린 거겠지.’
본의 아니지만 2회차 때의 경험으로 가스팔의 행동 원리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네가 간절히 바라던 역대 가장 진한 용혈을 물려받은 황족의 피. 거래 대가로 부족한가?”
그러자 가스팔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히 필요해! 진짜 대만족!”
“다행이네. 그러면 이쪽이 원하는 걸 말하도록 하지.”
“뭐? 대가는 이미 줬……!”
나는 아직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드래곤 하트 상자를 바닥에 떨어지도록 밀었다.
그러자 가스팔은 다시 경악한 얼굴로 등과 팔다리로 지하실 바닥을 필사적으로 닦으며 드래곤 하트도 받아 냈다.
“내 귀한 보물들에 무슨 짓이야!”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느라 구겨진 걸레 꼴이 된 가스팔을 비웃었다.
저 인간이 전생에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생각하면 이건 복수 축에도 못 들었다.
나는 아르파드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는 순순히, 신속하게 움직였다.
바닥에 누운 가스팔의 팔을 밟은 다음, 자신의 피를 다시 빼앗아 왔다.
“안 돼! 내놔!!! 나 준다면서!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
“난 준다고 한 적 없어. 네게 가지고 싶으냐고 물어본 것뿐이지.”
“설마…….”
“피 한 방울, 혹은 그 이상을 가지고 싶어?”
나는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일단 바닥 좀 기어 봐.”
그러자 아르파드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거들었다.
“당신은 너무 착해서 문제야. 이미 기고 있잖아. 다른 걸 시켜 봐야 진심을 확인할 수 있지.”
“그럼 어떻게 할까?”
“아, 힐리아의 구두가 더러워졌군. 너 때문에 이런 곳에 오느라 그런 모양이야. 핥아서 깨끗하게 해 봐. 그것부터 시작하지.”
“…….”
과연 이쪽(?)은 아르파드가 더 능숙했다.
그렇게 가스팔을 완전히 내 편…이라기보단, 아르파드의 피를 인질 삼아 부리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진짜 피 한두 방울만을 대가로 이렇게 만든 건 아니었다.
“팔 한쪽만 해부하게 해 줘! 어차피 안 죽잖아! 다 끝내고 예쁘게 꿰매 줄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난 당신이 원하는 거면 응할 수 있는데.”
“절대 안 돼요. 절대, 절대!”
아르파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대신 아르파드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마력으로 신체를 검사하는 정도는 허락해 줬다.
그 밖에도 몇 가지, 아르파드가 상처 입지 않는 조건의 실험을 약속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가스팔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은 당연히 없지.’
나는 그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다.
가스팔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밑지는 거래를 한 자의 표정이 절대 아니었다.
아마도 최소 3, 4가지 이상의 계산이 있을 거다.
그게 무엇인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했다.
* * *
마탑주는 나나 아르파드, 황제, 대공비도 미처 알지 못한 것까지 모조리 다 토해 냈다.
말하라고 한 적 없는 것까지.
같은 고향 출신이며, 같은 스승을 모셨다는 큰 의미 없는 말부터 꽤 오래전부터 황족의 광증을 이용해 왔다는 것까지.
“광증으로 사망한 황족의 신체 일부를 다른 황족에게 먹이면, 광증을 인위적으로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는 황실에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가스팔이 물려받은 마탑에는 대대로 이스트리드 황실의 용혈을 연구해 온 이들이 있었다.
드래곤은 마력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생물.
그 때문에 마법사들이 드래곤이나 그 혈통에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성과까지 얻었다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특히나 그 성과가 황족을 해하는 방향으로 이용당했다고는.
“선황후께서는 시녀에 의해 서거하시기 전까지 최소 3, 4년 이상 광증으로 사망한 황족의 유골 가루를 섭취하셨습니다. 그때는 광증으로 사망하셨다 알려진 일페논 대공의 유골을 사용했었지요. 일반인에겐 독이 아니기에 검식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을 겁니다.”
황제의 분노는 엄청났다.
“감히!!!”
우직!
대리석 바닥에 금이 갔다.
마탑주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하고 있는 것임에도 말이다. 무언가 다른 걸 믿고 있는 듯해 보였다.
“특히 가까운 혈족의 것을 사용하면 효과가 빠릅니다. 진홍월이 뜬 밤에 특수한 마법적 처리를 하면 더욱 그러하지요.”
가스팔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이자벨은 저에게 의뢰했습니다. 진홍월이 뜬 때에 환궁의 영묘에 침입하여, 선황후 폐하의 유골을 가져오라고 말입니다.”
“…!”
“전 선황후 폐하의 유골을 가져다준 대가로 황후 보관의 드래곤 하트를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반론하며 발악한 사람은 이자벨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르파드에 의해 입이 막힌 채 바닥에 제압당해 있었기 때문이다.
핏발 선 눈으로 발버둥 치며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으나, 증언의 중간에 끼어들지 못했다.
이를 대신한 건 그녀의 딸이었다.
에반젤린이 헐떡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거짓말입니다! 사실이라면 저자는 사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짓을 벌인 건데, 그걸 왜 자백하겠어요?!”
그녀는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던 건 황태자비가 아닙니까?! 다른 음모가 있을 수 있어요!”
“맞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마탑주를 조종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비오 대주교는 에반젤린을 부축한 채 나를 노려보며 거들었다.
바로 마탑주가 얄밉게 대꾸하여 그 말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저는 오래전부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협박당해 이자벨을 도왔는데, 우연히 황태자비께서 진실을 알고 저를 설득하셨지요. 양심에 따라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요.”
그는 짐짓 갸륵한 표정으로 술술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잘도 거짓말하네.’
아르파드의 피와 머리카락 기타 등등을 인질로 잡혀서 노예가 된 주제에.
“그, 그럼 조금만… 조금만 더 주세요! 그럼 이 지하실 전체를 혀로 핥아서 깨끗하게 해 드리지요!”
…정말 그걸 시키진 않았다.
그저 드래곤 하트를 받아 내고, 이자벨과 한 모든 짓을 전부 증언하기로 한 것뿐.
가스팔의 고발과 증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선황후 폐하의 유골을 훼손하여 가루 낸 것을 이번 수확제 때 황태자 전하께 먹이려 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광증을 부추기기 위해서지요.”
모친의 유골을 훼손해 그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소리다.
사방에서 그 수법의 악랄함에 대한 경악과 분노의 말들이 술렁거렸다.
아르파드가 말을 받아, 황제에게 직접 설명했다.
“그때 지모신의 신관이 제주(祭酒)에 이상한 짓을 한 듯했습니다. 물론 아내 덕분에 마시진 않았습니다만.”
“정말, 정말 다행이구나.”
시커멓게 물든 얼굴을 한 황제가 안도의 한숨을 다 쉴 새도 없이, 마탑주는 빙긋빙긋 웃으며 계속 말했다.
“제주뿐만이 아닙니다. 수확제 때에는 목욕재계를 많이 하고, 늘 유향을 피워 두지 않습니까.”
“설마!”
“예, 황태자 전하께서 쓰실 목욕물과 주변의 향로에 선황후 폐하의 유골이 잔뜩 섞여 있었습니다.”
내내 몸을 떨며 버티던 대공비는 그대로 쓰러졌다.
“대공비 전하!”
“할머님!”
이세핀이 대공비를 부축해 휴게실로 데리고 나갔다.
곧이어 마탑주의 고발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벨테인 경과 뮤젠 경이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 폐하. 명하신 대로 신탁을 위한 행사가 시작된 직후 황후궁을 수색하여 확보한 증거입니다.”
뮤젠 경이 검은 비단에 싼 물건을 들어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는 손을 덜덜 떨며 비단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 위에 떨어진 것은 선황후의 관에 함께 매장되어 있어야 할 반지였다.
“…!”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