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힐리아가 기억하는 부부 사이란 당연히 그런 것이었다.
루드비히와의 기억은 하나같이 끔찍하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거부하거나 싫은 티를 내면 바로 폭언과 폭력이 날아들었다.
“울지 마! 왜 짜증 나게 울고 난리야!”
“너 따위에게 관심을 주는 걸 감사히 여기진 못할망정……!”
게다가 루드비히와 에반젤린이 눈앞에서 적나라한 행위를 하며 힐리아를 비웃기도 했다.
힐리아에게 남녀 사이의 일은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남성과의 접촉은 안 좋은 기억을 연상하게 하는 촉매일 뿐.
그렇다고 이를 그대로 드러내진 않았다.
여러 번의 회귀로 얻은 경험은 이런 게 약점이라는 걸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약점은… 숨겨야 하는 거니까.’
누구의 앞에서라고 해도.
잘 숨겼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니 아르파드도 알 리 없다고.
하지만 아르파드와의 결혼 생활이 길어지며, 관계가 생각보다 깊어지면서 그녀는 깨달았다.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는 걸.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말이다.
그는 매번 배려해 주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왜 화를 내거나 재촉하지 않는 건지 이상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를 원한다면… 더 재촉하거나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의 말에 아르파드는 조금 멍한 표정과 당혹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왜 화를 안 내냐고?”
고개를 끄덕이는 힐리아를 보고 아르파드는 울컥 치솟으려는 화를 꾹 눌렀다.
지금 분노는 힐리아를 향한 것이 아니다.
제대로 눌러야 했다.
“화를 낼 이유가 없으니까?”
힐리아는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음, 여자를 원할 때 남자는 당연히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었어요? 여자는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절대 아니야.”
“당연히 남자의 기쁨과 즐거움이 먼저인 거라고.”
아르파드는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된 기분이었다.
힐리아의 앞에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 꽤 낯설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으면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힐리아에게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한 원흉을 속으로 욕했다.
한 명밖에 없었다. 힐리아의 주변인 중, 남자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줄 만한 인간.
게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편견까지 가지게 할만한 이는.
‘루드비히 놈뿐이지.’
그는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이미 파멸한 놈이지만, 새삼 벌이 너무나도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최대한 상냥하고, 친절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그건 절대 아니야. 남녀가 함께 행복해야 하는 거잖아.”
“…….”
“나는 당신이 순수하게 나를 원해서 손을 뻗어 주길 바라거든.”
잠깐 입을 다물었던 힐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랑 안 어울려요.”
“왜?”
“욕심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말하니까.”
그러자 아르파드는 환하게 웃었다.
“이건 욕심이 아주 많다고 보는 게 맞지.”
“그런 거예요?”
“당연하지. 당신이 의무감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나라는 남자를 원해 주길 바라니까. 당신의 마음과 진심, 욕망까지 독점하고 싶은 거야.”
이건 진심이었다.
사실 아르파드가 타인에게 보이는 태도나 폭력성을 생각하면 힐리아의 편견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는 타인을 배려한다거나, 원하는 것이 있는데 남을 위해 제 행동을 접은 적이 없었다.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도, 목숨을 빼앗는 것도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그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계산해서 피하긴 하더라도.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그는 진심으로 힐리아가 두려움이나 다른 이유로 자신과 함께하길 바라지 않았다.
온전히 자발적으로 자신을 택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서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감정과 생각이 아르파드에겐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본인은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가치관은 자라면서 받은 영향도 컸다.
기질이나 성향과 상관없이, 그가 태어난 후 처음 보고 배운 부부 관계가 부황과 모후였으니까.
두 사람은 정략이 아니라 연애결혼이었고.
황제는 아직도 선황후를 그리워했다.
아르파드가 부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별개로, 그가 생각하는 남편의 역할이나 부부 관계는 그러해야 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아르파드는 힐리아가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아르파드는 진심만을 담아 이걸 그대로 말했다.
“난 당신이 내 앞에서 웃어 주기만 했으면 좋겠어. 기쁘고 행복하기만 하길 바라. 나와 함께하는 어떤 일이든.”
그 말에 힐리아는 안도하고 또 감동한 듯했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 걸 보며, 아르파드는 재빠르게 눈물을 입술로 훔쳤다.
힐리아가 답지 않게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지금처럼 감동해서 우는 모습에도 가슴이 철렁인다.
그녀가 울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따윈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말도 안 되는 꿈속에서의 모습이라던가…….
혹은, 피눈물 흘리며 금색으로 빛나는 단검을 스스로 목에 들이대고 있는…….
“…?”
아르파드는 돌처럼 굳었다.
방금 그의 뇌리를 스친 환영은 지독하리만치 선명했다.
마치 실제 그의 것이었던 적 있는 기억이기라도 한 것처럼.
‘뭐지? 이건?’
비슷한 경험이 아르파드에겐 꽤 있었다.
종종 이상한 꿈을 꾸더니, 이젠 눈 뜨고 있어도 환상을 본다.
게다가 얼마 전엔 더 말도 안 되는 일도 있었다.
“네가 골랐던 그 반지가 다시 네게로 간 걸 보면, 결국 이리될 운명이었던 모양이지.”
부황은 분명 자신이 힐리아의 결혼반지를 골랐다고 말했다.
그에겐 그런 기억이 없었다.
힐리아가 광증을 잠재워 주지 않았다면,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을 거다.
자신이 정말 미쳐 가는 것인가 하고.
하지만 아니었다.
진홍월의 기간에도 힐리아와 함께하며 첫 이틀을 빼고는 광증이 전혀 올라오지 않았다.
광증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 * *
최근 율켄의 업무 환경은 아주 수월했다.
유일하고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상관의 기분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분이 좋다, 라고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되는 상황.
아르파드는 그야말로 구름 위를 밟고 있는 듯 보였다.
그 기점은 놀랍게도 진홍월 기간 중간부터였다.
‘원래 진홍월 때는 숨소리도 죽여서 지내야 하는 때였는데 말이지.’
자칫 잘못했다간 피를 보는 사건과 함께 흉흉한 소문이 나돌곤 했었다.
그때마다 율켄은 제발 이번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빌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 진홍월에는 아르파드의 상태가 지나치게 좋았다.
매우 멀쩡하게 광기는 흔적도 보이지 않은 채 정무를 수행했다.
게다가 누가 봐도 아르파드가 아주 기분 좋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표정이 다 풀려 있었다.
율켄은 물론이고, 황태자궁의 궁인들은 모두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이렇게 확신했다.
‘비 전하 덕분이구나!’
‘우리 비 전하께서 드디어 황태자 전하를……!’
‘역시 위대한 아르타누스께서 축복한 황태자비다우셔!’
이 소문은 황태자궁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번져 가고 있었다.
율켄이 주도적으로 사방에 이 소문이 퍼지도록 노력 중이다.
아르파드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 불신을 단박에 없애 버릴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그랬는데!
지금 이 날벼락은 대체 뭐란 말인가?
출근한 율켄은 집무실에 도사리고 앉아 살기를 풀풀 흘리는 아르파드를 본 순간 그대로 문을 닫았다.
“오늘은 몸이 좋지 못해 이만 조퇴하겠습니다.”
그러자 기분이 정말로 저조하다 주장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비서관의 발목을 잡았다.
“나중에 뒷수습할 자신 있으면 이대로 퇴근하던가.”
“…….”
다년간의 경험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진짜 위험하다. 조금이라도 엇나갔다간 목숨이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다.
율켄은 눈물을 좍좍 흘리며 분노한 드래곤이 도사린 굴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했다.
아르파드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참지 않고 다 드러내고 있었다.
분노, 울화, 질투 등등.
율켄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이 인간 갑자기 왜 이러는데?!’
난데없는 재앙에 울고 싶은 율켄에게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기세의 아르파드가 물었다.
“루드히비 놈은 지금 어디서 뭘 어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