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드래곤이 보여 준 기억 속 대주교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진정한 운명의 주인이시여. 그것이 당신을 가리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가짜를 섬겨 오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가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운명의 주인이라니?
그는 엉망인 꼴의 에반젤린을 내 앞에 끌고 왔다.
“가짜 주제에 감히 운명의 주인을 사칭한 이 죄인의 처우를 당신께 맡깁니다.”
“웃기지 마! 날 먼저 찾아와 운명의 주인이라고 한 건 너잖아!”
에반젤린과 대주교는 영문을 모르는 내 앞에서 언쟁을 벌였다.
그들의 대화로 나는 대략적인 상황을 인식할 수 있었다.
‘다섯 여신이 만든 운명의 책 주인이 나이고, 에반젤린은 그 존재로 오인당했다는 것.’
‘운명의 주인은 말 그대로 이 세계의 주인공과 같은 존재.’
‘그리고 빙의한 에반젤린이 그 운명의 주인으로 지금까지 오인되었다.’
대주교는 ‘운명의 서’라는 것을 해독하다 에반젤린이 가짜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뒤늦게 나를 찾아낸 것이라고.
어이가 없었다.
과거의 나를 운명의 주인이라 부르며 숭배하는 대주교의 태도는 오싹할 정도였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회귀 이후의 삶에서 그가 보인 태도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아무리 황제가 세속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이라 해도, 혼인을 강제할 수는 없지요. 당신의 의사가 가장 중요합니다. 신전은 이를 보호할 겁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의지하여 내 비밀을 전부 털어놓고 상의했을 때.
대주교는 내 말을 믿어 주는 척했다.
“…삶을, 다시 살고 있단 말입니까?”
나중에 본색을 드러냈을 때 비오 대주교는 그 사실까지 비웃었더랬다.
“그런 과대망상적인 말을 내가 정말 믿었으리라 생각합니까?”
아마도 그때 대주교는 에반젤린을 진짜 ‘운명의 주인’이라 믿었을 거다.
그래서 그녀의 편을 들어 나를 철저히 짓밟았겠지.
근데 내가 진짜라니…….
아이러니했다.
‘사실을 알면 지금은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하긴 하네.’
게다가 한번 대주교의 거짓된 말과 행동을 경험한 나는 알 수 있었다.
에반젤린을 가짜라 부르며 끌고 나타나 무릎을 꿇은 대주교는 진심이었다.
“신들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짐승의 손아귀로부터 이 세상을 구해 낼 사도로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 소란은 난입한 아르파드에 의해 끝났다.
“뭐지? 신의 개 따위가 겁도 없이 내 집에 발을 들이다니.”
“미친 짐승 주제에!”
이 둘의 싸움은 나와 아르파드가 몇 년간 숨어 살던 작은 오두막을 박살 냈다.
그 난장판의 와중에 대주교의 감시를 피해 에반젤린은 달아나고 말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황태자 부부의 실종 후 약 한 달 반.
사흘에 한 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국무 회의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실종된, 그리고 대다수는 죽었다고 생각 중인 황태자 부부에 관한 갑론을박 때문이었다.
“이제 사망 사실을 공표하고 국상을 치러야 합니다. 폐하!”
“하나, 두 분 모두 시신의 흔적도 없지 않습니까? 돌아가셨다 확신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된 이상 키엘른 대공이라도……!”
“하지만 대공도 행방이 묘연하지 않습니까!”
아르파드의 실종 직후부터 계속되어 온 논의였다.
아르파드와 힐리아의 사망을 인정하고 공표할 것인지.
그렇게 한다면 후계자 문제는 어찌할 것인지.
황족의 숫자가 극히 적다 보니, 아르파드가 사망한 것으로 확정될 경우 직계 황족이 황제 외에는 없는 상황이 된다.
이스트리드 제국은 아르타누아 평원의 소유권 문제 때문에 용혈의 소유자가 아닌 황제를 세울 수 없었다.
설사 사생아 출신이라 해도, 용혈의 소유자여야만 황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때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끼어든 것은.
“폐하. 황후 폐하께서 들기를 청하십니다.”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회의 중이니 돌아가라 이르라.”
안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 부부의 실종 이후 황제의 심기가 극도로 불편했다.
황제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자, 조금 전까지 아르파드의 사망을 인정해야 한다던 이들마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마음대로 입을 놀릴 수 있었던 것은 황제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공식 석상에서 합당한 이유로 한 말이 본인의 의사와 반대된다고, 권위와 폭력으로 찍어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아내를 잃은 이후 처음으로 그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 불편한 심기는 여과 없이 겉으로 드러났다. 덕분에 대신들은 일시에 공포로 몸을 굳혀야 했다.
시종장은 직접 나가 황후에게 황제의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
쾅―!
황후는 문 앞을 막아서는 황실 기사와 시종들을 밀어내며 들어왔다. 그전까지 감히 저지르지 않은 무리수였다.
황제의 새파란 분노가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무도한 짓인가!”
황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외쳤다.
“황실과 제국의 미래를 위해 알려야 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분노로 가득한 황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회의장을 채운 이들 역시 비슷했다.
“…황실과 제국의 미래?”
황후는 바로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황실의 혈통이 끊어질 위기에 이르러, 용혈을 물려받은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이를 고하고자 왔습니다.”
“…뭐라고?”
경악한 황제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장은 곧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졌다.
황실의 혈통이라니?
그때 기다렸다는 듯한 여자가 흰 신관복을 입은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아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얼굴의 절반을 검은 베일로 가리고, 온몸을 검은 드레스로 가린 여인.
장신구 역시 목에 건 회색 진주 목걸이 하나였기에, 차림새는 전형적인 상복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들은 많았지만, 이런 차림새를 한 걸 본 적은 별로 없었다.
늘 사교계의 꽃으로서 화사한 옷과 화려한 장신구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황제가 중얼거렸다.
“에반젤린?”
에반젤린은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즐겼다.
‘그래. 이게 바로 주인공이 된 묘미인 거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이의 주의와 관심은 그녀를 향해야 마땅했으므로.
황후는 더욱 소리 높여 외쳤다.
“이 아이, 제 딸이 지금 황실의 혈통을 회임 중입니다.”
경악이 들불처럼 번졌다.
하지만 곧 사람들은 납득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키엘른 대공이 루스 후작 영애와 가까웠지요?”
“맞아요. 그 재판 때 사실 저 두 사람이 꽤 오래 교제했다고 했었소.”
“맞아. 나도 들었소. 약혼녀를 두고 둘이 불륜을… 흠흠.”
“그래도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으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하나 키엘른 대공의 아이라면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황손이 맞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사생아의 사생아를 황위에…….”
에반젤린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부정적인 말에도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과시하듯 배에 손을 올린 채.
“이 아이는 사생아의 사생아가 아닙니다.”
황후가 눈동자만을 굴려 딸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불만스러운 눈빛은 다들 에반젤린에게 주의가 쏠려 알아보지 못했다.
에반젤린은 황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