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운명의 서>를 읽어 본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내 머리와 영혼에 강제로 정보를 욱여넣는 느낌이었다.
대주교가 어째서 에반젤린을 나와 혼동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책에 간섭할 수 있었는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빙의자가 나와 이름이 같고, 다른 세계로 흘러 들어간 운명의 서를 한번 읽은 존재였기 때문이야.’
이건 무슨 동명이인이라 전산에 혼동이 온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다.
‘내 고생의 원인이 그런 것 때문이라고?!’
책이 내 눈앞에 있다면 당장 찢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니면 저걸 만들었다는 여신들의 머리채를 잡거나.
과거의 일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으니,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에반젤린은 피로 쓴 글씨로 책의 내용을 덮어쓴 뒤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아하! 아하하하! 내가 진짜야. 내가 진짜 주인공이란 말이야!”
그 여파는 바로 내게 미쳤다.
대주교를 패퇴시킨 아르파드와 도망치던 중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이상을 느꼈다.
온몸의 감각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몸만이 아니었다.
영혼 자체가 바스러지는 듯한 감각.
“뭐지?!”
단순히 ‘그런 것 같다’가 아니었다.
실제로 내 존재 자체가 부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유도 몰랐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저 때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본능으로 깨달았다.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나만이 아니라 아르파드도 알 수 있었다.
지우개로 내 존재 자체를 누가 지워 내는 것처럼, 손발과 머리카락 끝 등이 투명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의 ‘내’가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흘러들어왔다.
나 자신의 감정이었기 때문일까. 그 일을 다시 겪는 듯한 생생함이 있었다.
가슴이 아릴 듯 아파 왔다.
이대로 곧 내 존재가 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힐리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를 안은 채 아르파드는 망연했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슬픔으로 몸이, 존재 전체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 힘을 다 짜내어 입을 열었다.
“아르파드, 나는…….”
내내 다투기만 하고 한 번도 진심을 제대로 말해 주지 못했다.
사실은 당신이 많이 아프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거, 안다고.
당신이 날 많이 좋아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노라고.
나도 당신이 좋다고. 아니, 사랑하게 되었다고.
존재가 사라질 지경에 이르러서, 이때의 나는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렸다.
말을 이어 보려 했으나, 목소리마저 흩어져 불가능했다.
결국 내 존재는 힘없이 스러지기 시작했다.
“힐리아!!!”
아르파드는 흩어지려는 나를 그러안은 채 필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하지만 마력으로 온몸을 감싼다 해서,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걸 막진 못했다.
결국 아르파드는 아르타누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르타누스-!”
태어나 처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회귀 동안 증오하고 또 경멸하던 존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구걸했다.
후계자의 처절한 부름에 아르타누스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 아르파드는 무릎을 꿇었다.
“힐리아를 구해 줘. 살려 줘. 네가 그렇게 몇 번이나 말했던 내 신부다. 내 반쪽이자 운명의 상대.”
-너는 신부를 부정하고 저주하지 않았나? 절대로 사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겠다고.
그건 몇 번이나 아르파드가 드래곤 앞에서 반복한 맹세의 내용이었다.
그 순간 아르파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나는 절대 잊을 수 없을 거다.
단순한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었다.
과거에 가졌던 분노나 그 바람 때문에 품 안에서 내가 부서진 게 아닌가 하는 자신에 대한 원망이다.
그게 아닌데도.
그럴 리 없음에도.
아르파드는 굴욕이나 비참함 따윈 티끌만큼도 느끼지 못했다.
처절하게 애원했다.
“내가 잘못했다. 잘못 생각했어. 내내 부정하느라 아직 단 한 번도 진심을 말하지 못했어. 제발, 제발… 그녀를 살려 줘.”
나는 아르파드가 저렇게 애타게 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나 때문이라는 게, 나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는 인간의 형태를 취한 아르타누스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매달렸다.
“네가 바라는 대로 뭐든 다 하겠다. 이대로 힐리아가 사라지면, 네가 바라는 것도 이룰 수 없게 되지 않나. 도와줘!”
아르파드의 절절한 애원에도 아르타누스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가진 권능의 대부분을 이미 너에게 넘겼다. 너를 중심으로 세계의 시간을 되감는 그 힘은, 내 모든 마력과 권능을 대가로 얻은 것.
-그러니 지금의 내겐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신부를 되찾을 힘이 없다.
드래곤마저 불가능하다는 말에 아르파드는 절망했다. 곧 그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회귀의 권능.
이 말이 아르파드에게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오르게 만든 것이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회귀! 그래, 그렇다면……!”
아르파드는 자신의 무기를 찾았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거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리려는 거였다.
‘안 돼!’
기억을 보고 있을 뿐인 나는 아르파드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아르파드가 하려는 짓이 너무나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내 눈으로 그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아르파드의 시도를 막은 건 아르타누스의 냉정한 말이었다.
-네가 누군가를 구하려 스스로 회귀를 택하려는 건 처음이구나. 하지만 그것으로는 네 신부를 구할 수 없다.
“뭐라고?”
목덜미를 파고들던 칼날이 멈췄다. 핏방울이 살갗을 가르고 흐르던 찰나였다.
-지금 네가 죽어 시간을 되돌리면, 너는 신부가 사라진 상황을 마주하게 될 뿐이다.
-정확히는 그 여자의 운명을 빼앗은 존재를 만나게 되겠군. 어쩌면 그 원흉이 네 신부가 되어 있을지도.
빙의자가 내 운명을 완전히 빼앗으면 ‘신부’의 존재마저 바뀌게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충격받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아르파드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다음 순간, 아르파드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웃기지 마! 그딴 걸 내가 용납할 줄 알아?! 명색이 드래곤이면 힐리아를 구할 방법을 알 것 아닌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내게 남은 힘은 거의 없다고.
조금 전의 애원을 잊은 것처럼 아르파드는 드래곤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이 여자가 사라지고, 회귀해도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그냥 다 포기한 채 주저앉아 버릴 거다.”
-그 여자의 자리엔 운명을 빼앗은 다른 신부가 있을 거다. 너는 그 여자에게 똑같이 끌리겠지.
“아니. 다른 신부 따윈 필요 없어.”
아르파드는 머리카락 한 올 끝까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로 이 여자가 사라지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회귀 속에서 멈춰 설 거야. 절대로 네가 바라는 각성 따위 하지 않을 거다.”
그는 드래곤이 가장 원치 않고 두려워할 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그대로 네 신부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영원히 이곳에 매여 있겠지.”
아르타누스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 내놔. 힐리아를 구할 방법을. 어떤 수단이라도 좋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상관없어.”
드래곤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아르파드는 알 수 있었다.
이 협박만은 먹혀들 수밖에 없다는 걸.
“그러니… 살려 줘. 제발…….”
애원을 시작으로 협박을 거친 말은 결국 절규가 되었다.
-…어쩔 수 없군.
결국 항복한 것은 드래곤이었다. 더 원하는 게 많은 존재가 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준 권능을 이 아이에게 옮기도록 하지.
“네가 나에게 준 권능? 회귀 말인가?”
아르파드가 그토록 증오하고 원망해 온 그 힘.
그것이 나를 구할 수단이 되었다.
-그래. 이제 네가 아니라 시간의 역행은 네 신부를 중심으로 다시 시작될 거다.
-운명을 빼앗겼으나, 진짜는 네 품 안에 있는 존재임이 틀림없지.
-네가 그동안 수없이 반복하며, 엮고 또 엮은 운명의 무게를 그 여자의 닻으로 삼아, 흩어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것이다.
아르타누스는 제 후계자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너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아르파드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무엇이든. 얼마든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무엇을 대가로 치르든 지금 힐리아를 잃는 것보다는 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