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힐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러다간 얼결에 홀랑 넘어가 버린다고!’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노력하며 안으로 몇 걸음 더 들어섰다.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왜 이렇게 급하게 왔어요? 머리도 다 안 말리고.”
그러자 아르파드가 쓱 고개를 들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잘생긴 이마와 뺨, 턱선을 타고 달라붙는다.
물방울이 머리카락 끝에 맺혔다가 또르륵, 굴곡진 근육을 타고 흘렀다.
붉은 비단 가운에 몇 방울이 적셔 들며, 색이 조금 짙어진다.
어째서일까. 그 광경이, 이상할 정도로 색정적으로 보였다.
덕분에 힐리아는 젖은 가운이나, 드러난 피부와 근육의 굴곡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등을 향해 저절로 향하는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아르파드는 힐리아의 그런 상태를 모르는 건지 태평하게 대꾸했다.
“빨리 오고 싶어서 대충하라고 하고 달려왔지.”
“…시종들이 불쌍하네요.”
그러자 아르파드가 킥킥거렸다.
“아니. 내가 못 참겠다고 이대로 가겠다고 하니까, 응원하던걸?”
“뭐라고요?!”
힐리아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가, 아르파드의 평소의 하얗던 얼굴이 미미하게 상기되어 홍조가 도는 걸 보고 다시 시선을 피했다.
머릿속에 열이 오르고 생각이 실타래처럼 헝클어졌다.
“왜 무슨 응원인지 안 물어?”
“안 물어볼 거니까, 굳이 말하지 마요.”
“아니, 말할 거야. 설명할 거야. 방금 ‘뭐라고요?’ 했잖아.”
“필요 없다니까!”
아르파드는 몇 걸음 걷지도 않았건만 벌써 힐리아의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지나치게 잘생기고, 오늘따라 유달리 촉촉하고 홍조가 어린 부담스러운 얼굴을 대놓고 들이밀었다.
‘히익!’
“우리 금실이 아주 좋으니 바람직하다고, ‘좋은 소식’이 있길 응원한다더군.”
사실 비슷한 말은 힐리아도 자주 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미지와 지위를 튼튼히 할 겸 강조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우리는 잉꼬부부예요!’
아르파드에 대한 공포심을 가라앉히기도 좋고, 황태자비의 위치를 빠르게 안정시킬 손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힐리아는 적극적으로 이용한 그 이미지가 이렇게 양날의 칼이 될 줄 미처 몰랐다.
아르파드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도 말한 건데, 부황의 기대에도 부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힐리아는 생각했다.
‘왜 목소리를 그렇게 불필요할 정도로 낮게 까는 건데? 게다가 왜 그렇게 촉촉하게 말하는 거야? 과하게?’
그녀는 날아가려는 이성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외쳤다.
“그놈의 기대! 아까는 진짜 그런 괜한 소리는 왜 한 거예요?!”
“그야 부황과 좀 더 가까이 지내라는 건 그대가 늘 하던 말 아닌가?”
“부자 사이가 가까워지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보통, 사이가 나쁘던 부모 자식도 손주가 생기면 관계가 부드러워지곤 한다더군.”
“누가 그런 소리 했는데!”
“외조모님이.”
“…그거, 별로 신빙성 없는 거 아니에요?”
대공비는 아르파드가 태어난 후에도 여전히 황제를 싫어했던 걸로 아는데.
그러자 아르파드는 의외의 말을 했다.
“아니, 내가 어릴 땐 나를 보러 꽤 오시긴 하셨어.”
“진짜요?”
힐리아는 곧 납득했다.
‘하긴, 어릴 때의 아르파드라면… 꼭 천사처럼 귀여웠을 것 같으니까.’
그 꼬장꼬장한 대공비도 천사 같은 외손자를 보고는 마음이 좀 풀렸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아르파드의 장례식에서 그 난리를 쳤던 걸 테고.
힐리아는 어린 아르파드를 상상하고 잠시 정신이 몽롱해질 뻔했다.
하마터면 ‘아르파드를 닮은 아이라면 천사 같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할 뻔했다.
‘정신 차려, 힐리아! 이렇게 얼렁뚱땅 막 넘어가 버리면 안 돼!’
하지만 아르파드는 여전히 직진 그 자체였다.
“게다가 외조모께 들으니 그 속설이 꽤 신빙성이 높다고 하시더군.”
“그걸 굳이 물어봤어요?! 언제?”
“오늘 내 집무실에 들렀다 가셨어. 오셔서 부황과 비슷한 말을 하시더군.”
“…!”
힐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왜 타이밍 맞춘 것처럼 사방에서 난리인 건데?!’
힐리아의 눈에 유달리 엉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은 아르파드의 잘생긴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그러고 보면, 당신이 제의를 입으면 지나치게 매혹적일 것 같아서 기대 반, 걱정 반이야. 당신이 그걸 입고 선 모습을 다른 인간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단 말이지.”
힐리아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건 진짜 헛소리잖아요! 제의는 신관들 복장이랑 비슷해서 금욕 그 자체던데!”
아까 황제, 아르파드와 함께 제의 상태를 확인해 봤었다.
힐리아의 말대로 제의는 신관의 복식을 기본으로 만든 것이라, 금욕적인 디자인이었다.
턱 아래까지 단추를 꽉 잠가 목까지 가리고, 드러내는 건 얼굴과 손뿐.
거기에 길고 두꺼운 천이 몸 앞뒤를 거듭 가려 굴곡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색도 단순한 흰빛.
옷 전체에 아르타누스를 상징하는 금빛 드래곤, 지모신의 문장, 그리고 데스포이나의 문장이 경건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아르파드 몫의 제의는 같은 배열에 지모신의 문양만 천주신의 것이다.
아무튼 조상 드래곤과 온갖 신을 상징하는 이름, 그리고 문장이 빼곡하게 수놓인 신전과 황실의 알력 싸움이 지나치게 잘 드러난 옷이라 보기만 해도 숙연해졌다.
그런데 그걸 보고 저런 음흉한 생각을 하다니.
힐리아는 붉어진 얼굴로 열심히 타박했다.
“아니, 그 옷 디자인 어디에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할 여지가 있어요? 그 정도면 당신 평소에 벽 보고도 흥분하는 거 아니에요?”
아르파드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중요한 건 옷 디자인이 아니야. 그 알맹이지.”
“알맹이?”
“당신.”
아르파드의 얼굴이 다시 한번 훅 다가왔다.
뜨거운 숨결이 힐리아의 뺨과 입술을 간질였다.
“거적 데기를 입든, 전신 갑옷을 입고 있든, 당신인 게 중요한 거야.”
“……!”
“뭘 입든 당신이니까 색기 넘치고 매혹적으로 보일 수밖에.”
역시 아르파드가 변태인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려던 힐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아르파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힐리아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히익!”
힐리아는 새된 신음을 참으며,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쓰러질 뻔한 것을 막은 건 아르파드였다.
한 팔로 힐리아의 허리를 감아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파지직, 하며 불길이 치솟을 듯한 긴장감.
아르파드는 아내의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힐리아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아르파드의 목에 매달렸고,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아르파드는 공주님 안기를 한 채 걸었다.
그리고 힐리아를 침대 위에 깃털처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힐리아는 사람의 영혼이 액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마주 닿은 아르파드의 손이, 체온이 너무 뜨거웠다.
그에게 안겨 침대에 눕혀진 것만으로 온몸이 절절 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안에 든 영혼이 끓어올라 저 멀리 날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힐리아의 옆에 누우면서, 아르파드는 작게 속삭였다.
“사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고.”
저 ‘노력’이라는 말이 아주아주 야하게 들리는 건 전부 아르파드 탓이 틀림없었다.
“부황에게 한 말도 진심이었고, 사실 지금도 노력하고 있어.”
“어떤, 노력이요?”
꼭 물어봐 달라는 것처럼 교묘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르파드가 씩 웃었다.
“그야 당신을 홀리려는 노력이지.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 사실 이 반지를 가져다 바칠 때부터 나는 꽤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고.”
힐리아는 벌게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 노력이라는 거, 일부러 젖은 상태로 침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도 포함인 거예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처지가 아닌지라…….”
힐리아는 새삼 기억났다.
진홍월의 밤 이후 그들은 꽤 가까워졌다.
아르파드의 애정 표현은 물론이고, 낮이건 밤이건 스킨십도 꽤 스스럼없어졌다.
농밀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선을 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르파드가 싫다거나, 태도가 문제인 건 아니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본인의 매력으로 휩쓸어 가려는 듯 전차처럼 밀어붙여도…….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 멈췄으니까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아르파드는 힐리아를 끌어안은 채,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니 오늘 밤도 좋은 꿈을 함께 꾸자고.”
힐리아는 자신을 끌어안은 아르파드의 손길에 강제성이 없다는 걸 알았다.
더는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애정 깊고 따스하게 끌어안고 있는 것이 다였다.
그래서 힐리아는 먼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 왜 화도 안 내고, 짜증도 안 내요?”
아르파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르파드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걸 힐리아는 잘 알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곤 했다.
회귀 전의 악몽 같은 기억들이 파편처럼 떠올라 그녀를 찔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