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황후나 에반젤린의 난입 직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란이 일었다.
“황태자 전하의 아이라고?”
“하지만 황태자께서는 황태자비 전하를 지극히 아끼셨지 않습니까?”
“맞아요. 두 분의 금실이 그렇게 좋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다른 여자를 연인으로 두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아, 하지만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황태자께서 황궁 밖에 연인을 따로 두셨다고요.”
“저도 들은 적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리고 그 소문에는… 황태자께서 약탈혼을 벌이신 건 키엘른 대공을 견제하기 위해서고, 진짜 마음에 둔 여자는 따로 있다고 했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오! 내가 두 분이 얼마나 서로를 아끼시는지 봤거늘!”
의견이 엇갈리는 와중에 에반젤린은 짐짓 부끄러운 듯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은 사실이랍니다. 실종되시기 전에, 저는 황태자 전하와 비밀스러운 연인 관계였으니까요.”
하지만 황제의 반응은 싸늘했다.
“나는 아르파드에게 그에 대해 전혀 들은 바 없다.”
에반젤린은 이번만은 표정이 굳는 걸 숨기지 못했다.
“그야 제가 황태자 전하께 알리지 마시라고 부탁드렸으니까요. 우리의 관계를.”
그녀는 ‘우리’라는 단어로 자신과 아르파드를 엮으려 노력했다.
에반젤린은 긴 속눈썹을 가련하게 깜빡이며 처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그저 그분의 마음을 얻은 것으로 충분했고, 또 황태자비께 상처를 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사이가 멀어지긴 했어도, 친구였으니까요.”
“네가 힐리아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별로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니구나.”
황제의 태도는 더없이 차가웠다.
“아르타누스 홀 연회 때의 드레스 건도 그러하고, 넌 루드비히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느냐.”
에반젤린을 향한 황제의 어조는 신랄하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숫제 적의에 가까웠다.
반면 그가 힐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어조에서는 숨기지 않는 호감이 묻어났다.
에반젤린은 부드러운 표정을 뚫고 삐져나오려는 분노와 증오를 애써 눌렀다.
‘그렇게 오래 곁을 드나들었는데도 나에게는 다정한 태도를 보여 준 적 없으면서!’
에반젤린은 새삼 너무나도 억울하고 또 서러웠다.
그녀는 황후의 딸이다. 황제의 친자는 아니어도, 의붓딸임에는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황제는 10년 넘게 봐 온 의붓딸인 자신을 제쳐 두고, 힐리아의 역성을 들고 있었다.
진심 어린 서러움과 억울함은 에반젤린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했다.
“…깊이 반성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평생 그림자 속에 숨어 지내려 한 것이고요.”
에반젤린은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 들을 수 있도록 부러 소리를 크게 내어 울었다.
친구와 사랑하는 남자를 모두 잃은 여자답게.
눈에 띄는 연기에 황제의 눈빛은 더더욱 싸늘해질 뿐이었다.
한편 황후는 딸을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기어이 아르파드의 아이라 우길 셈인가.’
그녀는 끝까지 에반젤린의 계획에 반대했다.
루드비히의 아이라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미 에반젤린이 황제의 앞에서 말해 버린 상황에서 자신이 부정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녀는 딸의 편을 들어 주장했다.
“황실과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에반젤린의 배 속 황손을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
“그게 죽은 황태자를 위해서라도 옳은 일입니다.”
황후의 말에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죽은 아르파드를 위해서라도?”
“예, 폐하.”
황후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황제를 마주 보았다.
황제가 분노와 살기를 감추지 않았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본능적인 두려움마저 누를 정도로 그의 슬픔과 고통을 보고 느끼는 희열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황후로서 폐하께 바른말을 올리는 것이 제 의무…….”
쾅!
황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황제가 일으킨 마력이 그대로 국무 회의장의 원탁을 박살 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충격파는 황후의 발치까지 닿아 있었다. 박살 난 타일의 조각이 황후의 뺨을 스치고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
털썩,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황후에게 황제가 천천히 걸어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질렸으면서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황제를 보고 황후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지는 않을까, 하는 미련스러운 희망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으나, 황제는 마주 잡아 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황후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제의 얼음장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찔렀다.
“꼭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것 같군? 내 아들이 죽기만을. 너도, 네 딸도.”
“…!”
차가운 정적이 회의장 안을 짓눌렀다.
황제는 몸을 일으킨 뒤 얼음보다 차가운 단어들을 씹어뱉었다.
“이 둘을 당장 끌어내라.”
“폐하!”
“폐하, 저는 황손을 임신한 몸입니다!”
발터 이스트리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 늘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황제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판단했고, 광증으로 인한 두려움과 의심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이 감정에 기울어 내린 판단이 광증으로 인한 부작용이라면?
황제가 그런 상태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했다가는 제국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그는 아들은 물론이고, 본인마저 늘 의심했다.
대신들의 말을 늘 경청하고, 자신의 의사와 반대되더라도 처벌하거나 강압하지 않았다.
그것이 황제로서 당연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잠시 원칙을 내려놓기로 했다.
이성적으로는 알았다.
하지만 악시온 대공비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또 그렇게 내 하나뿐인 손자를 버릴 셈이냔 말이다!”
아내의 유언 역시.
“…발터. 제발 그 아이만은, 우리 아들만은… 나와 같은 운명을 맞지 않도록…….”
기실 그는 13년 전 광증으로 인해 첫 폭주를 경험한 아들을 본 순간…….
그동안 내내 아들을 버린 셈이었다.
그 냉혹한 황제에게 아들을 다시 돌려준 게 바로 그 아이였다.
힐리아.
그 아이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그러면 폐하의 귀한 아드님을 구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겠어요.”
단어 하나하나에서 빛이 스며 나오는 듯했다.
그 구원을, 그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13년간 고통스럽게 모른 척했던 아들을 지켜야 했다.
황제가 아닌 아비로서.
그는 선언했다.
“아르파드는 죽지 않았다. 내가 인정하지 않았으니.”
“…폐하!”
에반젤린의 항의는 묵살당했다.
“그러니 네가 가졌다는 그 아이가 정말 내 손자가 맞다면, 아르파드가 직접 확인할 일이다. 물론 정말로 임신한 사실이 맞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에반젤린의 얼굴은 분노와 모멸감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 * *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고, 공간의 거리도 의미가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데다 여러 시간과 장소에서 벌어진 ‘기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대주교와 아르파드의 싸움을 틈타 에반젤린은 엉망인 채로 도망쳤다.
전투로 정신없는 와중에 손에 넣은 신물을 하나 든 채.
‘왜 에반젤린의 행동을 이렇게 상세히 보여 주는 거지?’
조금 의문스러웠다. 사실 에반젤린의 행동보다는 대주교와 싸우는 중인 아르파드 쪽이 더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미 끝난 일이라 걱정은 의미 없는 것이긴 하지만.
나는 곧 생각을 부정했다.
‘그만큼 이게 중요한 사건이라는 의미일 거야.’
내 예상대로였다.
에반젤린은 한 허름한 천주신의 신전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리고 지하에 여러 겹의 안전장치로 숨겨진 공간으로 익숙하다는 듯 들어갔다.
지하실에는 제단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는 기이한 책이 하나 놓여 있었다.
에반젤린이 여신의 신물 중 하나를 쥔 채 책을 움켜쥐었다.
이후 페이지를 마구 넘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어?’
신성언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책의 내용을.
그건, 이 세계에서 ‘나’의 이야기였다.
「유신아, 한국에서 그런 이름을 가졌던 소녀는 죽음 후 다시 태어나 델핀 공작가의 유일한 딸로 태어났다.」
에반젤린은 글씨들을 마치 원수처럼 노려보더니,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그리고 자신의 피로 쓴 글씨로 책의 첫 문장을 [덮어썼다.]
「‘책’을 읽은 ‘유신아’가 그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났다.」
붉은색의 삐뚤빼뚤한 한글로 된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