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율켄은 얼떨떨했다.
갑자기 루드비히가 왜 나온단 말인가?
루드비히는 최우선 견제와 감시의 대상이었지만, 그건 이제 과거 일이었다.
이제 루드비히는 아르파드의 정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힐리아 덕분이었다.
힐리아와 결혼하기 전까지 10년 넘게 루드비히는 아르파드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힐리아와 결혼 이후 반년도 안 되어서 아예 안중에 둘 필요도 없게 되었다.
율켄은 다시 한번 ‘우리 비 전하’에 대한 긴 찬양을 삼켰다.
‘역시 아르파드 전하께서 하신 일 중 최고는 비 전하를 모셔 온 것…….’
사실 율켄만이 아니라 황태자궁의 궁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힐리아가 오기 전까지 황태자궁은 금이 간 유리 다리 위를 걷는 듯 위태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아르파드가 광증으로 피를 뿌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고.
광증을 제외하더라도 주인인 아르파드가 결코 주변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던 탓도 컸다.
거기에 힐리아는 한겨울에 갑자기 나타난 봄의 여신 같은 존재였다.
칼날처럼 뾰족하던 얼음을 녹이고, 보드랍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게 했다.
거기에 최근에는 분홍빛 꽃잎까지 사방에 날리게 만든 기적 그 자체인 여신님!
‘으아악! 살려 주세요, 비 전하!’
펠릭스 율켄은 마음속으로 여신님을 부르며, 입은 유능한 신하답게 움직였다.
“…아직 수도에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재판소에 이의 제기를 시도하더군요. 루스 후작가나 황후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태인 듯합니다.”
루드비히의 근황을 미리 확인해 둬서 참 다행이다.
하지만 아르파드는 만족하지 못했다.
양 팔꿈치를 탁자에 고정하고, 날카로운 콧날 바로 앞에서 양손을 깍지 낀 자세는 미동이 없었다.
깍지 낀 손 사이로 번쩍거리는 안광은 그야말로 ‘뭐든 하나만 걸려라’ 상태였다.
“그런 쓸모없는 정보 말고. 현재 위치 말이다.”
“아! 현재 외가인 베렌 백작가 방계 중 한 남작가의 저택에 식객으로 있다던데요. 대공저는 몰수당했으니까요.”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노역으로 끌려가지 않았다고?”
뿌드득!
아니, 아니다. 율켄은 아르파드의 팔꿈치가 흑단목 탁자에 구멍을 뚫는 걸 보고 기겁했다.
“히익! 루드비히가 노역만은 피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어서 곧 끌려갈 상황입니다. 재판소에서 구체적인 노역장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으니까요.”
율켄은 빠르게 단어를 우르르 쏟아 냈다.
‘제 탓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발 화내지 마세요!’
…라는 필사적인 발버둥이었다.
그런데 율켄이 전혀 예상 못 한 대답이자 명령이 튀어나왔다.
“끌고 와.”
“…네?”
* * *
아르파드는 지난밤 힐리아와의 대화 때 피나는 노력으로 짓눌러 놨던 살의와 분노, 울화를 타인 앞에서는 굳이 참지 않았다.
그녀 자신만의 문제였다면 기꺼이 참고 기다릴 수 있었을 터다.
혹은 과거의 실수나 폭언 때문에 힐리아가 자신을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거였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았을 거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한 짓만 욕하면 될 테니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남자 자체에 거부감이 있는 거야.’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힐리아에게 남자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 줄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다.
루드비히.
재판 이후 아르파드는 놈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원래도 진심으로 싫어하거나 경계하던 게 아니라, 주제도 모르는 놈을 경멸했을 뿐이다.
그런 놈이 감히 힐리아에게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남겼고, 아직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멈칫거리고 두려워하는 거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다.
‘벌레보다 못한 놈이 감히……!’
아르파드는 한 자 한 자 살의를 담아 씹어뱉듯이 명령했다.
“당장 내 눈앞으로 끌고 와.”
잠깐 망설이던 율켄이 물었다.
“어… 설마 배상금을 갚아 주고 데려오라고 하는 건 아니시죠?”
아르파드의 살기가 짙어지고, 안광이 번뜩였다.
“내가 미쳤나? 그딴 짓을 왜 하지?”
율켄은 납죽 입을 닫았다.
아르파드의 가차 없는 명령이 맺어졌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냥 끌고 와. 벌이 두려워 도망친 치욕적인 수배자가 되면 더 좋겠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 정도도 내 아내에게 상처 입힌 놈에겐 모자란 벌이야.”
“…명에 따르겠습니다.”
율켄은 식은땀을 흘리며 깊이 고개 숙였다.
그날 밤, 베렌 백작가 방계의 남작가에서 한 식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머리에 씌워졌던 자루가 풀리자, 루드비히는 겨우 숨통이 트였다.
“헉! 뭐, 뭐, 뭐야?!”
몇 달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초라하고 더러운 꼴에, 얼굴이 반쪽이 된 루드비히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그는 신세 지고 있는 남작가의 방에서 잠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얼굴에 뭔가 뒤집어씌워지더니 이곳까지 끌려왔다.
용혈 때문에 괴력을 가진 루드비히가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제압당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곧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그는 자신이 왜 무력하게 끌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루드비히는 어둠 속에서 위험하게 빛나는 붉은 눈을 보았다.
“아르파드!”
사촌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지독한 살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꽤 오래 아르파드를 알아 왔지만, 이렇게까지 섬뜩해지는 살기는 처음이다.
산채로 난자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황제께서 아시면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럴 일은 없어.”
“뭐?”
아르파드는 품속에서 무딘 단검을 하나 꺼냈다.
한눈에도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은 것이다.
무표정한 아르파드는 그걸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너는 그냥 사라진 거야. 누구도 어디로 갔는지, 왜 없어졌는지 모르게.”
“…그, 그럴 리 없어. 곧 황실에서 내가 어디 있는지 찾으려…….”
“너는 내 여벌로서 이제 가치가 없단 소리다.”
아르파드는 루드비히가 가장 끔찍해하고, 두려워할 말부터 꺼냈다.
“지난 진홍월에 나는 오랜만에 아주 강하게 광증이 올라왔어.”
잠시 일그러졌던 루드비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그래! 네놈은 황제가 될 자격이 없어! 미치광이 따위가!”
“그리고 이틀 만에 완전히 가라앉았지. 진홍월이 떠 있는데도. 달빛을 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루드비히의 탁한 적갈색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말도 안 돼!”
“그게 사실이야. 전부, 내 아내 덕이지.”
무딘 칼끝이 낡은 벽을 긁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울렸다.
“히, 힐리아?”
“그래. 그러니 이제 부황은 만에 하나라도 너를 내 대용품으로 놔둘 의미가 없단 소리다.”
이건 루드비히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남은 실낱같은 희망은, 아르파드가 광증으로 미쳐 버려 기회가 오는 것뿐이었으니.
“진작 널 죽이거나 치워 버렸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절망에 빠진 남자의 짐승 같은 비명이 울렸다.
“그럴 리 없어! 말도 안 돼!”
루드비히는 버둥거리면서 아르파드가 발치까지 다가오자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마구 외쳤다.
“아, 안 돼! 그래도 난 네 사촌이야! 내가 진짜 황태자 자리를 빼앗은 것도 아니잖아! 널 다치게 한 적도 없고! 이러면 안 돼! 이건 불공평하다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루드비히는 한없이 약해졌다.
그러자 아르파드는 얼음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네가 주제도 모르고 내 자리를 노렸다는 이유로 널 여기 끌고 온 줄 아나?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그러면……?”
눈물과 콧물, 침으로 범벅이 된 루드비히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 앞에 무딘 칼날이 다가오는 것이 비쳤다.
“네가 힐리아에게 상처를 입혔으니까.”
“…뭐?”
루드비히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르파드는 제 사촌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친절을 베풀었다.
“이제 네가 죽을 때까지 겪을 일은 전부 네가 힐리아에게 저지른 죄 때문에 벌어질 일이야.”
“어? 어어?”
“그러니까 깊이, 아주 깊이 후회하도록 해.”
곧 어두컴컴한 지하실 안에 처절한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 * *
나는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정보기관의 보고 중 하나를 보고 좀 당황했다.
“루드비히의 행방을 아직도 못 찾았다고?”
애니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비 전하. 죄송합니다.”
새 정보기관에서 오는 보고는 애니를 통해 내 손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정보기관 자체를 애니가 통솔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애니의 책임이 아니다.
“괜찮아. 책망하는 게 아니니까.”
루드비히의 실종이 처음 보고된 건 며칠 전이었다.
그 직후 나는 샅샅이 그의 행적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보기관의 능력을 확인할 겸, 그리고 에반젤린의 음모를 감시할 겸 내린 명령이었다.
다른 정보 역시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다면, 기관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거다.
그랬다면 정보기관에 할애한 델핀 가의 재산을 떠올리며, 잠시 아까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에스피톨라에 대해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해 주고 있고, 다른 정보들도 충실해.’
그런데 루드비히에 대해서만 오리무중이다.
‘이렇게까지 흔적도 못 찾았다고?’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누가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 와중에 한 가지 정보가 내 시선을 끌었다.
암호문으로 쓰인 보고서를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올 뻔했다.
“이게 뭐야? 아르파드에게 애인이 생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