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의식 자체는 더없이 경건했다.
갓 익은 평원의 첫 밀과 보리의 이삭을 두 명의 제주가 함께 묶어 제단에 올렸다.
아르파드는 오늘 낮 나와 헤어져 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평원 내 숲에서 직접 잡아 온 제물을 올렸다.
‘그사이에 저렇게 큰 사슴을 잡다니…….’
왕관처럼 커다란 뿔을 가진 2m에 가까운 거대한 수사슴이었다.
네 명의 천주신 신관들이 커다란 나무 받침에 올려 들고 온 제물을 아르파드는 혼자서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그 옆에서 나이 든 지모신의 신관이 따라 주는 포도주를 은잔에 받았다.
“신전에서 작년 첫 수확한 포도주로, 정성스레 담근 와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주(祭酒)다.
“이제 두 분께서 차례로 포도주를 마시고, 남은 것을 제단에 부으시면 됩니다.”
예식 순서를 일러 준 노신관의 주름진 손이 거둬진 순간.
나는 와인을 제단에 부어 버렸다.
“…!”
신관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고 격앙된 건 포도주를 따라 준 지모신의 신관이었다.
“어, 어찌 이런 불경스러운 짓을 하십니까?!”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불경스럽다니요. 우리가 먼저 맛보는 것이 도리어 면구스러워 신들께 바친 것을요.”
“…!”
나는 눈앞에서 당황하는 지모신의 노신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멀리 선 비오 대주교 역시.
‘에반젤린과 대주교가 있는데 뭘 믿고 이런 걸 함부로 입에 대겠어. 나도 그렇고, 특히 아르파드를……!’
지모신의 노신관이 아르파드에게 도와 달라는 듯 시선을 보냈다.
“황태자 전하! 이는 오랜 전통입니다. 비 전하께서 함부로 어기시는 건, 전하께서 꾸짖으셔야……!”
그러자 아르파드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갑게 말했다.
“누가 감히 내 아내를 꾸짖는단 말인가?”
“예? 그, 그야… 남편이자 황태자이신 전하께서……!”
아르파드는 호통을 쳤다.
“내가 어찌 감히 내 비를 꾸짖을 수 있겠는가!”
“전하!”
“천주신과 지모신께서 동등한 부부이신 것처럼, 나와 내 아내 역시 그러하다. 그대 말처럼 내가 내 아내를 꾸짖을 수 있다면, 지모신의 신관들도 천주신의 신관에게 감독을 받아야 할 터.”
“어,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지모신의 신관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천주신의 신관들은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듯했다.
아르파드의 말 그대로 자신들이 지모신의 신관들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던가.
혹은 내 행동을 꼬투리 잡던가.
그들이 어느 한쪽을 선택해 이익을 보는 걸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포도주병을 들고 있는 노신관에게 다가가 그 병을 통째로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들고 제단 안쪽, 아르타누스의 상이 모셔진 곳으로 다가가 소리 높여 말했다.
“그리고 이 평원의 주인이신 아르타누스께도 술을 먼저 올립니다.”
병에 남은 포도주가 아르타누스의 상에 모조리 부어졌다.
“…!”
‘어쩔 거야. 신에게 먼저 바치고, 평원의 주인께 먼저 바치겠다는데.’
노신관이 경악을 내질렀다.
“이, 이러면 예식에 쓸 제주가 없습니다!”
나는 그녀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명했다.
“애니.”
“예, 비 전하.”
애니는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은잔을 가져왔다.
은잔은 예식에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잔과 와인 모두 내가 미리 준비시켜 애니에게 보관하다가 가져오도록 한 것이다.
‘안전에는 최선을 다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비오 대주교가 참여하는 제례다.
게다가 황후나 에반젤린이 뒤에서 무슨 수를 쓸지 모른다.
내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예식 도중 우리가 직접 마셔야 하는 제주였다.
그래서 굳이 저들이 준비한 술을 제단과 아르타누스 상에 뿌리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직접 마시는 건 안전한 것으로.
나는 잔을 받아 먼저 한 입 마시고 아르파드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오늘 의식을 위해 직접 담근 포도주랍니다.”
지모신의 신전에서 만든 포도주를 버린 대신 올리는 제주는 더 큰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아르타누스의 이름을 한 번 더 팔았다.
‘아르타누스가 축복한 내가 직접 담근 술이라는 데 어쩔 거야.’
아르파드는 환하게 웃으며 잔을 받았다.
“아르타누스께서 기뻐하시겠군.”
그 역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남은 것을 제단에 부었다.
명분을 단단히 쌓았기 때문인지, 아르파드가 워낙 으름장을 놨기 때문인지, 신관들은 더는 뭐라고 흠을 잡지 못했다.
나와 아르파드가 제단에 불을 붙여 제물을 태우는 의식을 끝낼 때까지.
이것으로 제례 도중의 가장 큰 위험은 막아 낸 셈이었다.
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모신의 노신관은 제단과 아르타누스 상에 쏟아진 와인을 보고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황태자비! 병에 남은 것까지 전부 쏟아 버리다니!’
황후의 협박에 따라 그녀가 저 와인에 넣은 것은 전혀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치욕 가득한 얼굴을 깊이 숙인 채 교활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가 준비한 건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 * *
아르타누아 평원의 신전 비밀 공간에서 한 여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가는 틈새로 제단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보였다.
에반젤린은 힐리아의 발버둥을 비웃으며 보고 있었다.
‘애먼 술로 흠을 잡아 봤자 소용없어. 멍청한 힐리아.’
그녀와 대주교가 준비한 오늘 밤의 음모는 술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에반젤린은 흰 비단 옷자락을 매만지며 비밀 공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모신과 아르타누스, 데스포이나의 문장이 섬세하게 수놓인 신관복이 우아하게 펼쳐졌다.
지금 그녀가 입은 것은 수확제에서 여성 제주가 입는 의복이다.
즉, 지금 힐리아와 같은 옷이었다.
깔끔하게 땋아 올린 머리 모양까지 힐리아와 똑같이 맞췄다.
에반젤린은 품속에서 검은색 보석을 꺼내 머리에 달았다.
그 순간, 보석이 공명하며 신물에 가득한 여신의 신력이 진면목을 보였다.
이 신물은 밤과 꿈의 여신 모르페네이아의 것.
검은빛이 에반젤린을 휘감아 돌았다.
그 끝에, 옅은 분홍색으로 물든 머리카락이 사뿐히 가라앉았다.
* * *
내가 제주를 바꿔치기하는 일을 잘 끝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옆에서 아르파드는 어이없을 정도로 한가로운 말을 했다.
“역시 너무 예뻐서 마음에 안 들어.”
“또 무슨 헛소리예요?”
그와 나는 소곤소곤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곁에 선 신관들도 듣지 못하도록.
아르파드의 열정적인 시선이 제의로 감싸인 내 몸을 쓱 훑었다.
나도 모르게 등줄기가 짜릿해졌다.
마치 아르파드의 시선에 촉감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 말대로잖아. 제의를 입은 그대가 너무나도 매혹적이라서 불만이야.”
“또 말하지만, 이 옷은 아주 금욕적인 디자인이에요. 당신도 비슷한…….”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희고 두꺼운 비단에 둘러싸인 아르파드의 몸을 향했다.
아무리 겹겹의 옷감으로 가렸어도 그의 건장한 체격을 숨길 순 없었다.
흉곽이 크고 넓은 반면 허리는 꽉 조여져 있었다.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깎아 낸 듯한 남성미의 결정체 같은 몸이다.
특히 나는 저 두꺼운 옷 안에 들어 있는 흰 피부와 근육이 얼마나 완벽하고 아름답게 짜여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
아니, 이게 아니지!
고개를 돌려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려 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잠깐 넋이 나간 걸 아르파드가 기민하게 눈치챈 모양이다.
그는 낮게 속삭였다.
“내가 제의를 입은 모습도 당신이 보기에 괜찮아 보이나?”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그야말로 온몸이 긴장될 정도로 예술적…….
‘으아아아! 이게 아니야!’
어떻게든 머릿속에 끼어든 음란마귀를 떨쳐 내려는데, 아르파드가 자꾸 방해했다.
“그렇다면 기쁠 거야. 부러 내 몸에 꽉 맞게 수선해 달라고 한 보람이 있군.”
“아니, 그런 바람직, 아니, 아니지! 쓸데없는 짓은 왜 한 거예요?!”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꽃 같은 미소가 내 남편의 얼굴 가득 피어올랐다.
“말했잖아. 나는 계속 당신을 유혹하는 중이라고.”
“…….”
의식이 다 끝나 가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아르파드는 주변 시선을 정말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누르며 보란 듯 매혹적으로 웃는다.
나는 새삼스레 인정하고 저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의 매력은 너무나도 강렬했고, 온 힘과 마음을 다해 나를 원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게 욕망 때문이 아니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수없이 증명했다.
그리고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나의 욕망에 불을 붙였다.
아르파드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감아 돌았다.
“아까 당신의 고백을 듣고도 그냥 떨어져야 해서 내가 얼마나 애가 탔는지 알아?”
나도 그랬다. 신관들에게 시중을 받고, 설명을 들으며 열심히 움직였으나, 영혼은 이미 한쪽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오늘 밤은… 안 참을 거야. 싫으면 지금 싫다고 해.”
나는 뺨을 붉혔다. 그리고 아르파드만 눈치챌 수 있도록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를 원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