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그때 에반젤린의 눈에 더없이 평온한 황제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죽은 줄 알았던 아들과 며느리가 살아 돌아온 걸 보고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황제는 사전에 힐리아와 아르파드와 연락을 주고받은 게 분명했다.
억울함과 분노가 울컥 치솟는다.
뒤늦은 깨달음이 연이었다.
‘설마, 이 순간에 밝히기 위해서 신탁을 황궁에서 받겠다는 요청을 받아들인 건가?’
그래야 자신이 더 곤란해지고 바보 같아지니까?
힐리아가 떠올릴 법한 악의였다.
에반젤린은 이를 눈치챈 순간, 대주교의 팔을 잡았다.
그에게 빨리 신탁의 증거, 준비해 둔 기적을 발동시키라 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힐리아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열리며, 신성언이 낭랑하게 신전 안 공기를 울렸다.
바로 조금 전, 에반젤린이 중얼거린 말을 신성언으로 번역하여 읊은 것이다.
-미천한 종이 청하나니. 계시를 내려 주소서.
대주교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이런……!”
그와 에반젤린이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 일’이 벌어졌다.
신전 안 제단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력이나 다른 힘으로 인한 것도 아니었다.
흘러넘칠 정도로 충만한 신성력. 대주교가 가진 일부 신물의 신성력까지 끌어다 만들어 낸 ‘가짜 신탁’의 증거가 될 ‘가짜 기적’이었다.
그 빛은 몇 겹의 건물을 뚫고 저 먼 곳까지 찬란하게 빛났다.
* * *
제단이 눈부신 푸른빛으로 빛나는 걸 보며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러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두 번째 생에서 나는 신전에서 꽤 오래 생활했었다.
덕분에 신성력과 신성언에 대한 지식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대주교와 에반젤린이 자신 있게 신탁을 거론한 이상, 뭔가를 준비해 놨을 거라 생각했지.’
대부분 신성력은 신성언을 통해 발동된다.
신성언을 생략하는 건 아주 간단한 신성력의 사용이거나, 혹은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할 때뿐이다.
사람들 눈에 이견 없이 기적으로 보이려면 대규모이니 당연히 신성언 발동이 필요했다.
“미천한 종이 청하나니. 계시를 내려 주소서.”
누가 들어도 신탁을 청하는 말.
에반젤린은 이 상황에서도 신성언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 내용을 신성언으로 바꾸면 가짜 기적이 발동될 거라 생각한 내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에반젤린의 말과 대주교의 발동 사이에 끼어들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기적을 가로채는 데 성공했어.’
이걸로 기적에 관한 권리 일부를 주장하는 게 가능해졌다.
나는 재수 없는 웃음을 입가에 가득 머금었다.
꽤 떨어진 에반젤린에게 제대로 보이도록.
“세상에!”
“오오! 정말로! 기적이다!”
“신전의 말대로야! 신탁의 증거다!”
사방에서 환성이 울리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국은 국교가 없었고, 종교는 어디까지나 개인 선택이다.
따라서 이곳에 모인 이들은 원래부터 천주신의 신앙을 가졌거나, 혹은 몇백 년 만의 신탁을 궁금해했다.
원래 천주신을 믿던 이들은 기적에 감격했으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잠깐, 그런데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께서 돌아오셨잖아?”
“게다가 조금 전 기적, 황태자비께서 말씀하신 직후에 벌어진 것 아닌가?”
“그럼 기적은 비 전하께 내려진 게 맞지 않아?”
에반젤린과 대주교가 가장 두려워하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주신의 신관이 강하게 반발했다.
“성녀께서 먼저 신께 신탁을 청하셨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이 내려진 겁니다!”
“아니! 하지만 루스 영애의 말이 아니라, 황태자비 전하의 신성언에 반응하듯 일어나지 않았나요?”
“아, 방금 비 전하께서 말씀하신 게 신성언인가요?”
“잠깐, 그럼 조금 전의 기적은 비전하의 청에 반응한 거 아닌가요?”
“아니지! 에반젤린 님께 신탁이 내릴 거라고 며칠 전부터 얘기가 있었지 않습니까!”
“하지만 타이밍이……!”
갑론을박이 사방에서 벌어졌다.
에반젤린도 대주교도 절대 바란 상황이 아닐 거다.
에반젤린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휘청거리는 게 보였다.
대주교가 그녀를 부축했으나, 얼굴의 반을 가린 검은 베일이 펄럭거리며 흉터가 드러났다.
그러자 에반젤린은 히스테릭하게 베일을 잡아당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려면 당장 움직여도 모자를 텐데 말이다.
나는 웃으면서 또 끼어들어 사방의 주목을 끌어왔다.
그동안 꽤 이미지를 소모한 에반젤린과 죽은 줄 알았다가 아르파드와 함께 살아 돌아온 나.
입을 열 때의 주목도가 아예 달랐다.
“위대한 아르타누스와 천주신, 지모신의 보살핌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부황 폐하.”
“귀환을 보고드립니다.”
나도 아르파드도 황제와 미리 연락한 적 없는 척했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
어제 우리와 미리 서간을 주고받은 뒤에야 황궁 내 신탁을 허락한 적 없는 것처럼.
그야말로 모범적인 가족 사기단이다.
“어서 오너라. 아르파드. 힐리아. 너희가 무사할 거라 믿고 있었다.”
황제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렸다. 우리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기뻐하던 조금 전과 달리 감정이 벅차오른 듯했다.
이제는 참을 필요가 없으니 마음껏 드러내는 듯했다.
‘그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황제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아르파드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나는 부자의 상봉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았고, 사방에서는 예상 못 한 상황에 경악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르파드도, 황제도 감정이나 애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니 낯선 광경일 거다.
아마 이전의 아르파드라면 황제를 밀쳐 내거나 피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버지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아르파드의 표정을 이제 제법 잘 읽는다고 자부하는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놀랍게도 황제는 아르파드를 놓아준 뒤 나 역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고맙다.”
마치 내가 아르파드를 구해서 데려다주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닌데 말이야.’
남들 눈이 있는 상황에서 이걸 부정하는 건 적절하지 못했다.
나는 민망함을 버리고 뻔뻔해지기로 했다. 환하게 웃으며 황제를 마주 안았다.
제단 앞, 억울함과 분노로 부들거리는 에반젤린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에반젤린이 발악하듯 비명을 지른 건.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광증은 천주신께서 신을 잊은 인간에게 내린 저주일지니!”
이 발악은 신전 안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일시에 긁어모으는 데 효과적이었다.
“성녀의 몸을 통해 태어날 죄 없이 깨끗한 황족이 금빛 옥좌에 앉는 날, 황가에 내려온 저주는 끝이 나리라!!”
마지막은 거의 악을 쓰는 듯했다.
그 때문에 에반젤린이 입 밖에 낸 게 신탁의 내용이라는 걸 사람들은 뒤늦게 눈치챘다.
“잠깐, 저거… 신탁 아닌가요?”
“분명히 내용은 그런데…….”
“그런데, 조금 전 기적은 비 전하께 응답한 게 아닌가요?”
“아니죠! 천주신의 신전에서 루스 영애를 성녀라고 주장했으니까…….”
에반젤린이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조금 전의 기적을 모두 보지 않았나요? 천주신께서 방금 나에게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웅성거림이 퍼졌다.
에반젤린은 부풀어 오른 배를 내밀며 다시 외쳤다.
“이 아이가 장차 황위를 이어받아 황실에 오래된 저주를 끝내리라고―!!”
그 순간, 아르파드가 나섰다.
“그 아이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이지.”
“…!”
* * *
신전의 유리 천장은 늘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게 했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라, 햇볕은 신전 안으로 뜨겁게 내리꽂혔다.
덕분에 아르파드는 빛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쭉 걸어왔다.
신전 안을 빼곡히 메우고 있던 이들이 스스로 갈라지며, 아르파드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저절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그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에반젤린의 바로 앞에 섰다.
햇살이 마치 광휘처럼 내리쬐면서 아르파드의 백금발이 신성하게 보일 정도로 빛났다.
상아빛 피부는 진주 가루를 바른 듯 빛났고, 날카로운 콧날과 베일 듯한 턱선은 더없이 유려했다.
사람의 시선을 가장 잡아끄는 건 둥글게 깊이 파인 눈두덩에 드리운 우아한 그늘이었다.
태양의 심장을 조각해 박은 듯한 눈동자를 더더욱 빛나게 하려고 세심하게 계산한 듯 보일 정도였다.
아르파드의 우미한 입매에는 매혹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보는 이를 영혼까지 잡아 끌어당기는 듯한 미소.
에반젤린은 처한 상황을 잠시 잊고, 그 미소에 홀렸다.
자신이 아르파드를 죽이려 했었음도 까맣게 잊었다. 그리고 아르파드가 힐리아로 변장한 그녀의 뺨을 물어뜯었던 것마저 잊었다.
아직도 뺨의 흉터에는 가려움과 통증이 남아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르파드는 힐리아를 놔둔 채,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르파드가 매혹적으로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제 손을 잡은 대주교의 손을 놔 버렸다.
옆에서 다급하게 말하는 소리도 무시했다.
“…안 됩니다!”
에반젤린은 저도 모르게 아르파드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를 부르면서.
“아르파……!”
그리고 정면에서 차가운 경멸 외에 아무것도 없는 눈빛을 마주하고서야 겨우 현실을 깨달았다.
절대, 이 아름다운 남자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자신을 위해 가까이 다가왔을 리 없다는 것도.
등줄기가 오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