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자, 잠, 잠깐. 이렇게 훅 들어오면……!
내 당혹감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황제의 연타가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이번에는 좀 기대를 해 보고 싶구나.”
“…풉!”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차를 뿜었다.
그나마 아르파드가 빠르게 손수건으로 가려 줘서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건 별로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나는 황제가 시전한 시아버지로서의 압박에 잠시 정신을 못 차렸다.
‘이게, 이게… 시월드!’
좀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황후도 시어머니라면 시어머니고, 에반젤린도 시누이에 가깝긴 하지만.
그 둘은 진짜 아르파드의 가족이라고 보긴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상황이 내가 처음 경험하는 시월드의 압박인 셈이다.
‘사실 황제가 시월드 짓을 할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실제로도 황제가 시아버지 짓을 하긴커녕, 아르파드가 패륜아 행동만 해 댔다.
나는 그 사이에서 분위기를 환기하려 애썼고.
아마도 황제는 이걸 시월드 압박이라고는 전혀 생각 못 할 것이다.
그냥 부모의 덕담 정도로 생각하고 던진 거겠지.
황제는 우리가 진짜 부부인 줄 알고 있으니까.
그것도 약탈혼으로 시작한 잉꼬부부.
결혼 이후 이제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좀 이르긴 하지만, 슬슬 좋은 소식(?)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중이긴 했다.
“이렇게 금실이 좋으니 곧… 제가 주책없었네요.”
“내년쯤에는 아기 옷을 선물로 올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등등, 지금까지 꽤 많이 들어 본 말들과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황제의 발언은.
하지만 지나치게 이르다 못해 섣부른 기대였다.
‘아, 아니. 별 따기는커녕 아직 우리는 하늘도 안 봤는데요.’
…라고, 황제에게 대답할 순 없었다.
그때 진홍월 기간 동안 꽤 진전된 아르파드와 내 관계가 떠올랐다.
‘하늘까지 본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꽤 높이는…….’
이런 허튼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지금은 이렇게 샛길로 샐 때가 아니라고!
그때였다.
내가 잠시 대답 못 하고 멍하니 있는 사이, 아르파드가 빈틈을 절묘하게 노리고 들어왔다.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 제 부친의 모든 말에 떨떠름하게 반응하던 사람이 맞나 싶게 환하게 웃고 있다.
“걱정 마십시오. 부황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니까요.”
“…!”
아마 입 안에 차가 남아 있었다면 다시 대차게 뿜었을 거다.
‘미쳤어요?!’
미리 뿜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내가 최대한 노려봤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아르파드는 오히려 정면에서 환하게 웃어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예쁜 웃음이라 화를 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앞에서 그러기 힘든 것도 크게 작용했다.
절대로 미모에 홀랑 넘어가 버린 것은 아니었다.
* * *
아르타누아의 평원 수확제는 특이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평원 자체는 드래곤 아르타누스의 영지였고, 그 후손으로서 황가가 지배하는 황령(皇領)이다.
하지만 수확제는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라, 신전의 입김이 안 닿을 수 없었다.
본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은 신앙에 기반을 두어 이루어지는 것이긴 했으니까.
그래서 의식의 주체는 황실이지만, 의식의 방법과 형식은 신전의 것을 많이 따른다. 보조 역시 사제들이 하고.
그 때문에 아르타누아 평원 수확제에 사용되는 신전과 기물들에는 주신과 지모신 외에 데스포이나의 문장도 들어간다.
데스포이나가 바로 씨앗과 수확의 여신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나나 아르파드가 가진 건 아니지만, 회귀 전에 데스포이나의 신물을 본 적 있었지.’
아르파드에게 준 아그리피나의 눈물.
내가 그에게 받은 스타틸리아의 별.
그리고… 아마 지금쯤 에반젤린 손에 들어가 있을 데스포이나의 열매.
이 세 가지가 내 눈으로 직접 본 신물들이다.
남은 두 개는 어딘가에 존재하리라는 것만 안다.
다섯 신물과 연관된 다섯 자매 신은 신전이 남아 있지 않아 세력이 약했다.
그 때문에 신물들이 신전이라는 보호자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세력자의 것이 되어 있을 수 있었다.
가장 세력이 큰 천주신과 지모신의 신전 정도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
두 신전은 결혼 성사에 대한 전통적인 영향력과 신년제와 수확제라는 대륙적인 행사에 관여하는 것으로 영향력을 겨우 유지하는 중이다.
두 신전이 떠오르자 자동으로 한 명이 연상될 수밖에 없었다.
‘비오 대주교.’
재판 이후 신전에서 조용하게 지내고 있는 듯했다.
‘대략적으로 완성한 정보기관을 통해서는 눈에 띄는 움직임은 보고되지 않았는데…….’
황궁에 들어온 직후, 내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내 사적인 정보기관이었다.
율켄이 관리하는 첩보 기관은 꽤 유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르파드의 것이다.
만일이나 나중을 대비해 나는 독자적인 루트를 만들어 두고 싶었다.
그 때문에 꽤 공을 들였고, 그 결과를 이제 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비오 대주교나 마탑주에 대한 정보는 얻기 힘들었다.
둘 다 접근하기 힘든 이들이긴 하니, 좀 더 수단을 강구해 봐야겠다.
사실 내가 정보기관을 따로 가지려 했던 데에는, 아르파드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헤어지게 될 것도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이 되니 이런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굳이 새로 만들 필요가 있었나 싶긴… 한데…….’
내가 아르파드와 이혼을 당연하게 생각한 건 우리 사이에 눈곱만큼의 감정도 없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좋아할 리 없다고. 정확히는 나는 남녀 사이의 사랑이나 애정에 질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아르파드의 성격은 사랑에 빠져 허둥대는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날 사랑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 그에게 연인이 존재했다고 알고도 있었고.
이제 이런 문제는 전부 무너지거나 별거 아닌 상황이 되어 버렸다.
설사 그 소문이 진짜더라도, 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일단 아르파드가 좋다고 한 건 나인걸.’
나도 모르게 입가가 흐물흐물 풀어지려 했다.
게다가 진홍월 시기 동안 그와 단둘이 꽤 여러 번 열정적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마음을 확인하기도…….
아니, 아니지!
이렇게 말하면 갈 데까지 간 것 같잖아!
아직, 아직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은.
새삼 오늘 황제와의 티타임 때 아르파드가 한 망언이 떠올랐다.
“걱정 마십시오. 부황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해 노력 중이니까요.”
그 말이 꼭, 오늘 밤에라도 노력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나는 열 오른 얼굴을 휙휙 흔들었다.
‘으아아! 아까부터 왜 이래? 좀 진지하게 상황 정리하려는데 꼭 끝에는 그 인간이……!’
그러자 옆에서 시중을 들던 애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얼굴이 너무 빨개지셨어요, 비 전하. 열도, 좀 있으신 것 같고. 좀 전에 목욕물이 너무 뜨거우셨나요?”
“아, 아냐. 괜찮아.”
정말 괜찮다.
목욕물은 딱 적당한 온도였고, 장미 꽃잎과 라벤더 오일까지 뿌려져 아주 기분이 좋았다.
얼음주머니를 가져오겠다고 소란을 떠는 애니를 겨우 안심시키고, 찬물 한잔을 마셨다.
겨우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사태의 원흉에게.
‘괜한 소리를 해서는 신경 쓰이게 만들다니. 진짜……!’
오늘 밤에 보면 잔뜩 뭐라고 해 줘야겠다. 그렇게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 각오는 침실에 들어선 순간 속절없이 녹아 사라지고 말았다.
* * *
힐리아는 상아의 침실에 들어섰을 때 잠시 놀라서 멈칫했다.
아르파드가 먼저 와 있는 건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그동안 그와 꽤 여러 번, 아니, 숫자를 일일이 헤아릴 의미 없을 정도로 밤을 함께 보냈으니까.
‘아니, 그냥 사전적인 의미이긴 하지만 말이야.’
막 씻었는지 습기가 남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붉은 비단 침의만 입고 침대 맡에 선 아르파드를 보자 홀린 듯 생각이 멈췄다. 발도 따라서 멈춰 버렸다.
새삼, 심장이 두근거렸다.
약탈혼 이후 별궁에서 그와 처음으로 함께 잠들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런 차림이었던 것 같은데…….’
쓸데없이 촉촉하고, 또 과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때도, 지금도.
아니, 아니다. 지금은 몇 배로 더 위험해진 것 같았다.