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지만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싶다.
입술은 물론, 목구멍까지 메마른 나뭇등걸처럼 쩍쩍 갈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물 한 모금도 섣불리 마실 수 없었다.
‘비오 대주교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니.’
아르파드에게도 이미 단단히 말해 두었다. 먹고 마시는 것에 주의하라고.
“내가 주는 거 아니면 절대 먹지 말아요.”
“조금 설레는데.”
“갑자기 왜요?”
“당신이 나에게 집착해서 하나하나 제한하려 든다고 생각하니까 좀 흥분돼.”
“진짜 변태 맞다니까…….”
게다가 아까 지모신의 나이 든 여신관의 태도가 좀 꺼림칙했던 걸 생각하면 과민한 게 아니었다.
지금 나는 몇 번째인지 모를, 오늘의 마지막 목욕재계임이 분명한 일을 진행 중이었다.
종교적인 행사다보니 뭐 하나를 하려면 몸부터 정결하게 해야 한다며 난리였다.
마지막 목욕 중에 내가 심하게 긴장한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지금 몸을 씻는 행위가 뒤에 있을 일에 대한 노골적인 준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르파드가 한 선전포고(?)가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늘 밤은… 안 참을 거야. 싫으면 지금 싫다고 해.”
몸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심장이 되어 펄떡펄떡 뛰는 느낌이다.
‘지금쯤 아르파드도 씻고 있겠지?’
내가 몸을 담근 샘의 물이 심장의 두근거림을 따라 출렁거리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나치게 부끄럽고… 또 기대되었다.
이 설렘을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 * *
힐리아의 예상대로 아르파드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신성한 샘에서 퍼 올린 물에 몸을 다시 담그고 씻는 중이다.
목욕물에는 제례를 위한 향유가 듬뿍 부어져 있었고, 방의 네 구석에는 몰약이 든 향로가 놓여 있었다.
아르파드는 가슴이 술렁거리는 걸 느끼며, 뜨거운 물을 두 손으로 퍼 올려 얼굴을 씻었다.
‘귀찮군.’
당장에라도 힐리아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무리 아르파드라 해도 황제와 황후 대신 제주로 참여한 수확제에서 절차를 무시할 순 없었다.
‘게다가 목욕재계만 마치면 마지막 절차만 남아 있기도 하니까…….’
이 거치적거리고 짜증 나는 행사나 사람들에게서 자유로워진 채, 단둘만 남을 수 있었다.
그 뒤는 누구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할 거다.
아르파드는 온몸에 불이 붙는 듯한 뜨거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심장이 불규칙하고 요란하게 날뛴다.
새삼스럽고 신기했다.
‘펠릭스 말대로군. 첫사랑에 정신 못 차리는 애송이 그 자체야.’
이렇게 두근거리고 설레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라니.
신기하고 어색했다. 느껴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감정들뿐이다.
기대는 초조함을 낳았고, 이는 스스로 몸의 감각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게 했다.
아르파드는 피식 웃었다.
‘나도 인간이 맞긴 한 모양이지.’
아르파드가 몸을 담근 수면에 물비늘이 하얗게 빛났다.
독한 몰약의 향이 비강을 가득 채워 다른 모든 냄새를 가렸다.
* * *
비정상적으로 길게 느껴졌던 마지막 목욕 후.
나는 다시 제의를 입고, 신관들에 둘러싸여 안내받았다.
“오늘 하룻밤을 보내실 제실(祭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걸음걸음이 심장을 쿵쿵 두드리는 듯한 느낌이다.
무리도 아니긴 했다.
‘…진짜 첫날밤이니까.’
신전에서 신관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 혼자 좀 저속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원래 그런 행사(?)인걸. 내 잘못 아니다, 뭐.’
애초에 부부가 함께 밤을 지새우며 풍요를 비는 거다. 함의가 아주 명확했다.
황제는 아예 좋은 소식을 기대한다고까지 하지 않았나.
역대 황손들이 이날, 이곳에서 잉태된 경우가 많다면서.
새삼 얼굴에 열이 오르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 속설, 진짜일까? 사실 나는 좀 더 신혼을 즐기고 싶… 아니, 아니. 이게 아니지.’
잠시 민망하고 앞서 나간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신관들은 경건한 태도로 방문을 열고 물러났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방문은 잠겨 있을 예정입니다.”
세상에. 아예 하룻밤 내내 가둬 두다니.
…역시 별로 신성하거나 엄숙하지 않은 행사였다.
“수고했어요.”
의례적인 대답을 건네며, 나는 긴장된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섰다.
생각보다 제실은 작고 어두웠다.
‘불을 안 켜 뒀네. 아, 하긴 필요가 없으려나.’
등 뒤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방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침대 하나만 놓인 단출한 공간이다.
그리고 안쪽에 키가 큰 인영이 서 있었다.
나는 반가워서 그에게 다가가며 이름을 불렀다.
“아르파드!”
“…….”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웃으며 나를 향해 달려오지도 않았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남자의 그림자를 향해 몇 발 다가갔을 때였다.
아무리 어두웠지만 아르파드의 모습을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카타콤의 짙은 어둠 속에서도 아르파드의 붉은 눈은 맹수처럼 빛났으니까.
내 남편은 그림자만 봐도 잘생긴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모든 게 낯설었다.
지독한 불길함, 그리고 섬뜩한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나는 뭔가 잘못된 것을 예감하면서도, 제발 아니길 바라며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파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훅 달려들었다.
“!”
쿵! 강한 충격과 함께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 * *
분명히 발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왜 푹푹 빠지는 솜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두 가지 이상한 느낌이 아르파드의 몸과 정신을 뒤흔들고 쥐어짜고 있었다.
몸에 열이 올랐다.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불규칙하게 날뛰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뜨겁게 달군 칼날이 마구 찌르는 듯한 감각.
그도 아는 느낌이었다. 가장 경계하고 있었기에 비슷한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면 신경이 바짝 곤두섰기 때문이다.
‘광증이 발작할 때와 조금 비슷한 감각…인데.’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광증의 전조와 반대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이 불이라면, 얼음이 함께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과 마력을 낱낱이 분해해서 흩트리는 느낌.
오감이 점차 무뎌지고 있었다. 노곤하고 나른한, 거의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두 가지 감각이 동시에 극에 달한다.
그가 쓰러지지 않은 채 제 발로 걸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용혈이 준 강인한 신체와 정신 덕분이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자신이 누구의 인도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쿵.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느리게 깨달았다.
‘도착한 건가?’
목적지.
목적지? 어디로?
아르파드는 조금 느리지만,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건 잊을 수 있지만, 한 가지만은 불가능했으니까.
‘힐리아…….’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곳.
오늘 그가 그녀와 함께할 예정인 장소.
널찍한 방 안에는 유향과 몰약을 넣은 향로가 짙은 연기를 피워 올렸고, 천장에 매달린 초는 고요하게 타오르며 방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방 가운데에는 드래곤과 신들의 이름, 문장이 새겨진 레이스 천이 드리워졌고, 그 안에는 제단을 닮은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도 아르파드는 참 노골적이라는 감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곧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노골적? 뭐가 노골적이라는 거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흐려지려는 의식의 끝자락을 부여잡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입 안에 피 맛이 돌았다. 혀와 살점을 스스로 물어뜯어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식은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안 돼.’
그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감겨 왔다.
“아르파드.”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이 있었기에 볼 수 있었다.
방 가운데에 선 한 여자를.
밤에 핀 벚꽃처럼 빛나고 있는 여자를.
“힐리아.”
분명히 그녀였다.
흰 제의 위로 흐트러진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유달리 선명했다.
너무 아름다워 마치 꿈결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예요.”
그녀는 빠르게 다가와 아르파드를 끌어안았다.
* * *
에반젤린은 희열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향해 기울어지는 남자의 품에 안겼다.
‘드디어, 드디어 손에 넣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