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제실 안의 상황을 비오 대주교는 바로 옆에서 감시 중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의 소중한 사도가 다칠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울린 순간, 그는 신관 및 신전 기사들을 대동하고 제실로 들이닥쳤다.
“에반젤린 님!”
그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 붉게 빛나는 눈동자.
황태자의 피부 곳곳에서 파충류의 비늘이 일어서고 있었다.
길어진 손톱이 마치 칼날처럼 구부러지며 에반젤린의 살을 찌른다.
한눈에도 알 수 있었다.
광증.
“하필이면 지금……!”
아르파드와 에반젤린이 제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사이 황실의 혈통을 수태하는 건 불가능할 터.’
어쨌건 지금은 저 미친 짐승의 손아귀에서 사도를 빼내는 것이 중요했다.
대주교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키랄. 소브린. 아말.”
이름이 불린 천주신의 신관들은 기꺼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입에서 신성언이 흘러나오며 동시에 방 전체에 숨겨져 있던 신성진이 드러났다.
순식간에 상급 신관 셋의 목숨과 영혼을 쥐어짜 낸 신성진이 발동해, 광증으로 미쳐 버린 아르파드를 구속했다.
차르르―!
은색의 사슬이 사방의 벽과 바닥, 천장에서 뻗어와 아르파드의 몸을 휘감았다.
그사이 대주교가 직접 몸을 날려 아르파드의 손에서 에반젤린을 구해 냈다.
아르파드의 공격에 신물의 권능은 힘을 잃고, 에반젤린은 본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아악! 아아악! 내 얼굴!”
에반젤린은 피가 흐르는 얼굴을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흐느낌과 절망 어린 신음이 귀를 쟁쟁히 울렸다.
대주교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애써 표정을 편 채 에반젤린을 달래려 애썼다.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아! 왜 이렇게 늦은 거야!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에반젤린은 자신을 구해 낸 대주교에게 감사는커녕 원망과 분노를 토하기 바빴다.
“더 빨리 왔어야지!”
“…죄송합니다.”
마지못해 사죄한 대주교의 눈빛은 차가웠다.
에반젤린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제 상처에 신경 쓰느라 바빴다.
“괜찮겠지? 흉터가 남으면 안 될 텐데. 신성력으로 고쳐 줄 수 있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음과 함께 에반젤린을 달래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을 삼켰다.
‘아무리 강력한 신성력을 퍼부어도… 흉터가 남을 수밖에 없겠는데.’
그냥 물리적인 상처였다면 신성력으로 흉터가 남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가해자가 아르파드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광증으로 미쳐 버린 직후.
안 그래도 강력한 마력이 그야말로 폭주한 상태.
상처에 남은 아르파드의 마력이 신성력 치료를 방해할 게 틀림없었다.
에반젤린이 이를 알면 난리를 칠 것이 뻔했기에 대주교는 진실을 숨겼다.
‘겉에 흠이 좀 남는다고 해도 사도의 역할에는 문제가 없을 테니.’
판단을 끝낸 그는 신성력 주박에 사로잡힌 아르파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아아악!!!”
미친 짐승의 울부짖음이 제실 안을 울렸다.
아르파드가 발버둥 치자 신성력 사슬이 더더욱 옥죄어 들었다.
콰드득!
칼날 같은 손톱이 바닥과 벽을 파헤쳤다. 천이나 침대는 발버둥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찢어지고 박살이 났다.
“히익!”
그걸 보고 조금 전까지 아르파드를 원한다며 안겨 들던 에반젤린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하마터면 저 손톱에 갈가리 찢겨 버릴 뻔했으니 당연했다.
게다가 아르파드의 울부짖음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드래곤 피어가 섞여 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에 굳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에반젤린은 순간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져 비명을 지르며 대주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괴, 괴물!!!”
“진정하십시오. 사도여.”
하룻밤이지만 아르파드를 손에 넣고, 아이를 가져 제국까지 손에 넣겠다던 야심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생물학적인 공포만이 남아 있을 뿐.
에반젤린은 악을 쓰며 대주교에게 매달려 외쳤다.
“빨리 저 괴물을 없애 버려! 날 죽일 거라고!”
대주교는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볼일이 끝나면 죽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 버린 건 예상외다.
‘어떤 전조도 없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광증에 잡아먹혔다고?’
그는 황실을 증오하는 만큼 그에 관해 연구도 많이 해 왔다.
무엇보다 그의 손에 있는 <운명의 서>를 통해서 얻은 정보 역시 많았다.
지금 아르파드의 상태는 일반적인 광증 발발과는 달랐다.
‘이런 경우는 차라리…….’
상황은 대주교가 생각에 골몰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폭주 중인 아르파드의 저항이 더더욱 격렬해지더니, 신성력의 사슬 중 하나를 깨뜨려 버렸다.
까드득!
사슬 하나가 부서진 만큼, 아르파드는 그들을 향해 전진했다.
맹수의 살기와 그것이 주는 공포감이 더더욱 강해진다.
대주교는 혀를 차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신성언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위대한 아버지, 주신의 이름하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께 청하나니. 그릇된 힘을 파괴하소서!
그와 함께 바닥에서 엄청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곧 수십 겹의 신성진이 형성됐다.
빛은 아르파드에게 집중되어, 존재 자체를 지우고 부수려 하기 시작했다.
대주교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마지막 수단이다.
가장 강력한 용혈의 소유자를 확실하게 없앨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역량과 지식을 다하여 만든 함정.
“카아아악—!!!”
분노와 살의로 들끓던 외침에 처음으로 고통이 어리기 시작했다.
대주교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짐승의 핏줄은 얻지 못했지만, 저자가 가진 아그리피나의 신물을 확보하는 것은 가능하겠지.’
그의 만족감은 단순히 신물을 하나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계획과는 다르지만, 지금 역대 황족 중 가장 진하고 강한 용혈의 소유자가 죽어 가고 있었다.
신성력에 의해서.
이것이 가능하다는 게 알려지면 경악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대주교 역시 이만한 위력을 보이는 신성진에 놀라고 있었으므로.
그 때문에 비오는 다시금 확신을 얻었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신에게서 기원한 신성은 진정한 인간의 힘이며, 짐승과 섞인 더러운 마력보다 우위에 있는 힘이다.
그것이 지금, 증명되고 있었다.
대주교는 희열에 젖어 중얼거렸다.
“그래. 깨끗하게 정화해 주마.”
그때였다.
누구도 예상 못 한 폭발이 제실의 옆 벽을 박살 냈다.
콰과광—!!!!
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조각난 벽돌의 파편과 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에반젤린의 비명이 다시 울렸다.
“꺄아악! 이건 또 뭐야?!”
“무슨……!”
에반젤린을 끌어안은 대주교가 충격에 데굴데굴 구르는 사이.
폭파된 벽의 구멍으로 달려 들어온 인영이 있었다.
옅은 벚꽃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르파드!”
* * *
“헉헉!”
만약을 대비해 두길 정말 다행이었다.
언제든 몸에 지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작은 장신구 형태의 마도구를 몇 개 준비해 두었었다.
당연히 이곳까지 가져왔고, 다른 곳으로 유인당해서 정체 모를 남자가 습격했을 때.
내 준비가 빛을 발했다.
쾅—!
마도구가 폭발하며 나를 덮치려던 일그러진 외모의 사내를 쓰러뜨렸다.
피가 얼굴과 옷에 튀었지만 나는 두려워하거나 놀라 굳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만 노린 게 아닐 거야.’
저들 역시 용혈의 소유자인 아르파드의 힘을 안다.
그렇다면 내 경우보다 몇 배는 더 신경을 써서 준비해 두었을 거다.
그것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아르파드가 나를 구하러 오지 못한다는 건, 본인이 위험한 상황인 게 틀림없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금 전 아르파드를 떠올릴 때의 기분 좋은 기대감과는 달랐다.
지독히도 불길한 예감.
심장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마구 날뛰고 있었다.
나는 시체를 걷어치우고 그대로 일어나 달렸다.
어째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르파드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온몸의 세포가 오로지 그를 향해서 달려가려 하는 것처럼.
서로를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달려간 끝에, 애초에 내가 안내된 곳이 진짜 제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막아!”
영문을 모르는 지모신의 신관들.
그리고 나를 본 순간 경악해서 달려들려는 천주신의 신관들.
나는 목걸이를 빼내 흩뿌렸다. 목걸이의 알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마도구였다.
강력한 전류가 내 앞을 막으려 드는 자들을 마비시켰다.
“아악!”
“꺄아아악!”
“컥!”
비명이 울리고 기절해서 쓰러지는 이들을 무시한 채, 나는 마구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파드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안쪽에서 울리는 괴성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위험해!’
지금 아르파드는 광증에 잡아먹힌 상태였다.
얼마 전 진홍월 때보다 몇 배는 심각한 상황.
나는 가장 위력이 강한 마도구를 벽에 던져 발동시켰다.
‘제발!’
콰과광—!!!
건물이 뒤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폭주한 상태로 신성력의 사슬에 매여 있는 그가 보였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알 수 없는 신성력이 사방에서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아르파드!”
나는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당혹감과 공포 속에서 에반젤린은 목격했다.
광증으로 미쳐 날뛰는 아르파드.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벽을 부수며 달려 들어온 힐리아.
그리고 힐리아가 망설임 없이 아르파드에게 달려가는 걸 본 순간, 지독한 악의 어린 기대가 솟아올랐다.
‘그래. 너도… 너도 당해 봐! 너라고 다를 줄 알아? 미쳐서 괴물이 되어 버린 남자에게 물어뜯기고 갈가리 찢길 거야!’
자신처럼 아르파드에게 공격당하고 울부짖을 힐리아의 모습을 기대했다.
이후 이어진 광경에 에반젤린의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