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힐리아가 드래곤 아르타누스를 통해 생각지 못한 진실을 마주하던 때.
에반젤린 역시 예상치 못한 질문을 마주하고 있었다.
<운명의 서>가 있는 신전으로 부르더니, 대주교가 난데없는 질문을 했던 것이다.
“운명의 주인이시여. 혹여 기이한 현상을 겪은 적 있으십니까?”
“기이한 현상? 내가 읽던 책 속으로 들어온 것보다 더 기이한 현상이 어디 있겠어?”
대주교는 에반젤린의 퉁명스럽고 막 대하는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에반젤린은 자신이 책으로 읽었던 세계에 빙의한 사실을 이미 말한 적 있었다. 대주교가 그녀를 운명의 주인으로 인정한 직후에.
자신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주교 역시 그녀의 의견에 열렬하게 동의했고 말이다.
“어쩌면 사도께서 읽으신 것이 바로 이 <운명의 서> 일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운명의 서>의 내용을 당신께서 읽으실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요.”
에반젤린은 여전히 <운명의 서>에 쓰인 신성언은 전혀 읽지 못했다.
대주교는 신성언을 지금이라도 배우라 청했으나, 무시했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에반젤린의 생각이 어쨌건 대주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사도께서 스스로 깨달으셨기 때문인지, <운명의 서>에서 해독 가능한 부분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주인을 만났으니.”
에반젤린은 뽐내듯 우쭐거렸다.
“그럼 이제 미래도 볼 수 있는 건가? <운명의 서>가 완성되면 미래까지도 볼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 정말 편해질 텐데.
“아쉽게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대주교는 아쉽다는 듯 대답하더니 본론을 꺼냈다.
“일부 해독이 가능한 페이지 중에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완전히 같은 내용은 아닙니다만, 비슷한 내용이 세 번 반복됩니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묘사하는 가장 최신 페이지까지 합치면 같은 시간대가 책 속에서 총 네 반복되는 셈입니다.”
“그게 어쨌다는 건데?”
비오 대주교는 의미를 풀어서 다시 질문했다.
“혹시 시간이 되돌아가는 경험을 한 적 있으십니까? 그것도 여러 번.”
에반젤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당연히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런 기억은 없다.
<운명의 서>에 그런 내용이 있는데, 자신이 그런 일을 겪은 적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안 그래도 뻣뻣한 인간인데, 더 내 말을 안 듣는 거 아냐?’
에반젤린은 대주교의 손에서 <운명의 서>를 빼앗아 들었다.
“어디 한번 봐봐.”
이렇게 큰 책인데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에반젤린은 성의 없이 페이지를 파라락 넘겼다.
가장 앞쪽은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글씨가 서로 덧씌워진 것처럼 더럽혀져 있었다.
대주교는 성실하게 설명했다.
“이 부분은 분명히 적혀 있지만 전혀 읽을 수 없습니다. 수십 수백 번 같은 종이에 글씨를 겹쳐 쓰기라도 한 것처럼요.”
페이지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그러다 좀 더 성긴 글씨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페이지, 책의 중간 즈음에서 에반젤린은 경악했다.
“이게 뭐야?!”
그녀는 신성언을 전혀 몰랐다.
그럼에도 잘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몇 줄 있었다.
‘한글이잖아?!’
* * *
황제가 있는 본궁은 비통함으로 무거워져 있었다.
주인인 황제가 눈을 뜨고는 있으나 거의 넋을 놓은 상태니 당연했다.
그곳에 불청객이 한 명 발걸음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악시온 대공비는 여전히 싫어하는 조카 겸 사위에게 호통을 쳤다.
“이젠 완전히 다 놓아 버릴 참이냐?”
우울한 표정의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심하게 보이시겠지요.”
“알긴 아는구나.”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대공비가 황족이고, 황제의 장모이자 숙모라지만, 신분의 차이가 명확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 중 누구도 대공비의 무례를 인식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황제와 대공비로 선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마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집안의 어른과 사위로서.
“록셀린을 잃은 후에는 아르파드를 보고 버텼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잘도 제 아들을 내치려 들었지.”
“전 록셀린이 평소에 얼마나 총명하고 쾌활했는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광증으로 미쳐 버린 그녀가 어떠했는지도 역시… 누구보다 잘 알지요.”
“…….”
“아르파드가 광증에 잡아먹힌다면 록셀린보다 더하리라는 건 분명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이성을 잡고 또 잡아, 황제로서 의무만을 붙잡고 버텼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버텨야지. 이제 와서…….”
“그렇게 인간으로서, 아비로서 저를 죽이고 살고 있는데 모든 삶을 돌려준 아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공비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를 칭하는지 잘 알았다.
그녀 역시 그 아이로 인해 칩거를 깨고 다시 밖으로 나올 마음을 먹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긴 겨울 끝에 찾아온 봄날 같은 아이였다… 라고.
그래서 믿어 보고 싶었고, 또 믿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은…….
대공비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자신이 이렇게 좌절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충격이 크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여전히 이마를 감싸 쥔 채 한탄 중이었다.
“한 번 아비로 돌아가고 나니, 행복하더군요. 믿어지지 않을 만큼.”
“…….”
“그런데 다시 인간으로서, 아비로서 저를 죽이고, 황제로 돌아가려 하니 너무 힘이 듭니다.”
악시온 대공비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야.”
“…예?”
황제는 놀랐다. 그는 대공비가 자신을 책망하고, 정신을 차리라 밀어붙이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혈관에 더운 피가 아니라 얼음이 도는 황제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아직은.”
그녀는 치맛자락을 매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아이가 죽었다고 확정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아르파드가, 네 아들이 폭발 따위로 죽을 놈이더냐?”
“…….”
“그리고 황태자비, 그 아이도 여린 얼굴과 달리 얼마나 당차고 또 교묘했는데. 절대 그렇게 맥없이 죽었을 리 없다.”
대공비는 거의 황제를 세뇌하려는 듯 그리고 자신 역시 설득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야지. 네가 그동안 아들을 믿어 주지 못했다고 후회하면서, 또 안 믿을 참이냐?”
“…!”
“또 그렇게 내 하나뿐인 손자를 버릴 셈이냔 말이다!”
날카로운 호통이 황제의 침전 안을 울렸다.
* * *
나는 이해를 좀 더 쉽게 하려고 드래곤이 보여 준 기억을 간략화해 보았다.
‘내 회귀 전에, 빌어먹을 드래곤 때문에 아르파드는 이미 회귀를 반복 중이었고. 그때 나와 만났었다, 이거네.’
그리고 놀랍게도…….
‘저 때도 약탈혼 했었고?!’
그렇다.
아르파드는 회귀 끝에 나를 만난 순간, 그대로 끌고 가 버렸다.
그야말로 진짜 약탈혼!
게다가 지금보다 더 막장 상황인 게 저 때 나는 이미 루드비히와 결혼한 뒤였다.
결혼식 행렬에서 납치한 것도 아니고, 신혼여행까지 끝내고 온 새 신부를 납치한 것이다.
당연히 몇 배는 더 큰 파문이 일었다.
그럼에도 아르파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황제든, 황태자든 알아서들 하라지.”
무려 황태자 자리도 내던진 끝에 나와 단둘이 도망쳤다.
달콤하고 로맨틱한 상황은 아니었다. 딱히 피폐하지도 않았지만.
우리 둘은 몇 년 동안이나 서로 티격태격 싸워대기만 했다.
“미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납치해 올 수가 있어? 약탈혼이라니. 야만적이야!”
아직 한국인으로서의 기억과 정체성이 더 강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어차피 루드비히 그 쭉정이 놈 아내 노릇을 하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고마워하는 게 맞지 않나?”
“언제든 죽일 수 있게 감시하려고 끌고 온 주제에!”
내가 반항하고 험한 말을 할수록 아르파드는 더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이하리만치 아련한 미소였다.
“그래. 난 널 죽이기 전에 괴롭히려고 끌고 온 거야. 널 증오하거든.”
“나도 당신처럼 미치고 야만적인 인간 싫거든?!”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싫다’는 말을 해댔고.
작은 꼬투리만 잡혀도 싸워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 젖어 들 듯 빠져들어 갔다.
이번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도, 나도 자신이 이미 가지게 된 감정을 부정하려 애썼다.
아르파드는 오랜 회귀 동안 쌓인 신부라는 존재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 때문에.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더해, 첫 만남에서 아르파드의 인상이 워낙 안 좋았기 때문에.
거기에 입만 열면 밉살스러운 말만 해대는 인간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좋아하게 되면, 내가 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는, 반쯤 미쳐 있던 그를 조금이라도 동정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얄팍한 동정심은 그가 겪어 온 일에 대해 알수록 무겁고 넓어져, 결국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도 나도 서로에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어느 날.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운명의 주인을 뵙습니다. 설마 위대한 신들의 사도께서 짐승의 손아귀에 잡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비오 대주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