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황후는 당혹감을 능숙하게 감췄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듯 항변하기 시작했다.
“대공비가 저에게 악감정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누명까지 씌우려 할 줄은 몰랐습니다.”
황후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허리를 곧게 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은 대공비의 입으로 나오지 않았다.
황제의 노호가 먼저였다.
“닥쳐라!”
“…?”
황후는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녀와 대공비의 대립에 황제는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황후가 윗사람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황후가 황제의 노성에 주춤하며 고개를 돌렸다.
황제의 서늘한 눈과 마주친 순간, 황후는 깨달았다.
‘대공비의 고발을, 이미 알고 있었어?’
새삼 신전에 온 황제가 내내 표정을 굳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서늘하다 못해 얼음장보다 차가운 살기를 보였다.
‘설마 신전에 들기 전부터 확신하고 있었던 거야?’
깨달음과 동시에 황후는 의문이 들었다.
황제를 누가 설득했든, 대공비와 어떤 공모를 했든 상관없었다.
‘내가 록셀린을 죽였다는 걸 알았다면… 황제가 왜 날 살려 두는 거지?’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잘 알았다.
그가 자신을 황후 자리에 올린 것도, 죽이지 않은 것도, 선황후의 죽음 원인에 자신이 얽혀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아예 상상도 한 적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아주 미약한 의심이나 가능성이라도 떠올렸다면 황제는 자신을 절대 살려 두지 않았을 테다.
만일 어제 알았다면 어제 죽였을 것이고, 오늘 아침에 알았다면 아침에 그녀는 산목숨이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지금 황제의 반응을 보면 이전에 대공비의 고발 내용에 대해 들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살려 뒀다고?
이게 도리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근래 황제는 20년 넘게 지켜 온 원칙을 한두 번 깨트린 게 아니었다.
황제 발터 이스트리드답지 않은 모든 행동은 황태자비가 끼어든 이후부터였다.
그때부터 모든 게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황후는 멍하니 황제를 보다가 그 옆에 선 아르파드와 힐리아를 보았다.
그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너구나…….”
황후는 곧 힐리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을 온통 차지한 사람은 황제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이자, 이름뿐인 남편으로, 끝내 한시도 자신을 아내로 받아들여 주지 않은 남자.
원망과 증오,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애정의 편린이 남은 눈이 황제를 노려봤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이런 순간이 올 거라 각오하고 있었다.
그때가 오면 어떻게 할지 수없이 고민했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꽤 오래전에.
따라서 준비 역시 이미 끝나 있었다.
황후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말려 올라갔다. 광기까지 느껴지는 표정.
삶에 대한 미련이나, 그토록 집착한 황후 자리, 그리고 황실에서 록셀린의 혈통을 끊어 버리겠다는 욕망마저 잠시 잊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황제가 진실을 안 순간, 더는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장 간편하고 또 치명적인 보복 방법을 알았다.
‘원수에게 분풀이도 못 하고 죽어 버리는 꼴을 보여 주지.’
황제가 그걸 가장 원통해하고 분노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누구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돌발 행동을 황후가 벌이려 했다.
그녀는 늘 끼고 다니는 반지의 보석을 돌려, 거기 들어 있던 작은 알약을 삼키려 했다.
‘독?!’
생각의 속도는 빨랐으나, 손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힐리아는 황후의 자결을 막으려 손을 뻗었으나, 허공을 쥐었을 뿐이다.
“안……!”
하지만 힐리아가 낭패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원수를 앞에 둔 황제와 대공비가 원통해할 일 역시.
“아악!!!”
생각과 몸의 속도가 큰 차이 나지 않는 사람이 여기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파드는 황후의 손목을 잡아 무자비하게 꺾었다.
황후의 입에 들어가지 못한 독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르파드는 손수건으로 계모의 입을 막아 추가적인 자해를 막았다.
“으읍―!!”
이자벨은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황제 역시 어느새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아들이 더 빨랐고, 먼저 이자벨을 제압했기에 그가 직접 손을 쓰진 않았다.
아르파드가 아니었다면 황제가 직접 이자벨의 자살을 막았으리라.
그는 증오와 원한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이자벨을 노려보았다.
대공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르파드는 이자벨을 제압하느라, 다른 두 사람은 원수를 앞에 두고 증오심에 주의를 다 빼앗긴 상태였다.
특히 대공비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조카 손녀인 이세핀에게 기대어 겨우 서 있는 상황.
그 때문에 주변에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힐리아 뿐이었다.
“…이 자체가 죄인의 자백이나 마찬가지군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에반젤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정하려 했다.
“죄인이라니! 내 어머니는 황후이셔! 황제 폐하의……!”
이 말에 황제가 나름대로 억누르고 있던 살기가 가감 없이 터져 나왔다.
“황후?! 누가 황후란 말이냐!!!”
“…!”
일반인은 견디기 힘든 살기였다.
광증을 거의 보인 적 없는 황제가 일반인이 고통스러워할 살기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춘 건 처음이다.
에반젤린은 경악과 고통으로 헐떡거렸다.
“어헉!”
대주교의 신성력으로 인한 보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에반젤린은 배 속 아이가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몸속에서 날카로운 바늘 수백 개가 찌르는 듯한 고통이 혈관을 타고 달렸다.
그녀는 배를 안고 허리를 굽혔다.
“큽! 아악!”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건강과 아이의 상태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의 주인공이 되었어야 마땅한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사이, 힐리아의 침착하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대공비 전하께서 감정이 격하시어, 죄인의 범죄에 대한 증거를 마저 설명하기 힘들어하시니 제가 대신하지요.”
입이 막히고 바닥에 짓눌린 이자벨의 핏발 선 눈이 데록 굴러서 힐리아를 노려보았다.
힐리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시녀 애니에게 명했다.
“증거를 가져오렴.”
“예, 비 전하.”
애니가 한 상자를 가져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보석이었다.
무엇인지 깨달은 이가 경악하여 외친다.
“드래곤 하트!”
힐리아는 칭찬하듯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웃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드래곤 하트지요. 아르타누스께서 황실에 내린 보물 중에서도 손꼽히는 것. 이건 바로 황후의 보관에 박혀 있던 그 드래곤 하트입니다.”
경악과 술렁거림이 사방에 번졌다.
“맞아요. 본 적 있어요. 황…가 티파티에서 보관을 보여 준 적 있었어!”
상황 판단이 빠른 이들은 이자벨을 황후라 부르려다가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이자벨은 이미 쫓겨난 것과 다름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잠깐, 보관의 드래곤 하트가 왜 황태자비 전하의 손에 있는 거지?”
“내궁 관리권을 비 전하께 빼앗겼을 때 준 건가?”
“아니에요. 그때 오고 간 건 백금 열쇠뿐인 걸로 압니다. 보관은 그대로 황후궁에 있었어요!”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황후가 드래곤 하트를 유출했다는 게 된다.
대체 어떻게? 왜? 누구에게?
의문이 사방에서 치솟았다.
그것에 답하듯 힐리아는 딱, 하고 손가락을 울렸다.
“소개하도록 하지. 죄인 이자벨의 공범이자 증인을.”
연이어 그녀의 부름이 짜랑짜랑 신전 안을 울렸다.
“마탑주, 가스팔.”
문이 열리고, 회색 로브로 온몸을 가린 수상한 남자가 들어섰다.
이를 보고 이자벨과 에반젤린, 비오 대주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가스팔은 후드 아래로 뻔뻔하게 웃고 있었다.
그와 힐리아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마주쳤다.
* * *
내가 가스팔을 회유한 것은 꽤 된 일이다.
나와 아르파드의 실종 이전, 3개월보다 좀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막 생기기 시작한 페니 테라스 본점의 비밀 공간에서 나는 가스팔과 만났었다.
‘그때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었었지.’
얻었다, 라기보다는 ‘샀다’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테지만.
그때 가스팔은 드래곤 하트를 보여 주며 나에게 물었다.
“이거면 거래할 마음이 들까? 황후의 보관에 박혀 있어야 하는 드래곤 하트. 네가 원할만한 물건일 텐데.”
“…이게 어떻게 당신 손에 있지? 설마 황후가 내주기라도 한 거야?”
“영업 기밀이라.”
가스팔은 징그럽게 웃으며 내가 아닌 옆을 보며 물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는 이미 알 테고.”
그 시선을 받으며 끔찍한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아르파드였다.
아르파드는 전적으로 나 때문에 살기를 억누르고 상황을 참고 있었다.
가스팔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무서울 정도로 아르파드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먼저 그렇게 말한 건 당신이잖아? ‘남편을 가지고 싶으면, 아내의 허락을 받아라’였나?”
“…….”
가스팔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거래를 제안해 오지 않을까, 하는 예상은 당연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예상외였다.
“정말… 정말 날 팔아넘기려는 건가?”
원망과 서러움이 가득한 아르파드의 반응은 예상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