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호언장담해 놓고, 막상 아르파드는 착잡해 보였다.
그는 드물게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드래곤에게 물었다.
“힐리아와 함께한 기억도… 잊히는 건가?”
-예외는 없다.
아르파드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몇 번을 달싹였으나, 그는 끝내 표현을 다 맺지 못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냉혹한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지.
-너와 이 여자 사이에 이어진 인연의 끈 역시 끊길 거다.
“인연의 끈이라니?”
조금 전의 복잡한 표정이나 설핏 드러낸 안타까움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명백한 거부감과 집착.
“힐리아는 나의 신부다. 그 사실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변치 않는 것 아니었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수없는 회귀를 통해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필요도 없었을 터.”
-그녀는 여전히 네 신부이고,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너와 그녀 사이의 인연은 별개 문제다.
아르파드는 마치 드래곤이 나를 빼앗아 가기라고 할 것처럼 경계했다.
-다만 너와 그녀 사이에 인연의 가느다란 끈을 잇기 위해 너는 헤아릴 수 없는 회귀를 겪어야 했지.
-그 모든 인연과 인력의 힘이 모조리 사라지는 거다. 당연히 너와 그녀 사이의 인연도 끊기겠지.
“…….”
아르파드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사라지기 직전 상태인 나를 내려다보았다.
품속에서 흩어져, 이제는 파편으로만 남은 내 영혼을.
아르파드는 이를 악물었다.
“솔직히 끔찍하군. 지독하게 싫어.”
-조금 전 무슨 대가를 치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치르는 거라면 뭐든 상관없었어. 미련이 있는 것도 없었으니.”
아르파드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있었다는 걸 방금 알게 되었거든. 정말로, 죽기보다 빼앗기기 싫은 것이.”
그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군.”
그건 모든 걸 놓고 항복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내 사람이 아니어도, 내 곁이 아니라도…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는 미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걸 본 순간, 나는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저건?!’
분홍빛 꽃잎 세 장으로 이루어진 반지.
아르파드는 마치 오랫동안 늘 가지고 있었지만, 차마 끼워 주지 못했던 정표를 내주는 것처럼 겨우 형체만 남은 내 왼손 약지에 그 반지를 끼웠다.
그러자 아르타누스가 말했다.
-잘되었군. 아무리 신부라 해도 용혈의 소유자가 아니니, 매개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적절하겠어. 내 심장의 파편이기도 하니.
“난 그런 의미로 준 게 아니야.”
-상관없는 일이다.
아르파드는 다시 한번 아르타누스를 향해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는 반지를 끼워 준 뒤 부서져 가는 내 영혼의 파편을 아르타누스에게 건넸다.
작은 손짓에서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빼앗기기 싫은지가 선명히 드러나 보였다.
그는 차마 놓지 못하는 미련을 담아 물었다.
“인연이 끊어지더라도… 다시 이어지는 방법이 있나?”
-네가 이은 것이 끊어졌으니, 그녀 쪽에서 잇는다면 가능성은 있을 거다.
아르파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 가능성은 거의 없겠군. 내가 납치해 오고 늘 미운 말만 해서, 날 싫어하니까.”
지금 내가 아니라고 말해도 어차피 아르파드는 듣지 못할 거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아르파드.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내 혼잣말을 듣지 못하는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상냥하고 다정할 걸 그랬나. 아니, 좀 더 솔직해질 것을…….”
드래곤은 내 영혼의 파편을 쥔 다음, 선언했다.
-그리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너만이 아니다. 이 아이 역시 투쟁해야 할 거다.
“투쟁?”
-운명을 빼앗으려 하는 여자와 투쟁해서 이겨야 한다.
그러자 아르파드는 재수 없을 정도로 산뜻하게 웃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단단한 믿음으로 찬 목소리.
“하. 질 리가 있나. 내가 반한 여자인데.”
‘…….’
지금 나는 육체도 없고, 감각도 당연히 없었다.
그러니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얼굴이 있는 것처럼 화끈하고 민망했다.
‘사실… 세 번이나 졌는데.’
저 굳은 믿음에 제대로 부응을 못 해 준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고 많이 민망했다.
아르타누스는 아르파드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리고 아까 나에게 이 ‘기억’을 보여 줄 때와 비슷하게 그에게서 기묘한 빛을 빼냈다.
그 빛을 내 손에 끼워진 반지에 겹쳤다. 세상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빛이 그 작은 반지 안에 전부 담겼다.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이게 내가 회귀하게 된 이유구나.’
어째서 내가 매번 회귀할 때마다 저 반지를 끼고 있었던 건지 알았다.
아르파드가 나에게 처음으로 끼워 준 결혼반지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운명의 서>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라 쉽진 않을 거다. 그렇더라도 거듭하다 보면 제 운명을 되찾을 수 있겠지…….
아르타누스의 울림 가득한 목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해낸다면,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겠구나. 내 후계자의 신부여.
마치 저 말은, 나에게 직접 건네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 전체의 시간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아르파드를 중심으로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되었던 역전이 이번에는 사라져 가는 ‘나’를 중심으로 시작된다.
축이 달라지면, 결국 그 회귀는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결국 이건 지금 내가 인식하고 있는 첫 번째 삶.
회귀하기 이전의 삶이라 생각했던 그때로 모든 것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휙휙 되감기는 시간과 사건들 사이에서 기묘한 파편 하나가 ‘만들어져’ 끼어들었다.
황실 보물고로 보이는 곳에서 마주한 황제와 아르파드였다.
발터 이스트리드 황제는 불편한 표정으로 아들을 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내가 하는 일은 대놓고 반대하던 네가 말이다.”
“…잠시 변덕을 부려 볼까 해서 말입니다.”
“…?”
아르파드는 보물고 안의 여러 보석 중 구석에 놓인 반지를 하나 골라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이게 적당할 듯하군요.”
황제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아들이 내미는 반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반지는 무사히 나에게 전해졌고.
결혼식 전날 밤, 그것을 낀 채 잠들었던 내가 눈을 떴다.
“XX!”
* * *
‘잠깐, 그런데 저 때 아르파드와 내 인연이 끊겼다고?’
생각해 보면 세 번의 회귀 동안 아르파드와는 늘 스치듯 지나친 게 전부였다.
매번 어긋났다고 볼 수 있다.
그게 바뀐 건 이번 생에서 내가 아르파드를 스스로 찾아가면서였다.
어쩌면 그것이 아르타누스가 말한 ‘내 쪽에서 잇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 먼저인 걸까?
저 때의 일이 있었기에 내가 그를 찾아갔던 걸까?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연을 다시 이을 수 있게?
그렇게 본다면 지금의 우리는 결국 내 선택의 결과인 걸까.
혹은, 운명이라는 실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한 결과물인 걸까.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하나였다.
저 때 나를 살리기 위해 아르파드가 보인 미소를 기억했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나에게 주어질 반지를 골라 황제에게 건네며 웃던 표정도.
그 때문에 다시 아르타누스의 동굴 안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눈앞이 잔뜩 흐린 것을 깨달았다.
시야가 부연 것은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쓰러지듯 곁에 누운 아르파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키스하며 속삭였다.
기억 속, 내가 그에게 해 주지 못했던 속삭임을.
“사실, 나 당신이 좋았어요. 처음부터. 그때도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