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탈혼으로 남편부터 바꾸겠습니다-145화 (145/210)

145화

에반젤린은 승리감에 취했다.

아르파드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울린다.

“힐리아.”

잠시 얼굴이 일그러질 뻔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밤과 꿈의 여신 모르페네이아의 신물이 가진 권능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재판 때 벨테인 경을 조종하기 위해 사용했던 그 힘이다.

그사이 비오 대주교는 신물의 힘을 더더욱 강하게 개화시켰다.

그 결과 잠시지만 타인의 모습을 훔치는 것마저 가능해졌다.

‘치욕을 감내한 보람이 있어.’

얼마 전 힐리아에게 굴욕을 당하면서까지 직접 만났던 것도 지금을 위해서였다.

신물이 힐리아의 외모를 직접 담은 뒤에야 그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누구의 모습을 훔쳤든 중요하지 않다.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을 안고 있는 게 아르파드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래. 아르파드 정도 되는 남자여야 내 남자가 될 자격이 있지.’

힐리아에게는 과분한 남자였다.

‘이 세상의 진짜 주인공인 나에게 말이야!’

에반젤린은 얼마 전 있었던, 비오 대주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 * *

대주교는 에반젤린을 외지고 낡은 신전으로 불러들였다.

행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 쓰라는 당부까지 하며.

평민이나 입을 법한 낡은 옷차림을 한 에반젤린은 불평을 속으로 삼켰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기에 날 이런 데로 부른 거야?’

비오 대주교는 신전 구석의 비밀스러운 방에서 제단 위에 올려진 낡은 책 한 권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있었다.

그걸 앞에 둔 채, 뜬금없는 말부터 시작해 에반젤린을 황당하게 했다.

“이 세상은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결국 신의 일개 피조물, 결국 짐승에 불과할진대. 그 혈통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평원의 소유권을 빌미 삼아 짐승의 후예들이 제국과 대륙을 좌지우지하고 있지요. 위대한 세상의 주인들께선 잊혀 계시지요.”

“…당신이 이 세상에 무슨 불만이 있고, 무슨 목적인지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 없다는 건 이미 알잖아요? 난 지루한 말이나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 그나저나 왜 이런 데로 부른 거예요?”

대주교는 의외의 말을 했다.

“제가 왜 당신과 협력하며 당신을 관찰하고 시험했는지 아십니까?”

“그야… 서로 목적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될 테니까.”

자기 입으로 ‘시험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에반젤린은 짙은 불쾌감을 느꼈다.

종종 저자에게서 느낀 오만함과 불쾌감이 정확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주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런 거라면, 상황을 지켜보다가 차라리 황태자비와 손을 잡는 게 나았을 겁니다. 지금의 당신을 굳이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죠.”

“…웃기지 말아요! 그따위로 나를 모욕하려고 부른 줄 알았으면, 절대 안 왔어!”

에반젤린이 수치심과 굴욕으로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그대로 돌아가 버리려는 기세였다.

그때, 전혀 예상 못 한 질문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당신에게 난 영혼과 육체의 균열을 봤습니다. 특별한 현상이지요. 보통 인간들에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에반젤린 루스. 설마 아직도 내 이름 모르고 있었어요?”

“그게 아닐 겁니다. 당신의 영혼이 가진 진짜 이름은요.”

에반젤린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그 놀라움과 두려움은 이어진 대주교의 말로 인한 경악보다 크진 않았다.

“…혹시 당신의 진짜 이름, 이 발음이 맞는지 모르겠군요. ‘유신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대주교는 ‘유신아’라고 말했다.

대주교는 환하게 웃으며 제단에 있던 낡은 책을 꺼냈다.

거의 방패만 한 크기의 책은 당장에라도 책장이 삭아서 떨어질 듯했다.

대주교는 품속에 가지고 있던 데스포이나의 신물을 발동시켰다. 보석에서 흘러나온 녹색의 빛이 닿자 책이 빛나기 시작했다.

대주교는 책장을 넘기며 보여 주었다.

책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페이지가 더 많았다.

내용이 채워진 페이지조차 에반젤린이 읽을 수 없는 글자들로 빼곡했다.

에반젤린은 읽지 못했으나 저 문자가 신전에서 쓰는 신성언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건……?”

“다섯 여신이 엮어 낸 <운명의 서>입니다.”

그의 설명은 꽤 장황하고 열정적이었는데, 요약하면 이러했다.

“천주신과 지모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후 낳은 것이 바로 다섯 자매 신입니다. 그들은 빈 책과 같은 세상에 이야기를 써넣기로 했습니다. 살아갈 인간들을 만들어 낸 겁니다.”

“그 방식이 바로 이 <운명의 서>입니다. ‘책’에 ‘글’로 적혀 있지요.”

“모든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필요한 법입니다. 한 번에 한 명의 영혼이 늘 이 <운명의 서>의 주인공으로 선택됩니다. 그리고…….”

에반젤린, 아니, 빙의자 유신아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환희를 느꼈다.

“그게… 나라는 거죠?”

그래야 한다. 반드시.

만일 아니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녀는 대주교를 목 졸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맞습니다. ‘유신아’. 얼마 전에야 그 이름을 겨우 읽어 냈습니다.”

“…!”

“바로 당신의 진짜 이름이지요.”

역시 그랬다.

그녀가 진짜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다.

‘원작’을 읽은 자신이 왜 이 세계에 빙의했겠는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답은 존재할 수 없었다.

대주교는 희열에 찬 그녀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 꿇었다.

“당신은 신들에게 선택받은 존재입니다. 운명의 주인. 신들의 사도시여.”

* * *

에반젤린은 새삼 짜릿함을 느꼈다.

“당신께서 제국과 이 대륙을 바른길로 되돌리시는 겁니다. 짐승의 손아귀에서, 신들의 품으로.”

대주교의 광신도적인 말은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마음에 들었다.

제국을, 대륙을 이 손아귀에 넣는 것.

그건 에반젤린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으므로.

에반젤린은 대주교에게 당당하게 명령했다.

“나는 황후가 되어야 해.”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그녀를 인정한 대주교는 황후와 달랐다.

루드비히 따위의 아이를 가지고 내세우고 싶지 않다고 하자, 이를 따랐다.

“그런 자는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에반젤린이 간절히 바라던 대답을 그대로 해 주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대주교는 아르타누아 평원의 신전에 심혈을 기울인 함정을 만들어 두었다.

가장 강력한 신물과 신성력을 모아서.

루드비히 정도로 용혈이 옅은 자는 상급 신관 몇 명의 신성력으로도 그 힘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그 수준으로는 제압할 수 없었다.

이 신전과 그간 모은 신물들, 신관 수십의 목숨을 말 그대로 갈아 넣어 증폭한 신성력으로 겨우 그 용혈과 마력을 억제하는 중인 것이다.

“그것으로도 완전히 황태자를 무력화하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잠시 약화시키고 혼란을 줄 순 있지요.”

그 말대로였다. 지금의 아르파드는 평소와 달리 혼란스럽고 어지러워 보였다.

‘이 정도면 내가 굳이 힐리아를 가장할 필요는 없었던 거 아니야?’

자신의 몸을 꽉 끌어안는 굵은 팔의 힘을 느끼며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약해지고 혼란한 상태라도 자신이 아르파드를 혼자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데스포이나는 씨앗과 수확의 여신. 또한 모든 종류의 결실 역시 그녀의 소관이다.

아이 역시.

오늘 밤 이 신전에는 데스포이나의 신물이 펼친 가호가 가득했다.

황실에 내려오는 속설은 이 신전에 서린 데스포이나의 힘에 의한 것.

지금은 그 힘이 몇 배로 강력하게 펼쳐져 있었다.

“힐리아…….”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아르파드는 못마땅했지만 상관없었다.

‘오늘 밤을 함께 보내면… 내가 아르파드의 아이를 가지게 될 테니까.’

그리고 아이를 손에 넣은 후에는 아쉽지만 약해진 아르파드는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주교나 신물의 힘으로도 완전히 지배하는 건 불가능했고, 루드비히처럼 그녀가 조종하는 대로 따라 줄 인물도 아니었으니까.

에반젤린은 두 팔로 아르파드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중앙의 침대로 그를 이끌었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당신은 내 거예요.”

에반젤린은 오랜만에 충만한 기쁨과 만족감을 느꼈다.

아르파드는 에반젤린을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 침대로 쓰러뜨리려는 듯 체중을 실어 왔다.

에반젤린의 기대와 기쁨은 다음 순간 산산이 깨어졌다.

콰득!

끔찍한 소리가 울렸고, 고통은 한참 늦게 찾아왔다. 피가 튀어 하얀 제의가 더럽혀졌다.

“…!”

에반젤린은 아르파드가 자신의 뺨을 물어뜯은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남자의 눈빛이 보였다. 그림자 속에서 붉게 빛나고 있는 안광은 미쳐 버린 짐승의 것이었다.

광증에 사로잡힌 자의 것.

에반젤린의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아아아아악!!!”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