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아르파드가 떨어뜨린 잔은 그의 무릎에 한 번 부딪힌 다음,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아!”
당연히 찻물이 아르파드의 옷과 주변에 튀었다. 다행히 가득 차 있던 잔은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남긴 했나 보다.
내가 부서진 찻잔과 찻물에 젖은 옷에 신경 쓰는 사이 아르파드는 조용했다.
“…….”
그의 무릎에 생긴 얼룩을 보다가 지나치게 아무 말이 없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 만난 이후 최고로 멍청한 표정을 한 그를 마주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된 듯한 얼굴로, 아르파드는 굳어 있었다.
‘이건 상상해 본 반응 중에 없었는데.’
나는 살짝 웃음이 터지려는 걸 누르며 물었다.
“누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얼굴을 그렇게 막 쓰래요?”
“…!”
이 말에 아르파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 기절했다 깨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
아르파드의 다급한 손길이 내 어깨를 조심스레 감쌌다.
“방금 내가 꿈을 꾼 건가?”
오, 이건 상상한 반응 중 하나였다.
그래서 생각해 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꿈이면 어쩌게요? 깨 버리면 끝인데?”
대답이라기보단 질문이지만.
아르파드는 횡설수설했다.
“정말 깨기 싫은 꿈인 거지. 하지만 안 깨면 진짜 당신을 볼 수가 없고… 아, 그런데 진짜 깨기 싫군.”
조금 전까지 내가 흘린 과자를 치우고, 초콜릿을 먹여 주던 사람이 넋이 나가 버렸다.
나는 시종에게 얼음물을 가져오게 했다.
“이거 먹고 정신 차려요. 꿈 아니니까.”
아르파드는 꽤 큰 컵을 두 번 꿀꺽거리더니 다 비워 버리고, 얼음을 와작와작 씹었다.
“차가워. 이런 감각이 꿈속에서 느껴지다니, 이상한데…….”
아르파드의 붉은 눈에 안광이 돌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란 소리군.”
당장에라도 활활 타 버릴 듯한 붉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쟁반 위에 유리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 시종을 물렸다. 조금 전처럼 우리 단둘만 남았다.
그사이 나는 다시 내 자리로 가서 앉아 있었는데, 아르파드는 미끄러지듯 내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내 무릎 위에 손과 얼굴을 올린 채 올려다보는 태도가… 너무 간절해 보였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지?”
대답하기도 전에 아르파드는 한 번 더 빌었다.
“제발 그렇다고 해 줘. 안 그러면 미쳐 버릴 것 같아.”
“당신 잘 참고, 잘 기다린다면서요?”
자잘한 웃음의 파편이 내 목소리에 섞인 게 느껴졌다.
“당신에 한해서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더 놔뒀다간 진짜 미쳐 버릴 것처럼 간절해 보여서 나는 애태우는 걸 포기했다.
고개를 숙여 아르파드의 입술에 내 입술을 스치듯 누른 다음 속삭여 주었다.
“맞아요. 제대로 들었어.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요.”
“…!”
조금 전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얼굴을 막 쓴다고 평했는데.
지금 아르파드는 제일 잘생긴 얼굴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얄미울 정도로.
그런 생각을 깊게 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숨결이 서로 섞일 정도로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원해서 고백하기 직전, 부러 아르파드의 입술에 살짝 버드 키스를 했다.
‘이랬는데 키스 안 하면 남자도 아니지.’
아르파드는 과연 내 남자였다.
“읍!”
격렬한, 그리고 세상을 다 녹여 버릴 듯한 입맞춤이 길게, 아주 길게 이어졌다.
* * *
내정 관리 권한을 황태자비에게 빼앗긴 이후 황후궁은 꽤 한적해 졌다.
하지만 수확제를 앞두고 요 며칠 사이 황궁 전체에 출입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었다.
덕분에 황후의 부름을 받고 특별히 불려 온 한 사람은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황후궁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물론 사전에 황후궁에서 비밀리에 보낸 사람들의 인식을 무디게 해 주는 마도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황궁의 평범한 하녀 복장을 한 그녀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손목에 찬 팔찌 형태의 마도구를 보았다.
‘그래도 이런 사악한 물건을 써서 들어오라 하다니, 아무리 황후라도…….’
이 나이 든 여인은 지모신의 여러 상급 신관 중 하나였다.
이자벨 황후는 10년 넘게 자리를 지키며, 꽤 여러 곳에 발을 뻗어 두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지모신의 신전도 있었다.
수확제에는 황후가 늘 참석할 수밖에 없었기에, 지모신의 신관과는 친분이 생기는 게 자연스러웠으니까.
물론 그중에 황후가 챙겨 주는 성의 표시를 납죽납죽 받는 것도 모자라, 더 요구할 만한 이는 드물었다.
이 노신관 말리아카정도.
황후는 욕심 가득한 노파에게 양껏 뇌물을 먹여 두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용하기 위해서.
처음에 말리아카는 황후의 부름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권 다 빼앗긴 황후의 부름 따위를 내가 왜?’
‘차라리 뜨는 해인 황태자비에게 줄을 대는 게 낫지.’
하지만 그동안 황후가 군말 없이 신관복 안에 금화를 찔러 주었던 이유를 그녀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오지 않으면 그동안 나에게 준 뇌물에 대해 전부 밝히겠다니. 뒷방으로 물러나더니 미친 건가?’
그러면 황후 역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위협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어 결국 황후궁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말리아카는 입술을 삐죽이며 황후 앞에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신수가 아주 밝으시군요.”
노골적으로 비웃고 비꼬는 말.
황후는 피식 웃더니 차갑게 말했다.
“아직 자기 처지를 모르는 모양이군. 그따위로 구는 걸 보면.”
황후의 옆에 서 있던 에피알 백작 부인이 야단치듯 말했다.
“황후 폐하 앞입니다. 제대로 예를 갖추세요!”
“저는 신께 스스로 바친 몸입니다. 따라서 세속의 권력에는 이 정도 예밖에 갖출 수 없음을 용서하세요.”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말리아카를 잘 아는 황후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말리아카를 더 비웃거나 굳이 말하지도 않았다.
시녀장 에피알 백작 부인이 다가가 말리아카의 귀에 속삭이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신관의 안색이 흙빛이 되고, 그녀는 귀하게 여기던 무릎을 황후 앞에 꿇을 수밖에 없었다.
“폐, 폐하!”
황후의 위협은 진짜였다.
그간 말리아카의 뒷주머니에 들어간 귀금속의 목록과 기록, 증거가 있었다.
말리아카가 차명을 써서 비밀리에 마련해 둔 저택과 땅, 노예들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대부분 신전은 청빈과 검소를 가장 중요한 계율로 삼았다.
사적으로 신도에게 돈을 뜯어내 재산을 만드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였다.
알려지면 신전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게 된다.
황후의 협박은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너는 모든 걸 다 잃을 거다.’
그동안 좋다고 받아 챙긴 돈이 이렇게 목줄을 죄게 될 줄이야.
공포와 낭패감에 몸을 떠는 신관에게 황후가 작은 주머니를 하나 건네주었다.
신관의 주름진 손이 그것을 받았다.
지나치게 가벼운 걸 보니 귀금속 같은 게 아니었다.
시녀장이 물러나고, 황후가 다가와 직접 말리아카에게 속삭이기 시작했을 때.
노신관의 주름진 얼굴이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 * *
내 고백 이후 아르파드와 나 사이에 격정적이거나 결정적인 무언가는 없었다. 아쉽게도.
…아니, 아니지. 나는 아쉽지 않았다. 하나도!
여하튼 물리적으로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 가장 컸다.
수확제 준비에 바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르파드는 내 입술을 퉁퉁 붓게 만들어 놓고, 매우 아쉬워했다.
“하아, 미룰 수 있는 일정이면 일주일은 미뤄 놨을 텐데.”
“이, 일주일?”
새삼 온몸이 긴장으로 굳었다.
일주일이나 미뤄 두고 뭘 하려고?
‘아니, 그 전에… 일주일이나 하게? 그게 가능해?’
안 그래도 제례를 주관하기 전에 몸을 최대한 정결하게 해야 한다며, 아르타누아 평원의 신전에서 목욕재계를 시작할 때.
이미 한번 아르파드 때문에 민망한 상황을 겪은 참이다.
신전 내부 정결한 샘에서 목욕해야 한다며, 신관들이 옷을 벗겨 주다가 놀랐다.
“앗! 이건……!”
“왜 그래요?”
“그, 그게……!”
거울에 비춰 보고서야 나는 신관들이 왜 얼굴을 딸기처럼 붉혔는지 알았다.
뒷덜미에 꽃잎처럼 붉은 자국이 선명했던 것이다.
‘이 인간이!’
새삼 아르파드가 헤어지기 전 내 귓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명징하게 떠올랐다.
“오늘 밤, 신전에서 봐.”
배 속이 저릿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온몸에 열이 홧홧하게 올랐다.
그러자 내 목욕 시중을 들던 신관들이 당황해서 물었다.
“세상에. 얼굴이 너무 빨개지셨어. 너무 뜨거우셨나요?”
“찬물을 좀 더 섞을까요?”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데.
나는 애써 뺨의 열을 식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기대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을 가득 안은 채.
드디어 수확제의 제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