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에반젤린의 깨달음은 한 발 느렸다.
아르파드가 내민 손은 그녀를 향한 구원의 손길 따위가 아니었다.
아르파드의 거친 손길은 에반젤린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베일을 벗겨 버렸다.
그녀가 저항하려 했으나 너무 늦은 반응이었고, 힘도 부족했다.
휙! 베일이 찢겨 나가며 에반젤린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악!”
에반젤린은 비명을 지르며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이들은 그녀의 얼굴 반절에 있는 흉터를 보았다.
사실 그동안 에반젤린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베일로 얼굴 반을 가리고 다니는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때때로 베일 아래로 흉터의 흔적을 직접 본 이들도 있었다.
수군거림이 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저 흉터는 뭘까요?”
“세 달 전쯤부터 보인 것 같던데.”
“그전에도 베일은 종종 쓰지 않았나?”
“하지만 얼굴 반만 가린 채 계속 쓰기 시작한 건 3개월 전부터야.”
연이어 호기심과 기대감 어린 시선이 두 남녀에게 향했다.
에반젤린이 3개월간 쭉 주장해 온 말 때문이다.
“제 배 속 아이는 아르파드 황태자 전하의 아이니까요!”
그 말대로라면, 아르파드와 에반젤린은 비밀스러운 연인 사이였다는 게 되지 않은가.
에반젤린이 품은 아이의 아버지를 두고 말이 많았는데, 당사자인 아르파드 황태자가 돌아온 이상 이제 확실해졌다.
그때 아르파드의 입에서 잔뜩 비틀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풋, 하하하!”
신전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는 듣는 이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이 황태자가 드디어 미쳐 버린 게 아닌가, 다들 그런 생각부터 떠올렸기 때문이다.
에반젤린은 그런 아르파드를 보며 경기를 일으키곤 도망가려 했다.
“아악! 아아악! 안 돼!!! 또 날 물어뜯을 거야!!!”
대주교는 발악하는 에반젤린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성녀님! 정신 차리십시오! 성녀님!!”
광기 어린 웃음으로 사방에 공포를 불러일으킨 아르파드는 갑자기 뚝 멈췄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신전 사고 날, 나에게 물어뜯긴 상처는 꽤 많이 나은 듯하군.”
경악이 사방에 번졌다.
“저 흉터가 황태자 전하가 만든 거라고?”
“게다가 방금 두려워하던 모습을 보면…….”
조금 전 에반젤린이 아르파드를 두려워하며 발작하던 모습은 누가 봐도 살아 돌아온 연인에 대한 태도가 아니었다.
“아아악!!!”
에반젤린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날 밤, 생살을 물어 뜯겼던 때의 공포와 아픔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옆에서 대주교가 그녀를 필사적으로 다독여 정신을 차리게 했을 때는 주변의 분위기가 완전히 한쪽으로 기운 뒤였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고개를 든 그녀는 사방에 조롱과 적의 어린 시선만이 가득한 것을 보고 당황했다.
‘뭐, 뭐야?’
다 들으라는 듯 수군거림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뻔뻔해라. 역시 거짓말이었군요.”
“저는 처음부터 안 믿었어요. 황태자께서 얼마나 비 전하를 아끼시는지 봤으니까.”
“그나저나 루드비히 대공과 불륜을 저지르며, 아이 아버지가 황태자 전하라고 거짓말하다니. 일부러 비 전하의 남자들만 빼앗으려 드는 것 같네요.”
“어머. 정말요. 가끔 그런 여자들 있잖아요. 친구의 남자만 뺏으려 드는…….”
“세상에, 망측해라. 황후께서 딸을 잘 못 기르셨네요.”
경멸과 조롱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에반젤린이 뒤늦게 수습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저는……!”
아르파드가 에반젤린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 배 속 아이가 내 씨라고 주장했다지?”
“……!”
날카롭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입꼬리는 명백히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나를 사생아나 만드는 작자로 몰다니. 그게 반역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에반젤린은 공포로 몸이 굳은 상태에서도 억지를 그만두지 않았다.
“아, 아냐! 당신 아이잖아! 이 아이는 황태자의 아이라고! 황실의 핏줄이야!”
“그게 정말 황실의 핏줄이라면 루드비히 놈의 아이겠지. 황실의 혈통이 맞다면 말이다. 사실 네 주변에 다른 사내들이야 많지 않나. 지금 옆에 있는 대주교도 그렇고.”
이 말에 비오가 노호를 터뜨렸다.
“말이 심하십니다, 전하! 천주신의 제단 앞에서 그 종을 모욕하시는 겁니까?!”
“먼저 모욕당한 건 이쪽이라서. 내 명예에 먹칠하는 걸 도운 자의 명예를 내가 왜 지켜 줘야 하지?”
“전하!”
아르파드는 비오 대주교를 무시하고 에반젤린에게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너에게 손끝 하나 댄 적 없다. 아, 아닌가. 딱 한 번 있었군. 네가 내 아내인 척 접근한 그 순간뿐이었지.”
“그래, 그때……!”
“아니, 그때 내가 너에게 한 거라곤 그 뺨에 상처를 낸 게 전부야. 설마 그 일로 아이가 생겼다는 건 아니겠지?”
아르파드는 노골적으로 에반젤린을 비웃었고, 이 조롱 어린 웃음은 사방으로 번졌다.
“게다가 그때 생긴 아이라기엔 배가 너무 크지 않나? 신전에서의 일은 겨우 세 달 전인데 말이야.”
아르파드는 황제에게 말했다.
“부황의 앞에서 맹세하지요. 저는 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서 사생아를 낳은 적도, 앞으로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 후계는 황태자비의 소생 외에는 절대 있을 수 없고, 인정치도 않을 것입니다.”
매우 무거운 선언이었다.
만일 힐리아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해도, 아르파드는 다른 여인에게서 후계를 보지 않겠다는 의미니까.
당연히 에반젤린이 낳을 아이는 절대 아르파드의 혈손으로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파드는 고개를 돌려 제 아내에게 다가가 손등에 짙게 키스하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힐리아. 이런 일을 당하게 만들다니. 내 면목이 없어.”
힐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는 전하께서 그러실 리 없다고 굳게 믿으니까요.”
다시금 주위 상황과 상관없이 둘만의 세상을 만드는 두 사람이었다.
누가 봐도 더 좋을 수 없으리만치 금실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했다.
에반젤린은 멍하니 그 꼴을 바라보면서 바닥을 긁었다.
“아, 아냐. 이건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딸이 완전히 넋을 놓은 듯하자, 황후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에반젤린 배 속 아이는 황실의 핏줄임이 분명합니다.”
황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황후를 노려보았다.
순간, 황후는 다리가 푹 꺾일 듯한 살기를 느꼈다.
“윽…….”
간신히 설 수 있었지만, 그야말로 요행이었다.
황제는 한 번도 그녀에게 다정했던 적이 없었다.
주변에 선 시종이나 시녀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을 그녀에게 보이곤 했다.
최근 아르파드의 실종 때 한층 적의 어린 태도를 드러냈지만, 이런 살기는 처음이다.
불길한 섬뜩함이 황후 이자벨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하지만 길게 비참해하고 골몰할 여유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에반젤린이 계속 제 아이의 아버지가 아르파드라고 우기는 건 역효과를 부를 수밖에 없다.
‘이래서 내가 루드비히의 아이라 발표하자고 했거늘!’
그녀는 딸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저 아이는 루드비히 대공의 아이입니다. 황실의 혈통임이 분명하고, 태어난 이후에 용혈의 소유자임을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황후는 침착했다.
“딸아이가 제 연심을 주체 못 해 잠시 착란을 벌인 모양입니다.”
의도적으로 속이려 한 게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잘못을 축소하는 것이기도 했고, 또한 에반젤린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만들어 자신이 황손의 후견인이 되려는 계략이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사실만을 지적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아이이든, 루드비히 대공의 아이이든, 용혈의 후예임은 분명하지요. 반역은 과합니다.”
대주교가 황후를 거들었다.
“맞습니다. 그리고 천주신께서 축복하신 황손이심도 분명합니다.”
비오는 아르파드 덕분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잠시 사라졌던 신탁을 다시 화제로 가져왔다.
“아까 기적을 모두 보지 않으셨습니까! 신탁은 성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황실의 저주를 풀어 줄 것이라 하였습니다!”
웅성거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힐리아와 아르파드가 중간에 등장하고, 신성언을 가로채면서 잠시 혼란이 있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분명히 신탁을 입에 담았고,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역시 신탁은 에반젤린에게 내려진 게 맞지 않는가?
이런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려는 찰나였다.
힐리아가 엄숙하게 말했다.
“갑작스럽지만 저 역시 신탁을 들었습니다.”
“뭐라고?”
“말도 안 돼!”
에반젤린이 눈을 홉뜨고 외쳤다.
“거짓말 마!!! 네가 신탁을 들었을 리 없어!”
발악하는 에반젤린을 비웃으며, 힐리아는 신탁을 전했다.
“그림자에 가려 있던 죄가 태양 아래 드러나리니. 거짓된 여인들이 단죄받으리라.”
“…!”
에반젤린은 송곳이 척추를 찌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저 거짓 신탁은 자신을 목적으로 날조한 게 틀림없었다.
그걸 대놓고 말할 수는 없다.
혼란이 일었다.
“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지?”
“양쪽 모두 신탁일 리는 없잖아.”
“에반젤린 양이 먼저 말했으니…….”
“먼저 말했다고 그게 올바른 신탁이라는 보장은 없어요.”
당혹과 혼란으로 잠시 상황이 멈춘 그때.
기다렸다는 듯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노부인의 위엄에 사람들은 스스로 길을 내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수월하게 제단 앞으로 올 수 있었다.
“악시온 대공비!”
아르파드의 외조모이자, 죽은 선황후 록셀린의 모친.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황후를 노려보며 외쳤다.
“나는 내 딸을 죽인 죄인을 고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녀의 주름진 손은 황후 이자벨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