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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58화 (158/210)

158화

천주신의 신전에서 시작된 신탁에 대한 소문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르게 퍼졌다.

에반젤린에게 붙은 비공식적인 수식어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사교계의 꽃.

축복받은 비의 성녀.

유일한 황손의 어머니.

그리고 신탁의 성녀.

고대 이후로 신탁이 내리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국이 세워진 후 신들의 영향력은 더더욱 약해져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식 신탁으로 인정받으려면 기적이 함께해야 했다.

약 5,600년 사이 기적이나 신탁이 인정받은 적은 없었다.

당연히 정식 성녀로 인정받은 이도 없었다.

지금 에반젤린은 비오 대주교의 영향력하에 성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는 있었다.

에반젤린은 신물 <운명의 서>의 존재를 공개하고 자신이 성녀임을 공인받기를 바랐다.

하지만 비오 대주교는 시기상조라며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누구도 <운명의 서>의 신성함과 그 힘을 감히 부정하지 못하게 될 때 드러내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운명의 서>는 절대적인 신물입니다. 이걸 본 자들은 ‘운명의 주인’을 숭배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빨리 밝혀야 하는 거잖아. 내가 운명의 주인이라고!”

그래야 자신이 지위에 걸맞은 대우를 제대로 받지 않겠는가.

‘미래 황제의 어머니이자, 다섯 여신에게 선택받은 운명의 주인! 그게 나인 거잖아!’

그런데도 <운명의 서>에 대해 밝히지 않는 대주교의 소극적인 태도가 불만이었다.

운명의 주인인 자신을 위해, 뭐든 다 해야 하지 않나?

모든 영광과 애정, 경외, 숭상, 경모.

에반젤린은 뭐든 다 원했다.

주인공에게는 당연히 그 모든 것이 주어져야 하지 않은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당연히 그 모든 반짝이는 애정이 한몸에 쏟아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여전히 에반젤린을 인정하지 않았고, 제대로 아는 것 없는 주제에 평민들은 헛소리만을 지껄였다.

‘내 아이가 루드비히 따위 놈의 아이라니. 수치야!’

황태자비로 인정받고, 아이가 황가의 후계자로 인정되면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를 지껄이는 것들을 전부 베어 버릴 테다.

에반젤린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히죽거렸다.

그러자 비오 대주교가 다가와 물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아직도 얼굴이 당겨.”

에반젤린은 아르파드에게 물린 흉터를 긁었다.

손끝이 흉터를 긁어 피가 흐르는 걸 보면서도 비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려 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제대로 치료를 못 했기 때문이라며 역정만 내겠지.

어차피 에반젤린의 외모는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정당하게 황위를 장악할 아이를 품고 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특히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다.

오늘 황궁 내 천주신의 신전에서 신탁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신탁인 것은 아니다. 신탁이 언제 내릴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대주교인 비오는 에반젤린에게 곧 신탁을 내릴 거라는 천주신의 뜻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황궁 내 천주신의 신전을 장소로 내어 달라 말하자 황제는 진노했다.

“감히 황궁 안에서 신탁을 받겠다? 황실의 권위를 뭐로 보기에 이따위로 무도한 요구를 한단 말인가! 천주신의 신탁이라면, 천주신의 대신전에서 받으면 그만일 것을!”

“하나, 이번 신탁은 황실에도 중요한 일입니다. 황궁 내에 있는 신전 역시도 결국은 천주신의 제단이 선 곳이 아닙니까.”

“황실에도 중요하다? 하! 너희가 황실의 후계 문제에 개입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황제는 완강했다.

하지만 황태자 자리가 빈 지 3개월이 지났다.

제국민은 물론이요, 대륙 전체의 불안이 극에 달해 있었다.

현 황제가 죽은 뒤 그 뒤를 이을 용혈의 황족이 없다면, 아르타누아 대평원은 불모의 땅이 될 것이다.

이건 대륙 전체에 큰 위협.

사방에서 에반젤린의 배 속 아이를 인정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압박이 오고 있었다.

본디 아르타누아 평원의 소유권 문제는 제국이 타국에 대한 우위를 인정받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반대로 황제의 의사를 막는 함정이 되었다.

타국 입장에서는 누가 황제 자리에 있던 아르타누아 평원만 무사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제국에 비해 타 왕국들은 교단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

그들로서는 천주신의 영향력하에 있는 차기 황위 계승자의 존재는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이런 움직임은 제국 내에서도 있었다.

테슬란 공작이 보내온 상소에 황제는 진노했다.

정중한 체하고 있었으나, 결국 에반젤린의 아이를 인정하라는 말이었다.

북쪽 얼어붙은 땅에 있는 테슬란 공작가는 공국을 지배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제국의 지배 아래 있으나, 확실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다른 귀족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게다가 척박한 북쪽 땅에선 곡물이 나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 아르타누아 평원의 작황에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신경을 쓰는 게 바로 테슬란 공국일 수밖에 없었다.

상소에 황제의 진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지만, 계속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는 에반젤린과 비오 대주교의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결국 황궁 신전에서 신탁을 받으라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에반젤린은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힐리아가 아르타누스 홀에서 피로연을 열도록 허락받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지도…….’

그러자 조금 아쉬웠다.

오늘 이 모습을, 자신이 당당하게 승리하는 걸 그 눈으로 보게 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힐리아의 존재가 얼마나 방해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역시 죽어 버린 게 나았다.

‘살아남아서 승리하는 건 결국 나라고.’

에반젤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뎅― 뎅― 뎅―!

천주신의 신전에서 백금으로 된 종이 울리는 청아한 소리가 났다.

황궁 내에서 황족들이 기도할 때에만 사용하는 곳이다 보니 규모가 꽤 작았다.

황실에서 조상이자 권위의 원천인 아르타누스를 숭배하긴 했으나, 그건 종교적인 믿음은 아니었다. 위인을 기리는 것과 비슷한 일.

그 때문에 종교의 영향력이 약할지언정 없을 수는 없었다.

황궁 내에 천주신의 신전이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에반젤린이 황후와 비오 대주교 및 수많은 신관을 이끌고 신전으로 향하는 길에는 귀족들이 몰려와 있었다.

신전이 좁다 보니 미처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신탁이라는 세기의 사건을 가까이 보고 싶어서 몰려든 이들이었다.

그들은 에반젤린을 경외감이 반짝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성녀라고 하셨지?”

“신탁이 내린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최초로 신과 아르타누스께 모두 축복받은 황실의 후계자가 태어나는 건가?”

“나도 축복을 나눠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몰려든 귀족들은 일사불란하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황족에게 하는 예의다.

황후가 함께하고 있었으니 당연했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귀족들이 보이는 경의는 황후가 아니라 에반젤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결국 황후마저 조금 압도되어 딸의 뒤에서 수행하듯 걸어가게 되었다.

막 천주신의 신전에 도착했을 때 에반젤린의 희열은 극에 달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이 신전 안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한 제단을 올려다보고 있는 황제였다.

황후를 비롯한 일행은 모두 경악했다.

에반젤린은 생긋생긋 웃으며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뭐라 말하기도 전에 몸을 날리듯 황제의 품에 매달렸다.

“정말 기뻐요, 황제 폐하!”

“…….”

황제는 딱딱한 시선으로 자신에게 매달린 에반젤린을 보고 있었다.

마주 안아 주거나, 무거운 몸을 걱정하며 받아 주지 않았다.

에반젤린은 작게 투정을 부렸다.

“좀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지 않는 거예요? 그래도 전 폐하의 의붓딸이고, 이제는 며느리가 될 텐데요.”

“내 며느리는 네가 아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대답에도 에반젤린은 굴하지 않았다.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하지만 폐하의 하나뿐인 손자의 어머니는 저예요. 그러니 제가 폐하의 며느리일 수밖에요.”

황제의 냉랭함은 조금의 변함도 없었다.

“나는 너도, 그 아이도 인정한 적 없다.”

평소라면 모욕감을 느끼고 치를 떨었으리라. 하지만 에반젤린은 만면에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폐하께선 황궁 내 신전에서 신탁을 받기를 허락하셨고, 직접 발걸음까지 하셨잖아요?”

“…….”

“그것이 곧 저에 대한 인정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

내내 에반젤린에게 차갑게 쏘아붙이던 황제도 이 말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에반젤린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사실이니까.’

그런 에반젤린을 비오 대주교가 부축하며 재촉했다.

“자, 시작하시지요.”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급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기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탁에는 눈에 띄는 기적이 있어야 했다.

당연히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모두가 인정할 만큼 거대하고 화려한 기적을 보여야 하니 준비도, 희생도 엄청났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않으면 그들이 3개월간 고생한 일이, 이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희생은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에반젤린은 제단 앞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미천한 종이 청하나니. 계시를 내려 주소서.”

에반젤린은 신성언을 결국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 때문에 가짜 기적의 발동을 위한 간단한 신성언조차 제대로 외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비오 대주교가 옆에서 함께 기도문을 외듯 발동시키면 그만이니까.

그 순간이었다.

신전 입구에서 난데없는 소란스러움이 번지기 시작했다.

에반젤린은 분노 가득한 고개를 들어 신전의 입구를 노려보다가 경악했다.

“뭐, 뭐야?!”

소란과 경악, 혼란, 기쁨 온갖 강렬한 감정 가운데 한 여자가 신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절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여자가!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힐, 리아?!”

그에 힐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보랏빛 보석 같은 눈동자의 색이 더욱 짙어졌다.

저런 표정을 에반젤린은 이미 여러 번 보았다.

그녀를 패배시키고, 모욕 주면서, 더없이 자신만만하게 웃던 힐리아의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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