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그러자 애니가 내 눈치를 보며 부연 설명했다.
“그게… 요즘 황태자 전하께서 자주 자리를 비우시는데, 궁 밖에 연인을 만드셔서라는 소문이… 조금씩 돌고 있어요.”
설명이 길어질수록, 점점 분노가 어리기 시작했다.
충성스러운 애니니까 자기 일처럼 화를 내는 거다.
“게다가 최근에 비서관 율켄 님이 보석상에 들러 여성용 보석을 주문했다는데… 그게 황태자 전하 대신 구하려고 한 거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내 손 안에서 보고서가 와작, 구겨졌다.
무의식적으로 말투와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신빙성은?”
애니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직 뜬소문에 불과하다고는 합니다.”
미미하게 안도했다. 하지만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길은 다 잡히지 않았다.
나는 구겨진 보고서를 촛불에 태워 버리며 추가로 명령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라고 해.”
하마터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내’라고 말할 뻔했다.
애니는 조용히 분노를 누르면서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면… 어쩌실 건가요?”
“당연하잖아?”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둘 다 가만 안 둘 거야.”
이미 세 번을 겪었다. 또 당할 생각은 없었다.
*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아르파드에게 애인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최근 아르파드의 행동이 나에게 꽤 감동을 주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당신이 순수하게 나를 원해서 손을 뻗어 주길 바라거든.”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르파드가 나를 대하는 행동이나 태도는 변함없었다.
나를 강렬히 원한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있는 힘껏 배려해 주고 있었다.
그 태도에 거짓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나름대로 심증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회귀 전에도 매번 비슷한 시기에 아르파드의 연인에 대한 소문이 돌았어.’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그런데 나와 결혼한 이번 생에도 그 소문이 돈다?
이건 명백히 이상했다.
둘 중 한 가지다.
소문이 사실이거나…….
혹은, 누군가 소문 뒤에 있거나.
그때 아르파드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힐리아? 왜 그러지? 과자가…….”
“으응? 아!”
그제야 나는 ‘소문이 사실이거나’라고 생각한 시점에서 손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단 걸 깨달았다.
바삭바삭한 과자가 손 안에서 파사삭 부서져 있었다.
‘음. 내가 진짜… 열 받긴 했구나…….’
아닐 거라고, 의심 가는 부분이 있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충격도 꽤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안 그래도 충격에 약한 과자인 랑그드샤가 두 개째 내 손에서 와사삭 으깨졌다.
와사삭!
과자가 세 번째로 박살 났다. 여전히 힐리아는 뭔가 생각에 아주 깊이 사로잡혀 있는 듯했다.
아르파드는 아내와 함께하는 행복해야 할 티타임에 갑자기 떨어진 재앙에 대한 슬픔을 잠시 접었다.
힐리아의 기세가 이상할 정도로 진중했기 때문이다.
아르파드는 힐리아가 생각에 집중하도록 놔두고 시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황태자궁에 랑그드샤는 올리지 말도록.”
“예, 전하.”
“황태자비의 눈에 저 과자가 띄는 일이 생기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맛있지만, 내구성이 약한 과자가 신속하게 치워졌다.
그 자리에는 다급하게 마련된 초콜릿이 놓였다.
아르파드는 섬세하게 아내의 손과 치맛자락에 떨어진 과자 조각을 없앴다.
닦았다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물리적으로 진짜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마력으로 가루까지 전부 태워서 흔적까지 없앴다.
힐리아는 여전히 생각에 깊이 골몰해 있었고, 아르파드는 기다리면서 최근 가지게 된 취미나 즐기기로 했다.
초콜릿을 집어 힐리아의 작고 귀여운 입술에 넣어 주었다.
고민 중이면서도 일단 입에 들어온 건 납죽납죽 받아먹었다.
요즘 아르파드가 힐리아에게 들인 버릇이었다.
하도 이것저것 챙기고 먹여 주니 버릇이 돼서 그녀는 무의식중에도 날름날름 잘 받아먹었다.
사소한 일이지만 아르파드는 작은 기쁨을 느꼈다.
한편 힐리아는 들끓는 감정의 고삐를 잡으면서도, 복잡한 판단을 하는 중이었다.
감정과 이성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겉돈다.
가슴 속에선 불길이 이글거리는데, 머리는 빙하처럼 차가웠다.
분노와 상관없이 그녀의 머리는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소문에 대한 대응은 이미 충분히 했고, 소정의 성과도 있었다.
정보기관에 ‘아주’ 상세하게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에 바로 보고가 왔다.
애니가 처음 보고한 이후 이삼일만이었다. 예상보다 빨랐다.
‘우선 율켄의 보석은 모친에게 선물하기 위한 거였다고 했고.’
김이 샐 정도로 가벼운 해프닝에 가까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문의 출처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보석 건 외에는 주로 에스피톨라와 연관 있는 사람들 혹은, 신전에 자주 방문하는 이들 사이에 조금씩 돌기 시작한 소문이라고 해요.”
이 말을 들었을 때 힐리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보고하는 애니 역시 비슷했다.
“에반젤린이군.”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비 전하.”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건달이나 좀도둑, 화류계 등 뒷골목을 지배하는 세력과 약간 충돌이 있었다.
물론 큰 불상사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쪽은 아직 함부로 건드리기 그러니까. 큰일이 아니면 북쪽에서 빙하처럼 움직이지 않을 테고.’
힐리아의 의식은 잠시 샛길로 빠졌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에스피톨라도, 신전도 전부 에반젤린과 연관이 깊어. 그렇다면… 소문의 출처는 역시 에반젤린이겠지.’
당연한 결론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왔다.
‘어쩌면 회귀 전의 그 소문도 에반젤린이 낸 거였을까?’
이번에 처음으로 든 생각이다.
그전에는 아르파드의 연인이 당연히 존재한다고만 생각했고, 에반젤린이 아르파드를 좋아한다는 것도 몰랐으니까.
‘왜 그런 소문을 낸 걸까? 회귀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에반젤린이 빼앗은 남자였던 루드비히는 이제 없다.
정치적으로 몰락한 것과 별개로 행적까지 묘연해졌다.
그렇다면 에반젤린의 감정과 별개로 황후 자리를 원하는 여자가 노릴 대상은 하나뿐이다.
힐리아는 비로소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생각을 바로 입에 담았다.
“아르파드.”
그녀가 이름을 부르기 전부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린 것을 아르파드는 민감하게 눈치챘다.
온 감각을 총동원해 힐리아에게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고 화내지 않았다.
“드디어 날 봐주는군. 기뻐.”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그냥 진심 그대로.
그는 그저 꽃처럼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아르파드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경악할 광경이다.
하지만 최근 황태자궁에선 일상이 된 광경이기도 하다.
아르파드는 드디어 지난 이삼일간 가지고 있던 의문을 말로 표현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지?”
힐리아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생각에 지나치게 골몰하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티를 안 냈다고 생각했다.
‘눈치채고 있었네. 역시.’
이어 당연한 의문이 나왔다.
“알면서 지금까지는 왜 안 물어봤어요?”
“음. 당신이 지금은 묻지 말라고 온몸으로 짜증을 내고 있어서?”
“…당신 좀 과하게 예리한 거 알죠?”
“당신은 나와의 감정 문제에는 지나치게 둔하잖아. 균형이 잘 맞는 거지.”
그렇다.
아르파드의 말이 맞았다.
힐리아는 아주 화가 나 있었다. 소문에 대해 들은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솔직히 다른 생각이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한 가지만이 머리와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감히 내 남자를 노려?’
이 분노는 낯설었다. 당황스러웠다.
회귀 전 세 번의 삶, 그 이전 한국인 ‘유신아’로서의 삶까지 포함해서 처음 경험하는 격렬한 감정이었다.
이건 지극히 사적인 불쾌감이자 분노였다.
과거, 루드비히를 빼앗겼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독한 분노였고, 또한…….
질투였다!
힐리아는 마침내 인정했다.
고개를 돌려 아르파드를 보고,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부언했다.
“당신에게 화난 건 아니에요.”
“나에게 화난 거라도 괜찮아.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군. 당장 이유를 물어보고 고치면 되니까.”
힐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런 건 아니니까 굳이 고칠 건 없어요.”
“그래도 언제든 생각나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최대한 업보를 청산하고 싶거든.”
무슨 업보를 말하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다.
어쨌건 힐리아는 본론을 꺼냈다.
“소문을 들었거든요. 당신이 애인을 만들었다는.”
“…뭐?!”
콰득!
조금 전 힐리아는 과자를 몇 개 부쉈는데, 아르파드는 의자의 팔걸이를 박살 냈다.
“힐리아! 나는 절대 안 그랬어! 당신 외에 누구에게도 눈 돌린 적 없어.”
“알아요. 의심한 거 아니에요.”
놀랍게도 아르파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힐리아는 기분이 나아졌다.
이 남자가 자신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게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조금 기대됐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남자가 어떻게 반응할까.
“사실이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났어요. 그런데 그게… 내가 질투해서인 것 같아요.”
“뭐?”
“헛소문이라도 당신이 다른 여자랑 엮이니까 질투가 나요.”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결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나 봐.”
툭!
아르파드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