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힐리아의 발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살의와 파괴뿐인 괴물이 된 아르파드가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처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반젤린은 힐리아의 단호함에 순간이나마 압도되었다.
순수한 믿음과 애정이 아니면 저 용기 있는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도.
그로 인한 열등감과 패배감까지.
에반젤린은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멍청하니까 저런 짓을 하는 거야. 나야 몰랐지만, 지금 저 꼴은 누가 봐도 괴물…….’
힐리아는 두 팔로 아르파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술을 겹쳤다.
에반젤린은 질시와 패배감을 곱씹으며 악의만을 새파랗게 세웠다.
‘어서 물어뜯어! 나에게 한 것처럼! 아니, 그냥 죽여 버려!’
하지만 에반젤린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힐리아를 찢어발겨야 마땅한 손톱과 비늘로 덮인 두 팔이 힐리아를 가만히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어?”
신성력이 제 몸을 태워 버릴 듯 집중되고 있는 와중에, 아르파드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행동했다.
더없이 소중하게 힐리아를 끌어안은 채, 열정적으로 키스에 응했다.
두 입술이 떨어지며 그사이에 은색 실이 늘어진다.
이 흔적마저 핥아먹은 뒤 아르파드는 더없이 간절하게, 그러면서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대했다.
키스의 비가 이어졌다. 입술에서 턱으로, 목덜미, 그리고 어깨까지.
에반젤린은 경악으로 굳은 채 망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자신이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숨어든 불청객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은밀하고 사랑스러운 타인의 침실에 숨어든 불청객.
그게 지금 에반젤린에게 주어진 위치였다.
비참함을 곱씹었다. 입 안에서 녹슨 쇠의 맛이 나는 건 얼굴의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도 모르게 입이 움직여 소리를 내놓았다.
“왜 그 여자는 해치지 않는 거야? 나는 이 꼴로 만들었으면서!”
제 목에서 나와 귀로 되돌아온 말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비참하고 어리석었다.
패배자의 때늦은 푸념일 뿐.
에반젤린은 현실을 부정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주인공이라며? 그런데 어째서, 내가 아니라 저 여자를?!’
에반젤린이 열등감과 비참함에 사로잡힌 사이, 더욱 경악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괴물로 변해 버렸던 아르파드의 모습이 천천히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
온몸에 돋아났던 비늘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길게 자라났던 손톱 역시 원래의 길이로 돌아갔다.
지독한 살기만을 내뿜으며 붉게 빛나던 눈동자 역시 인간의 것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침내 에반젤린이 좋아하던 수려하고 날카로운 평소의 아르파드가 눈을 떴다.
인간의 형태로 돌아와 이성까지 되찾은 눈빛이 힐리아를 향했다.
에반젤린은 아르파드가 저렇게 다정하고 따스한 눈빛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빙의 이후 10년이 넘게 보았음에도.
그는 소중하게 끌어안은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힐리아…….”
너무나도 다정하고, 또 애달프게.
“언제나 날 구하는 건 당신이군.”
그 눈빛도, 목소리도, 품도, 모두 에반젤린이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다.
흰 소매 위로 검붉은 피가 뚝뚝 흘렀다.
폭발의 여파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은제 촛대 위에 에반젤린의 얼굴이 비쳤다.
질투와 비참함, 패배감으로 흉하게 일그러진 표정.
그리고 뺨에 너무나도 선명하고 끔찍하게 남겨진 상처.
에반젤린은 절망과 분노로 비명을 질렀다.
“어째서! 어째서어―! 아아악! 아아아악―!!!”
에반젤린은 손톱으로 멀쩡한 뺨까지 긁어 가며 몸부림쳤다.
“죽여! 죽여 버려! 어서 없애 버리라고! 둘 다! 내 눈앞에서 치워 버려!”
대주교는 왜 갑자기 에반젤린이 발악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조금 늦게 눈치챘다.
아르파드가 광증에서 벗어나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젠장!”
이미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에반젤린과 공모해서 아르파드와 힐리아를 함정에 빠트렸고, 신성진으로 목숨까지 빼앗으려 했다.
‘황태자가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더더욱 나나 신전을 가만히 둘 리 없지.’
아르파드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한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죽여야 했다.
대주교는 에반젤린에게 맡겨 두었던 모르페네이아의 신물과 소지하고 있던 데스포이나의 신물을 꺼냈다.
두 신물 모두 대주교에 의해 여신의 권능이 발동되어 있었다.
데스포이나는 결실의 권능이, 모르페네이아는 환상의 권능이.
두 권능의 발동을 취소하고 그 신성력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곧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력이 대주교에게 집중된다.
그는 에반젤린을 안고 신성력으로 공간 이동의 권능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만약을 대비해 지하에 쌓아 두었던 폭탄의 기폭 장치를 가동시켰다.
바닥의 특정 조각을 정해진 순서대로 누르는 것으로, 그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실상 수확제에서 신전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모신의 신관들도 이를 알지 못했다.
비오 대주교 본인과 천주신의 신관 중에서도 그에게 충실한 이들만이 이번 일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 충실한 수하들과 지모신의 신관들은 모조리 버려졌다.
남겨진 천주신의 신관 중 한 명이 망연한 목소리로 갑자기 사라진 주인을 찾았다.
“대주교님……?”
그리고 다음 순간.
엄청난 빛과 충격파가 신전을 뒤흔들었다.
* * *
“커헉!”
과도한 신성력 사용의 여파로 대주교는 피를 토했다.
에반젤린은 갑자기 바뀐 주변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연이어 시야 한쪽을 가리는 엄청난 폭발의 빛과 굉음, 충격에 경악했다.
쾅! 콰과광―!!!
“신, 신전이!”
에반젤린의 비명대로였다.
아르타누아 평원 한가운데 위치한 신전이 폭발한 것이다.
몇 번의 폭발이 연잇더니 단단한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신전에서 시작된 불길이 주변에 옮겨붙는다.
아르타누아 평원은 곧 수확을 앞두고 있었다.
그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수확제의 밤에 신전이 폭발하며 밀밭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밤이라 폭발과 화재로 인한 빛이 너무나도 눈에 잘 띄었다.
넘실거리기 시작하는 불꽃을 에반젤린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대주교는 과도한 신성력의 부작용으로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 못 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구냐?!”
에반젤린이 경악해서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로브를 늘어뜨린 사내의 얼굴이 눈에 익다는 걸 깨달았다.
몇 년 전, 황후를 찾아와 얼굴만 봤던 적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둘만 해야겠다며 황후가 에반젤린을 내보냈기에, 그저 스쳐 지나가듯 만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워낙 특징적인 인상을 가진 남자였기에 못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지위 때문이기도 했다.
“마탑주 가스팔!”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딱 한 번 봤는데도 날 기억하는 모양이네.”
“그야… 워낙에 특이했으니까…….”
게다가 원작에서 마탑주 가스팔이 꽤 인상 깊게 나와서였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가스팔은 불타는 신전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큰일이군. 이대로면 수확을 앞둔 아르타누아 평원의 밀밭이 다 타 버리겠어.”
“…!”
에반젤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는 말이다. 불은 점점 번지고 있었다. 이대로 손쓸 기회 없이 번지기만 하면 재앙이 될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벼락이 치는 듯한 깨달음이 내렸다.
“도와줘요!”
에반젤린의 입가에 희열과 기대감 어린 미소가 걸렸다.
계속 각혈 중이던 대주교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에반젤린을 말리려 했다.
“그만, 두십시오. 저자는… 당신이, 쿨럭! 관심을 둬선 안 되는… 사악한 자입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대주교의 손을 뿌리치고 마탑주에게 달려갔다.
“날 도와줘요!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걸 얻게 해 줄 테니까!”
마탑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원하는 걸? 네가 그걸 알고 있기라도 한 건가?”
“당신은 드래곤을 자신의 손으로 재현하길 원하잖아요!”
가스팔의 눈이 순수한 놀라움으로 커졌다.
“…황후가 말해 줬나?”
“아니. 그럴 리가.”
“사방에 내 목적을 떠들고 다닌 기억은 없는데. 왜…….”
…그걸 잘 안다는 것처럼 구는 여자가 둘이나 있을까?
가스팔은 그 말을 끝까지 내뱉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자신감과 확신에 차 있는 에반젤린의 태도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반젤린은 상처의 고통이나 대주교의 만류 따위는 잊은 채, 가스팔에게 다가가 열정적으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가스팔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사라졌다.
반대로 에반젤린의 얼굴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꽃처럼 피어났다.
피처럼 붉은 꽃이 만개했다.
가스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들어 올렸고, 넘실거리는 불꽃 위로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최악의 수확제 밤이었다.
Chapter 16. 아르타누스
굉음과 폭발이 세상을 가득 채운 순간.
아르파드가 나를 끌어안아 제 몸을 방패 삼은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안 돼!’
그를 막으려는 내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올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르파드의 단단한 팔다리에 막혀 내 저항 역시 의미가 없어졌다.
그리고 눈앞이 새까만 어둠으로 물들었다.
-…….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그렇게나 애썼는데.
세 번이나 회귀한 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야?
-…….
까마득한 허무함이 몰려오고, 연이어 분노가 치솟았다.
온몸이 그대로 타오르는 불꽃이 된 것처럼.
나도 모르게 욕설이 입 밖으로 나왔다.
“××!”
그걸 들은 순간, 깨달았다.
살아 있구나!
입이 있어야 욕설도 내뱉을 수 있고,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으니.
-…그전에 일단 살아 있어야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거야 죽기 전의 주마등이라고 생각했…….
그 시점에서 나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뭐야? 지금 나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 거지?
풀을 발라 붙여 놓은 것 같은 눈을 억지로 떴을 때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붉은 눈이었다.
세로로 긴 홍채가 기이한 파충류의 거대한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