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황후궁.
여전히 아르파드와 힐리아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은 채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황후궁에 모인 에반젤린을 따르는 이들 사이에는 불온한 분위기가 만연했다.
에반젤린의 심기가 너무나도 불편했던 탓이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테이블을 후려쳤다.
“왜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거야, 빌헬름?!”
전에도 그다지 안색이 좋지 못하던 빌헬름 필레르모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었다.
“에반젤린 님. 아직 에스피톨라의 영향력은 건재…….”
“웃기지 마! 완전히 망해 놓고선! 지금은 돈만 잡아먹는 하마 꼴이잖아!”
빌헬름은 뭐라 더 변명하지 못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한두 달 전부터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경쟁자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에스피톨라의 영향력을 잠식했다.
빌헬름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그래도 기사 정보를 빼돌리던 인쇄공들을 모두 잡아냈습니다. 이제 저쪽에서 같은 내용을 먼저 발간하진 못할 겁니다!”
수도에는 약 반년 전쯤부터 알음알음 페니 테라스라는 이름의 저가형 카페테리아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에스피톨라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은 귀족들이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폐쇄적인 살롱이다.
반면 최근 퍼지기 시작한 페니 테라스는 훨씬 공개적인 공간이었다.
아예 문을 늘 열어 두고 손님을 들였고, 몇몇 곳은 아예 건물 없이 의자와 테이블만을 두고 장사했다.
입장료는 동전 한 잎.
돈을 내고 들어가면 저렴한 차와 커피 주전자를 들고 다니던 여급이 원하는 음료를 한잔 따라 준다.
그리고 서비스로 한 장의 페이퍼가 함께 제공된다.
별다른 거창한 이름 없이 페이퍼라고만 불리는 그것이 바로, 지금 에스피톨라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고 있는 원흉이었다.
페이퍼는 에스피톨라 기사들과 거의 똑같은 내용을 싣고 있었다.
페니 테라스 자체가 기이할 정도로 사방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각계각층의 최신 정보가 듬뿍 담긴 페이퍼를 읽을 수 있었다.
자연히 페니 테라스는 평민들 사이에서 곧 언론과 여론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살롱에 비해 훨씬 공개된 장소인 데다, 페이퍼 역시 밖으로 들고 나갈 수 있었다.
개중에는 한 명이 가져온 페이퍼를 돌려 읽는 이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짧은 시간임에도 페이퍼와 페니 테라스의 영향력은 대중에게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빌헬름은 페이퍼의 발간 주체를 알아내려 그동안 갖은 애를 써 왔다.
에스피톨라의 핵심 정보가 유출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그 끄나풀들을 쳐 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걸 어필하며 자신의 쓸모를 주장하려 했으나, 에반젤린은 가차 없었다.
“그래서 페이퍼가 발간이 안 됐나? 거기에 실리는 나에 대한 험담들이 사라졌어? 버러지 같은 평민 놈들이, 페이퍼를 안 읽냐고!”
“…….”
빌헬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초반에 끄나풀을 뽑아냈다면 페이퍼 자체의 발간을 늦추거나, 대중의 흥미, 신뢰도를 없앨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페이퍼는 완전히 자리 잡은 상태였다.
무슨 수를 쓴 건지 더는 에스피톨라의 기사를 옮겨 쓰지 못하자 이제는 독자적인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에반젤린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이게 전부 너 때문이야! 네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내 아이가 루드비히의 핏줄이라는 헛소리가 돌고 있잖아!”
페이퍼와 페니 테라스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소문이었다.
바로 ‘에반젤린이 루드비히의 아이를 황태자의 아이로 속이려 하고 있다’라고.
페이퍼는 적극적으로 루드비히와 에반젤린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시 끄집어냈고, 바로 이 때문에 황제가 황태자의 아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 자체로도 흥미가 넘치는 가십인 데다, 접근성 좋은 신문이 매일같이 돌아다니니 대중에게 아주 강하게 각인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아직도 황제가 나를 인정 안 하는 거 아니야?!”
쨍그랑!
에반젤린의 서슬을 이기지 못한 화병이 나동그라져 박살 났다.
얼마나 흥분해서 난리를 쳤는지, 제 손에 상처가 나는 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아무 말 없던 마탑주가 혀를 차며 에반젤린의 상처를 돌봤다.
“조심해야지. 귀한 몸인데…….”
저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를 대하는 듯한 마탑주의 태도에 에반젤린의 표정이 살짝 풀어지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에반젤린의 만족감은 박살 났다.
상처를 닦고 붕대로 매어 준 다음, 마탑주는 달콤한 목소리와는 반대의 내용을 말했기 때문이다.
“네가 품고 있는 건 내 걸작인 실험체라고.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에반젤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거칠게 손길을 쳐 내며, 마탑주의 뺨을 날렸다.
짝―!
“나를 감히 인큐베이터 취급하지 마, 징그러운 작자!”
마탑주는 뺨 맞은 적 따윈 없다는 듯 히죽거렸다.
“그 인큐베이터라는 건 또 무슨 표현인 건지 궁금하군.”
대주교는 에반젤린과 마탑주 사이를 가로막았다.
“흥분하시면 안 좋습니다. 광인의 말에 몸이 상하시면 안 됩니다.”
“…나도 알아.”
에반젤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팔걸이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다.
황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배가 너무 빨리 부르는 것 아니니? 5개월은 되어 보이는구나.”
에반젤린은 황후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때문에 황제에게 더 인정받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질책이다.
마탑주는 태평했다.
“태아의 상태는 아주 건강해. 성장이 빠른 것도 그 때문이지.”
에반젤린은 뾰족한 어투로 모친의 말을 받아쳤다.
“어차피 아르파드와의 소문은 행방불명 전부터 내고 있었어요. 그전에 생긴 아이라고 하면 그만이죠.”
에반젤린은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모두 알게 되겠죠. 이 아이는 유일한 황손이고, 나는 그 어머니라는 걸.”
그렇게 되면 황태자가 약탈혼 직후 한창 힐리아와 사이가 좋을 때 생긴 아이가 된다.
에반젤린은 그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그렇다고 우기면 어쩔 거야. 싫으면 살아 돌아와서 아니라고 부정하던가.’
에반젤린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황후는 차갑게 물었다.
“그래서 이대로 황제가 인정하기만을 손 놓고 기다릴 셈이니?”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죠.”
그녀의 시선이 옆에 선 충실한 대주교에게 닿았다.
“준비는 다 됐죠?”
“물론입니다.”
황제가 인정할 수 없다며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명분을 쥐고 흔들어야 했다.
* * *
제국의 수도 일베리드.
근래 수도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숫자가 증가하는 중인 페니 테라스 중 가장 큰 곳은 황궁 앞 광장에 있었다.
가장 먼저 생긴 곳이고, 또한 본점이기에 제국 내 페니 테라스의 모든 사람과 정보가 이곳에 모였다.
페니 테라스 본점의 주인은 한 젊은 여자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여급들이 새떼처럼 몰려들어 재재거렸다.
“밀란 님. 또 수상한 사람들이 대놓고 감시하고 있어요.”
“또 가게의 진짜 주인이 누군지 꼬치꼬치 묻지 뭐예요.”
“무시하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닌걸.”
페니 테라스의 주인 밀란 이테나스는 직원들에게 부드럽게 웃어 준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에는 페니 테라스의 주방과 직원들이 사용하는 공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건물 지하에 밀란을 비롯한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장소가 있었다.
밀란은 그곳에 모인 이들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벨테인 경. 데임 애니. 뮤젠 경, 아, 율켄 님께서도 와 계실 줄은 몰랐네요.”
페니 테라스 본점에 모인 이들은 힐리아와 아르파드의 수하들이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페니 테라스는 힐리아가 회귀 직후부터 준비하여, 실종 전 즈음 돌아가기 시작한 정보부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힐리아가 실종된 후에도 페니 테라스는 사전에 지시받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에스피톨라의 내부 정보를 빼돌려 페이퍼에 실어서 뿌리는 것으로 무력화시키고, 유통과 여론 장악 및 정보 수집을 위해 페니 테라스를 열었다.
페니 테라스가 극단적인 박리다매 정책을 펼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애초에 수익이 1차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힐리아가 누누이 강조하기도 했다.
“대중 여론과 정보를 잡는 사람이 이길 거야.”
그걸 위해 힐리아는 대리인 밀란을 내세워 페니 테라스를 열었다.
고용인들은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뒷골목에서 다른 사람들로 인해 빚을 지고 고생하던 이들을 구해 왔다.
그 때문에 서로 유대감이 끈끈하고 충성심도 높았다.
아직 에반젤린 측에서 페니 테라스의 실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애니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도 비 전하께 따로 연락은 없으신가요?”
밀란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율켄이 한탄하는 소리가 울렸다.
“벌써 3개월입니다.”
“우리가 애를 써서 버텨도 한계가 있습니다. 빨리 두 분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으면…….”
벨테인 경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분명히 살아 계실 겁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군요.”
율켄은 초조하게 옷깃을 매만지는 제 손을 잡았다.
사실 이 자리에 초조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주인의 실종 이후에도 침착하게 잘해 왔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벨테인 경은 굳은 목소리로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했다.
“비 전하께서, 이렇게 허무하게 잘못되실 리 없습니다. 절대로.”
율켄 역시 부러 활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도 누구 좋으라고 죽어 줄 정도로 성품이 고운 분이 절대 아니시죠. 아, 일부러 이 불쌍한 신하를 약 올리겠다며 좀 늦게 오실 수는 있겠지만요.”
율켄의 우스갯소리에 조금씩 입가가 풀어지려던 차였다.
비밀 공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별안간 울렸다.
똑똑똑!
“…!”
모인 이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다.
사전에 오기로 한 동료는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 대한 정보가 노출된 것이 아닐까.
두 기사가 검을 뽑아 든 채,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끼익, 하는 거슬리는 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을 때.
모습을 드러낸 이를 보고 벨테인 경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